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통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도하고 찬양할 때 뜨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뜨거움을 느끼는가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원하는가?”입니다. “내가 정말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기 원하는가?”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한 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무리는 ‘감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짐승의 권세가 성도를 핍박하는 환난이 오고 지상 최대의 미혹이 나타날 때 두 무리가 현저하게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계 13:13~14)

사탄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이적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감정을 따라서 왔던 사람들은 모두 미혹당해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최후에 있을 마지막 미혹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교회 속에 감정을 중요시하는 신앙을 깊숙이 퍼뜨렸습니다.

 

감정을 따라가면 미혹당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따라가게 되는 이유는, 믿음과 감정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방언할 때 뜨거운 감정이 생기면 그것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믿음은 그런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 진리를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서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고 영적인 안정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을 따라가면 외롭고 공허하며 부패한 삶을 살다가 사탄의 미혹에 빠져 멸망당하게 됩니다. 사탄은 감정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주고, 이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적을 줍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미혹당한 사람이 겉으로 볼 때는 더 기쁘고 더 행복하고 하늘의 큰 권능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깊은 미혹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들도 감정과 이적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오늘날 많은 사람이 황홀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사탄이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이적에 미혹당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감정과 신앙을 혼돈하는 사람들에게 거짓 은사와 이적을 던져 주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감정을 뜨겁게 해 주고 그들이 마치 새로운 영적 세계를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미혹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감정의 극치를 맛보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감정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와 거룩함이 아닙니다. 감정적 신앙으로는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며 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삶을 이끌어 가는 원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롭게 거듭난 생애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적과 은사를 경험할 때는 뜨거움과 황홀함을 느낄지라도 실제 삶으로 돌아왔을 때는 여전히 습관적인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깊은 낙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감정이 높이 올라갔다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오르내림을 되풀이하면서, 감정의 요요 현상을 반복하게 되고 심리적 불안정과 우울증을 갖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탄에게 속은 것이며 또한 스스로의 감정에게 기만당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미혹의 시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성령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회개하지 않았고 말씀과 예언에 관심이 없으며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도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감정을 따라가고 있는 증거

심령 부흥집회나 기도원에서 성령 안수를 받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등이 뜨끈뜨끈했습니다! 눈앞에서 파란 불이 번쩍번쩍했어요!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나와서 온몸을 사로잡는 듯했습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병이 나은 것 같고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성령 체험은 감정의 극치가 아닙니다. 감정을 따라가는 사람의 신앙은 감정 이상으로 향상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닥치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신앙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변화된 마음이며, 자아와 교만이 깨어진 죽은 생애입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면서 좁은 길을 걷는 삶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적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시하고 내 뜻과 내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을 알면서도 다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감정을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방언을 주셨고 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능력과 감정을 주입시키면서 더 깊은 미혹으로 끌고 갑니다. 미혹에 빠진 사람들은 사탄의 농간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넓은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적 경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느낌이 나중이다

느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활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특별한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방언을 할 때 얻는 황홀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특별한 감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오고 그것에 이어서 감정이 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은 순종하지 않으면서 기쁘고 행복한 감정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찬송과 기도를 통해서 뜨거운 감정을 얻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왜냐하면 좁은 길을 걷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증거는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인의 감정은 믿음을 활용한 결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고 전진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감격과 감사의 정신을 축복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따라 좁은 길을 걷는 성도들 마음속에 기쁨과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활용하지 않고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애쓰게 되면, 사탄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을 열어 주게 됩니다. 죄를 버리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려고 애쓰면 사탄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감정과 느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결과로 얻어지는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뜨거운 감정을 느낄 때에는 큰 믿음을 나타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믿음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야말로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입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구름이 마음을 덮을 때야말로, 우울한 느낌이 마음을 깊은 구덩이에 빠뜨릴 때야말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밝고 유쾌한 정신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현대 기독교회는 성령을 뜨겁고 황홀하고 전기 충격과 같은 경험으로 소개하지만, 성경은 성령의 체험을 매우 조용한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은 색깔이 없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분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바람은 나무를 흔들리게 하고 풀잎을 움직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면, 우리의 삶이 그 사실을 증명하게 됩니다. 우리 품성과 습관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을 받기 이전과 이후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생기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이 심하게 흔들려서 영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둑질하던 사람이 도둑질을 멈추게 되고,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순결한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지루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을 받는 방법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감정과 이적으로 채우려고 애쓰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느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은사와 기적을 구하다가 사탄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뜨거운 감정과 느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망한 노력입니다. 마음에 욕심이 있고 교만으로 목이 곧은 상태에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속과 이기심이 가득 차 있는 마음에는 성령께서 거할 수 없습니다.

먼저 주 앞에 나가 마음에 품고 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애착심을 갖고 붙잡고 있는 것들을 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가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죄에 끌려다니는 처참한 삶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면,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라는 절규가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면, 주 앞에 나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을 짓누르고 괴롭혔던 죄를 주 앞에 내려놓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성령의 은혜가 밀려오면서 육체의 정욕과 더러운 감정이 순결케 될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가 예수님의 말씀에 잠잠해졌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평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이 싫어지고 죄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면서 그토록 버릴 수 없다고 생각되던 죄가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매우 분명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성령)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9, 13~14)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과 계명을 무겁다고 생각하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런 말씀을 남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십자가를 바라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사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큰 특권과 명예로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여기 분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22). 성도 여러분, 정말 성령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왜 성령을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종교는 초월과 기적을 통하여 자기 종교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자기가 믿는 신을 분명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주문이나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외우거나 주절거리는 의식을 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의식을 열심히 하면 신이 감동해서 복을 내리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며 형벌을 면제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직접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며, 성령을 통해서 끊임없이 인격적으로 접촉하셔서 대화하시며 설득하고 감동과 확신을 줍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의 능력에 관심을 갖고 추구하고 있으며,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원하며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에 따라서 운명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이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갖고 계셨던 병 고치는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방언의 능력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까지 갖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파워를 탐하는 정신이 오늘날 기독교회 속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탐하면서 그분의 성품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결코 그런 사람에게 능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늘 가기를 원합니다. 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가기 전에 하나님 곁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가서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가지게 될지라도 결코 사탄(루스벨)처럼 교만하고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천국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봉사하고 방언할 때는 놀라운 하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설교와 가르치는 일이 끝나고 봉사와 방언이 끝나면 마치 전기 스위치를 내리면 전기불이 나가는 것처럼 하늘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능력과 파워를 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좁은 길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린양 예수를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고 느끼는 것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