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은 재창조의 경험이다

기독교회 안에 두 무리가 있습니다. 한 무리는 육체에 끌려다니면서 살고, 다른 무리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삽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까? 아무도 여러분을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보십니까? 만일 지옥과 형벌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여전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가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육체를 따라가기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고민에 대한 답으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어떻게 하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거듭남은 창조의 경험일까요? 진화의 경험일까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경험과 조금씩 선을 계발해 가는 경험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경험입니다. 내 힘과 내 의지와 내 훈련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반드시 해야할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어떻게 하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본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체면과 위선이 좀 더 완벽한 가면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독수리 같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비둘기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비둘기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이 말씀처럼, 흑인이 피부를 하얗게 바꿀 수 없습니다. 표범이 그 얼룩 무늬를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에 익숙한 독수리가 비둘기로 바뀔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독수리를 길들여서 비둘기 흉내를 잘 낼 수 있도록 훈련하는 신앙으로는 결코 참된 구원을 경험할 수 없으며, 복음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거듭남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완벽하게 위장된 위선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속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마저 기만하는 늪에 빠져서 죽어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3~7).

 

독수리를 죽이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요?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왜 독수리가 죽어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나를 주관하시려면, 독수리를 십자가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 경험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삶이 가능해집니다. 독수리가 못 박혀야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 복이 내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처럼, 독수리 같은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날마다 죄에게 끌려다니는 노예의 삶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롬 6:6)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쉬운 경험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매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내 속에서 독수리를 풀어서 기를 때에는 독수리와 내가 좋은 관계로 지내는데, 일단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면 독수리는 처절하게 저항합니다. 그것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성도들이 갖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원하는 대로 끌려다녀서는 결코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내 힘으로 잡아서 못 박으려고 노력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적 신앙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신앙으로는 열심히 노력하고 처절하게 투쟁해도 남는 것이 패배와 낙망뿐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옛 사람과 자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 의지와 결심으로는 독수리를 결코 죽일 수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독수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육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어떻게 해야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을까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독수리가 죽게 될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그분께서 대신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정죄를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받고 돌아가셨다는 복음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심령 속에 말할 수 없는 감격과 은혜가 밀려오게 됩니다.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독수리는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순종의 생애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무엇을 강권할까요? 말씀에 순종하도록 강권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목적은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최종적으로 “온전케” 됩니다. 그것이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요일 2:5).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사랑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거룩한 사랑의 목적이 우리 속에서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복음은 모두 거짓 복음이며, 완전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방해물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고 명상하면, 성령께서 내 마음을 “빚진 자”의 심령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바울과 같은 간증을 하게 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은 육체의 정욕을 쳐서 복종시키고 그리스도께 죽도록 충성하고 싶은 거룩한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예수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은 소원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 14:4).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세속적인 것들을 싫어하게 되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께서 누구이며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알면, 진실로 그것을 알면, 우리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순종과 영생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통해서 생긴 전격적인 변화는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은 드디어 육체 속에서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아무나 자아를 부인하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나가 새 마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성결의 경험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은 온 마음을 다해서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주의 뜻을 따르겠나이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성도들은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 “안 돼!”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독수리가 점점 힘을 잃고 죽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시험으로 느껴졌던 유혹이 이제는 별다른 유혹거리가 되지 않게 됩니다. 술과 담배에 인이 박힌 사람이 그것을 끊을 수 있게 됩니다. 습관적인 죄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게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 속에서는 독수리가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날아다니는데, 거듭난 그리스도인 속에서는 독수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독수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마음 보좌에는 예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위험한 오해와 분명한 진리

한 번 거듭났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주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채우는 일을 게을리하면, 독수리는 다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활개를 치게 됩니다. 거듭남의 경험을 잃어버리면 다시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는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중생을 경험했던 그리스도인도 다시 돈을 사랑하고 세상에 붙잡혀 살았던 옛 생애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거듭났다고 해서, 무조건 그 경험이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남을 경험했던 사람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세속으로 돌아가 멸망당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빌리 그레헴 목사는 그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중 5%라도 천국에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래전부터 사탄은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사로 잡는 마술 같은 복음을 퍼트리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신다.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는가?”라는 식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비록 내 마음과 삶에 탐욕과 죄가 있을지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모든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그리스도의 피가 회개하는 성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상한 심령으로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 주 앞에 나가 죄를 버리는 성도들을 덮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죄를 붙잡고 있는 자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고 돌아서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주의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15, 20~22)

성경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좁은 문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한 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신앙이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는 신앙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유혹이 죄가 되는 과정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에 대한 유혹과 충동을 느낄까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독수리의 요구는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독수리가 악하고 이기적으로 살라고 충동질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유혹과 충동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새가 머리 위에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유혹과 시험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유혹을 받아서 죄를 범하고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설명했습니다.

“1)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2)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3)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첫 번째 단계는, 시험을 받는 단계입니다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마음이 시험을 받으면 “욕심에 끌리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유혹을 느끼고 충동을 받는 것 자체는 아직 죄가 아닙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독수리가 내 속에서 악한 것을 달라고 소리를 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혹이 와서 욕심에 끌려감을 인식할 때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도움을 간구하지 않으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욕심을 마음에 품기로 결정하는 단계입니다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유혹을 느끼고 충동을 느낄 때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독수리가 주는 충동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면 그때 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가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데도 그것을 방치하거나 즐기고 있으면 “욕심을 잉태해서 죄를 낳”게 됩니다. 시험을 받고 육체로부터 꿈틀거리는 충동이 올라오는데 우리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고 정욕과 욕심을 품으면, 비록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을지라도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여자를 보는 것이 죄가 아니라 육체에서 올라오는 음욕을 마음에 품기로 결정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서 죄를 범한 영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범한 영혼은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가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껴져야 합니다. 죄를 버리고 애통해 하는 참된 회개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죄는 세 번째 단계로 성장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죄가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을 품고 죄를 범했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죄는 그 상태에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죄는 점점 더 그 영향력을 키워 나가게 됩니다. 머리 위에서 새가 둥지를 틀면, 그 속에 알을 낳고 새끼를 받아 키우게 됩니다. 일단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해서 따라가기 시작하면 나를 멸망의 계곡까지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죄를 키우고 성장시켜 온 영혼에게는 전격적인 굴복과 회개가 필요합니다. “주여, 저를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옵소서. 이 죄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죄로 인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고 더러운 양심을 씻어 주시옵소서. 저에게 상한 심령을 주시고 정결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성장시켜 온 사람은 금식과 말씀으로 영혼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인가? 독수리인가?

그리스도인의 마음 이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모시면 옛 사람, 즉 독수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시험과 유혹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나가 “주여, 제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저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 돼.”라고 거절하면, 바로 그것이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도 “예.”라고 대답합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 박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 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의 모습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마음속에 독수리와 예수님을 함께 모시고 살기 원합니다. 교회 가서는 예수님을 섬기고, 세상에 나와서는 독수리가 원하는 요구를 따라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못 박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면, 그리스도의 가슴에 못 박는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 보좌에 예수님을 모시고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구원받은 성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매우 논리적인 독수리의 요구

십자가에 못 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자신을 놓아 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못 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 댑니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 달라고 애원하면서 이렇게 우리를 설득합니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 박아도 되잖아요!” 못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독수리의 논리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단호하게 “안 돼.”라고 거절해야 합니다.

단호하지 않으면, 오늘은 독수리를 못 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하면서, 죄의 노예로 끌려다니는 곤고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독수리의 논리에 말려들면, “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중단하게 됩니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텐데 독수리를 구태여 힘들게 못 박을 필요가 어디 있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죄의 노예로 돌아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독수리와 죄의 종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독수리에게 끌려다닙니다. “독수리야, 안 돼! 나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싫어.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그 사람을 괴롭힐 수는 있지. 독수리야, 나는 결코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의 뺨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약점을 건드리고 괴롭힐 수는 있어.”

 

“죽는다”는 말의 의미

죽음에 대한 바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라는 말에는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것입니다. “좀 전에는 죽었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취급하라는 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독수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해서 육체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못하거나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독수리가 항상 있다는 사실을 알면 영적 교만에 빠질 수 없으며 한순간이라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한 물 위를 걸을 수 있지만, 우리 시선을 세상으로 돌리는 순간 물에 빠져서 독수리에게 끌려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주님께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날마다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말씀을 먹지 않으면 독수리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나를 압박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 속에서 냄새를 피우고 소리를 지르는 악한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내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의 추한 모습을 보면 내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며 불신하게 됩니다. 나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더욱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약속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진짜 복음입니다.

 

어떤 새를 기르기 원하는가?

우리는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음성과 독수리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 음성에 순종하면, 다른 하나는 거절하게 됩니다. 순종의 종이 아니면 죄의 종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두 마리의 새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상징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둘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고 키우기 원한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이를 주어야 합니다. 독수리는 굶겨야 합니다. 우리는 독수리와 비둘기에게 똑같은 먹이를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죽은 시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세상에 있는 각종 썩은 것들을 즐긴다면, 텔레비전이나 각종 책과 잡지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사상을 받아 먹는다면, 독수리는 이렇게 소리지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야! 좀 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로 나를 즐겁게 해 줘!” 독수리가 원하는 먹이를 먹여 주면 어떻게 될까요? 독수리는 점점 더 강한 힘으로 우리를 죄로 끌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힘없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여 끌려다니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무기력과 낙담과 좌절로 물들어 가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주는 먹이에 비례하여 성장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를 결코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복음을 먹으면,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독수리가 좋아하는 먹이를 마음과 생각에 가득 채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한 번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독수리가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풀어 놓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왜 이렇게 날마다 독수리에게 굴복할까? 예수를 믿고 영접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승리를 원하면 비둘기가 원하는 것들로 마음과 생애를 채워야 합니다. 승리를 원하면 승리를 주는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회개만이 독수리를 못 박아서 가두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온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는 자만이 독수리를 단단하게 못 박을 수 있습니다. 비록 독수리가 못 박히고 갖힌 채로 원하는 것을 달라고 부르짖을지라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독수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십시오. 독수리의 요구를 무시하고, 비둘기 같은 성령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렇게 하면 독수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갈 것입니다. 힘을 잃고 죽어 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애원을 추호도 동정하지 마십시오. 독수리가 죽어 갈수록 성도의 신앙은 하늘 높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고…너희 지체를…하나님께 드려라”(롬 6:12~13). 성도 여러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같은 성령을 강화시켜 나가기를 바랍니다.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드도립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를 모르면 결코 바벨론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회 안에 수많은 복음이 있지만 참된 복음만이 여러분의 삶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음만이 죄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져다줄 수 있는데, 그것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드는 복음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점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더욱더 순수한 애정과 믿음을 바치게 되고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지점까지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반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판단, 계획, 말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됩니다. 누가 우리에게 와서 “당신은 왜 이렇게 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제 영혼을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거룩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