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받는 사람뿐 아니라 전하는 사람도 진지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웃는 얼굴로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시죠?”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의사가 암에 걸린 사람에게 웃으면서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암에 걸렸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설교 단상에서 너무나 가벼운 말과 유치한 농담들이 복음과 함께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을 그런 얼굴과 그런 말투로 전하면 그 말을 듣는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이 갖고 있는 심각함이 전달될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태도에 따라서 설교가 갖고 있어야 할 무게와 엄숙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좋지만, 거절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설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분위기로 전달되어야만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끔찍한 죄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진행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설교자는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와 세상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시대의 교회 형편을 올바로 보지 못하면, 이렇게 설교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런 식의 설교가 청중들의 마음속에 정말 구원의 경험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부흥과 개혁의 경험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거짓 안전감을 심어 주게 됩니다. 이 시대의 설교자는 이런 질문을 청중들에게 던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이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변화>라는 열매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과거에 사랑하던 죄가 떨어져 나갔습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죄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습니까? 죄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용솟음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충성이 날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옵니까?”
사람의 입맛을 맞추는 설교
지금 기독교회는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왜 기독교회의 설교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지 않고 교인들의 입맛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만” 듣기 원하는 교인들 때문에 설교의 엄숙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에서 기도주일에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면, 많은 경우에 교회를 오래 다닌 교인들로부터 이런 항의를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를 결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왜 그런 반응을 하게 될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자기 나름대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1~22)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독하고 공부하지만, 구원의 경험에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지식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양심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지식 중 어떤 것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애에 실제적인 부흥과 개혁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보십시오. <자기 향상에 도움을 주는 정보>, <영성을 위한 다섯 가지 방법>, <신실해지는 여섯 가지 단계>, <넘어지지 않는 열 가지 전략>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찾는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향해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쉽고 편리한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만, 진리는 그렇게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설교를 보면 여러분의 마음과 신앙 상태가 어떠한지가 보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감사와 충성의 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순종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설교를 찾아서 들어야 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현대 기독교회에서는 설교를 듣는 청중의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순절 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7~38).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는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적인 속성을 정확하게 집어 주는 설교를 들어 보셨나요? 매 주말마다 선포되는 수많은 설교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정확하게 가르치는 설교가 얼마나 될까요? 예수께서 곧 재림하신다는 말씀의 선포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심각한 상황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우리 교회는 부흥하지 못할까? 왜 교인들이 이렇게 세속적이고 회개하지 않을까?”라고 의아해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진짜 하나님과 진짜 복음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기독교회는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와 세속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상한 복음을 설교하는 한 교회에 참된 부흥과 개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세속을 포기하도록 초청하는 강력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호소하는 말씀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이 끌어당기는 힘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워가 말씀을 통해서 나가야 합니다. 설교에 예리한 말씀의 날이 서 있지 않으면 부흥과 개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지 못하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까?
몇 해 전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한번은 나이가 많은 은퇴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오래전에는 집회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은퇴 목사님은 진지한 눈으로 내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우리가 집회할 때는 성령께서 내려와서 영혼들을 직접 구원하셨다네.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었지. 그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집회는 없었다네. 우리는 한번 집회를 하면 적어도 2주나 3주 동안 설교를 하고 말씀을 가르쳤다네. 요즘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설교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네. 우리는 하나님의 영께서 죄인들의 마음을 깨뜨리시고 역사하실 때까지 성경 말씀을 읽어 주고 호소했다네. 집회에서 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은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을 부서뜨리실 때까지 쟁기질하고 쟁기질하고 또 쟁기질 하는 것이네.’
그때 나는 정말 알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성령께서 집회에 임재하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은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인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네. 주여, 나같이 악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새 신자를 교인으로 만들 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선생님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접 기도는 선생님을 천국문으로 데려다 줍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도 축복 받고 내세에는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 신자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종교적인 가면을 쓰고 위선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녀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참된 복음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의 눈에는 온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성도의 삶이 극단적이고 율법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점점 더 좁은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성령과 싸우는 설교
두려운 사실은, 설교자가 복음과 죄를 피상적이고 얄팍하게 다룰 때 그는 성령과 대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속에서 세 가지 면을 다루시고 역사하십니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께서는 죄인의 양심 속에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설교자는 죄를 가벼운 것으로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께서는 마음속에서 죄를 심각하게 다루시는데, 설교자는 죄를 붙잡고 있어도 구원받는 것처럼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설교자는 성령과 싸우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보여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야 하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데, 설교자는 신자들의 죄를 덮어 주고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런 설교는 성령과 대적하는 설교입니다. 설교자들이시여, 설교를 통해서 성령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오래전에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설교와 예배에 대해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 예배가 지루하고 축 늘어졌다.
- 양심의 가책을 주는 설교는 싫다. 교회에 가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싶지 않다.
- 설교가 너무 지루하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 교회가 냉정하고 불친절하다.
- 교회 가는 것이 마치 죄를 발견하러 가는 느낌이다.
- 심판과 형벌 대신에 축복과 긍정의 메시지를 듣고 싶다.
설문 조사에 따라서 교회 제직 회의는 교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설교와 예배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목회자를 교체했습니다. 새 목회자가 온 이후 설교와 예배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요? 설교는 짧아졌고 설교에서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이 빠지게 되었으며 양심의 가책을 주는 말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깊이 있는 말씀은 사라져 버렸고, 시사와 농담과 철학적 사상으로 설교가 채워졌습니다. 찬양과 음악은 동네 노래방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만족했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소수의 교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는 부흥과 개혁이 일어날 수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설문 조사를 성경 말씀보다 높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인기 있는 설교자일수록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이끄는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영생으로 가는 길보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피곤하게 살다가 교회에 나온 신자들의 죄를 지적하거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께서는 결코 그런 설교자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과 설교자의 사역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사역을 존중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도 그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는 것이 성령의 주요 사역인데, 목회자가 사랑만 강조하고 죄를 책망하지 않으면 그런 목회자는 성령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에서 신자들의 죄와 세속을 다루어야 합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설교자는 교인들의 죄와 세속에 대해서 침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보다 사람의 인정을 귀하게 여기는 목사는 신자들의 죄된 삶을 덮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설교에는 죄인을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를 가벼운 것으로 설교하는 지도자에 대한 예레미야의 경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6:14~15)
환자를 죽이는 의사가 될 수 있다
죄를 가벼운 것으로 설교하면, 그것은 청중을 속이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환자가 암에 걸린 사실을 숨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갈 것을 두려워해서 환자가 지켜야 할 건강 원칙을 숨기고 환자가 듣기 원하는 말만 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환자는 죽을 것입니다. 그런 의사는 히포크라데스 선서를 부인한 채 환자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요한 웨슬리 시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현대인들은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휘트필드나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교회 문화와도 많이 다릅니다. 요즘 사람들의 마음은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여유가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밖에 모릅니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듣기 싫은 설교를 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진리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틴 루터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역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영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쫓겨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유대 교회는 그분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진리가 있는 그대로 제시될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진리가 정직하게 제시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나운 짐승처럼 복음에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오직 소수의 성도들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굴복시키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거룩함보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꺽고 진리 앞에 납작하게 엎드리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구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목사의 설교에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자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설교 속에서 죄와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제거하게 됩니다. 그런 목회자는 성령 없이 설교하고, 성령 없이 사역하기 때문에 영혼의 곤고함 속에서 무기력한 목회를 하게 됩니다.
설교자가 교인들의 세속과 죄에 대해서 입을 다물면, 교인들은 자신이 무슨 문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나가 죄를 용서받고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이 부드러운 설교로 죄를 덮어 주고 구원을 보장해 주는 목사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하게 됩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대신에 죄를 덮어 주는 목사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죄와 타락 앞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게 됩니다. 현대 기독교회의 설교에서 죄에 대한 책망이 사라져 버리자, 기독교회에서 부흥과 개혁이 사라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