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면 큰 오해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적당히 믿어도 구원받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죄를 버리지 않고 붙잡고 있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죄를 버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칭의를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세속과 죄를 버리지 않는 믿음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요? 죄와 유혹이 다가올 때,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가 위험을 느낄 때 어떻게 하나요? 울면서 엄마, 아빠의 눈을 바라봅니다. 우리도 그런 심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정욕과 이기심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어떤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담의 두 아들 중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고, 아벨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두 형제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왜 가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동물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곡물과 과일을 제물로 드렸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 동물의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혔다는 것은 동물이 죽었음을 뜻합니다. 동물이 왜 죽었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서 동물이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물을 희생시키는 제사제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신해서 누군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셔서 대속제물이 되실 것을 말씀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죄를 범하게 되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을 죽여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속죄 방법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동물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사실은,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가인은 동물 대신에 곡식과 열매로 제사를 드렸을까요?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 4:3~5)
가인은 동물 대신에 “땅의 소산”을 제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불순종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과 기름을 바쳤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나 대신에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분명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대속제물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벨이 드린 제물에는 어린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린양과 그 기름을 함께 드렸습니다. 제사제도에서 기름을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동물의 기름은 먹지 말라”고 했으며,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기름은 제단 위에서 태워 없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기름을 반드시 태워 없애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동물의 기름은 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어린양을 죽이고, 그 어린양의 몸에 붙어 있는 기름을 잘라내고 긁어내어 제단에서 태웠는데, 그것은 “하나님, 이 동물의 기름을 태울 때, 제 마음에 품고 있던 모든 죄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는 회개의 서약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가인도 제사를 지내야 할 필요는 느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양을 가져와서 그 피와 함께 제물을 드리는 대신에 자기의 소산, 자기 노력의 생산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제단을 쌓고 희생을 가져오는 점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지만 그는 부분적인 순종만을 드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 즉 구속주의 필요성에 대한 인정을 빼어버렸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공로를 감히 의지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가인은 불신과 반역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거의 모든 거짓 종교들이 동일한 원칙 즉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은 왜 어린양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어린양을 죽이면 반드시 어린양의 기름까지 태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죽는 일과 그 기름을 태우는 것은 반드시 함께 가야하는 제사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 받는 죄인의 마음속에서 죄가 태워져서 없어지는 경험이 이루어지길 원하셨기 때문에 그런 의식을 주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죄를 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순종의 정신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를 그대로 붙잡고 있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을 죽이고 기름을 태워 없애는 제사 대신에 “땅의 소산”을 바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제사드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제사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나”를 기쁘게 하는 예배를 드리는 정신이 가인의 정신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완전한 계획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아벨처럼 더 나은 제사를 드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린양을 죽임과 동시에 기름까지 태워 없애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죄를 용서받는 동시에 죄를 버리고 태워 없애야 합니다.
현대판 가인의 제사
오늘날에도 가인의 제사처럼 불완전한 제사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양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으려고 하지만 기름을 태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양만 죽이면 되지 기름은 태워 없애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식의 설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버리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데 그것은 가인의 제사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죄를 버리는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그렇게 드물게 된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대신 가인처럼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대신, 이 땅에서 거두어 들인 돈과 재물을 제단 위에 드리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 없이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봉사한다면, 그런 것들은 가인이 드렸던 “땅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바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드린 것입니다. 죄는 버리지 않으면서, 양심의 위로를 받고 정죄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가인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완전한 구원의 계획을 거절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 가인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죄 때문에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범한 죄 때문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가인과 아벨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아니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두 종류의 제사가 드려질 것인데, 하나는 가인의 제사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의 제사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가인의 복음을 전하고, 아벨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아벨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이 내 자신의 영적 경험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의 복음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신앙은 곧바로 무너지게 됩니다. 불순종과 죄가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영적인 예민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끌려가게 됩니다. 제3부 기사에서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