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남겨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의’와 ‘복음’이 기독교회 안에 떠돌아 다니고 있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중생에 대한 경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가르침과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지만,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은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초월해서 오직 하나입니다. 구원의 경험은 오직 하나입니다. 구원의 경험은 설교자에 의해서 달라질 수 없으며 인위적으로 조작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중생의 경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천한 막달라 마리아가 회개와 중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로 연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듭남의 경험은 신분과 학식과 교파를 초월해서 한 경험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지금 어떤 교파에 있든지 간에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능력과 십자가의 은혜로 참된 회개와 거듭남을 경험했다면, 죄와 세속을 미워하게 될 것이며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미워하던 자를 용서할 것이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더 밝은 빛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그 빛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교파와 교회가 정해 놓은 틀에서 해방되어 계속해서 빛을 향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잠 13:9)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정결한 생애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 필요한 이유

놀라운 사실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위대한 능력이 죄인의 심령 속에 역사해야만 회개와 중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와 달과 물고기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의와 거룩함을 사모하는 새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구원의 경험을 주실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환자에게 의사가 심장 수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넣어 주는 성령의 수술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러나 털이 깎여지는 양처럼, 제단 위에 제물로 누운 이삭처럼,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역사에 자신을 맡기고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는 중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될 수 있으며 영적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새 생명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진리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증거해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듭남의 경험 없이 말씀에 대한 지식을 높이 쌓아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 교만의 늪에 빠지고 위선과 형식의 가면을 쓴 신앙인이 됩니다.

 

중생의 경험과 설교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에 대한 가르침이 흔들리면 사탄의 미혹과 공격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목사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성령께서 하시는 중생의 역사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회개와 성령의 재창조에 대해서 수많은 설교를 했었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설명했었기 때문에 내 말은 설득력이 없었으며 막연하고 추상적이었습니다. 내 설교 속에 구원에 대한 화려한 수사와 표현들이 가득 있었지만, 설교를 통해서 죄인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회개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성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진리와 성령에게 굴복하고 새 생명을 받았을 때까지 교인들에게 분명한 생명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선지자로서 기별을 선포해야 합니다. 선지자로서 기별을 선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 안에 가득 쌓여 있는 메마른 뼈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의 심령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것은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단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쳐야 합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4).

교회 속에 마른 뼈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5).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을 살리려면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거듭남에 대한 말씀이 정확하게 세워져야만 성령께서 진리를 통해서 마른 뼈들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회개와 중생에 대한 진리를 찾아야 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서 그것을 붙잡는 성도들은 현대 기독교회 속에 불고 있는 이상한 교리의 바람에 휩쓸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중세기의 구원과 현대 기독교회의 구원

중세기 종교 암흑기 동안 유럽의 모든 사람들은 ‘카톨릭’이라는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날 때 받은 유아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언약 속으로 들어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악마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대로 바꾸고 무시하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신부와 사제에게 세례 받고 죄를 고백하면 그것이 카톨릭교회에 속한 증거이며 중생이고 구원인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중세기에 거듭남의 교리는 교회 성직자들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런 암흑 속에 있을 때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중생에 대한 가르침은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크게 회복되었고 강조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죄와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회심의 열매와 중생의 증거가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살피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과 택하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8,9,13,14)

안타깝고 슬픈 사실은, 현대 기독교회는 요한 웨슬리가 전파한 복음으로부터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세운 감리교회 속에서도 더 이상 웨슬리가 강조한 거듭남과 거룩한 생애에 대한 가르침을 듣기 어렵습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중생과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고 영접 기도를 드렸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여러분은 중생하였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런 설교가 성서적일까요? 아닙니다. 성서적 설교는 이렇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재창조의 역사에 대한 증거와 열매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참된 회개와 중생의 열매가 없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유아 세례”가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유아 세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대 기독교회는 자신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죄인의 기도”입니다. 중세기에는 유아 세례만 받으면 구원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에서는 “죄인의 기도”를 통해서 구원을 확정시키고 있습니다. “유아 세례”가 중세기의 금송아지였다면, 오늘날의 금송아지는 “죄인의 기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죄인의 기도”라고 불리는 기도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죄인의 기도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죄인의 기도”가 갖고 있는 문제는 회개와 거듭난 성도에게 맺히는 “열매”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에게 회개의 열매가 없고 거듭남의 증거가 없어도 목사가 가르쳐 주는 “죄인의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계 3:19), 현대 기독교회는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들은 손 드십시오! 손을 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께서 들어가실 것입니다. 손을 들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구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구원과 거듭남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은 복음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죄인들을 초청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진심으로 예수께 기도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해 줍니다. 그러면 교인은 성직자의 말을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신자들은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기도를 진심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자신 있게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취급당합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 속에서는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구원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일까요? 아니면 사탄이 주는 착각과 미혹일까요?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어떻게 해야 그들을 구원의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확신이 아니라 열매가 필요하다!

문제는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확신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깊은 기만으로 끌고 갑니다. 현대 설교자들은 사도 바울의 경고를 들어 보아야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도 여러분, 구원의 확신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의 영혼은 평안을 누리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말과 표정과 태도를 통해서 신앙과 확신이 스며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회는 구원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주려고 합니다. 많은 목회자가 새로 교회 나온 새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려고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선생님,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기 어려우면, 제가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할테니 제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선생님의 마음을 표현한다고 생각되면 제 손을 꼭 잡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세요.” 성도 여러분, 단 한 번의 결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진지한 고백과 결심을 근거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믿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음과 같은 구원의 경험을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으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죄를 미워하는 정신을 주셨습니다. 가끔 유혹에 쓰러지는 일이 생기지만, 그때마다 나는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가 회개하고 죄를 버립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내 마음속에 감사와 충성을 새겨 주었습니다. 나는 위선과 형식을 버렸으며 온 마음을 다해서 구원의 언약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현대 설교자들은 믿음이 흔들려 있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이렇게 심어 줍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인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과거에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다짐했던 기도를 회상해야 합니다. 그때 드린 기도가 진지한 고백이었다면, 여러분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성도 여러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거짓 확신을 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오늘날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보장받을까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만 읽지 말고 요한복음 3장 마지막 절도 읽어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사도 요한의 경고입니다. 물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위대한 진리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고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는 반드시 우리를 거듭남의 경험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남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진지했는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맺혀지는 열매로서 판단되어야 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성도 여러분, 눈을 떠서 지금 기독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신부에게 유아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구원을 확신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목회자의 선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국 기독교회에 그렇게 많은 숫자의 그리스도인이 거듭나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이렇게 타락할 수 없습니다. 정말 대부분의 교인이 회개하고 중생했다면,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조롱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이렇게까지 바닥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이 문제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놓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목회를 통해서 참된 거듭남의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지 못한 목회자의 어깨 위에 멸망당하는 수많은 교인의 피가 뿌려지게 될 것입니다. 참된 회개와 중생의 말씀이 설교단상에서 회복되고 세워지지 않는 한 기독교회 안에서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