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일곱 번째 돌, “노력과 훈련을 무시하는 정신”

사도 바울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을 경고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는 마지막 시대 교회에 무슨 문제가 생기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 디모데전서 4장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경고입니까? 사도 요한 역시 동일한 경고를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게 주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귀신의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마지막 시대 교회에 대한 경고가 우리 마음속에 분명하게 각인되어야만 디모데전서 4장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됩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마지막 시대 교인들의 양심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나타나게 되는 두 가지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양심이 화인맞는 것”과 “외식으로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시대에는 미혹케 하는 영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귀신의 가르침을 전할 것인데,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양심이 마비될 것이고 위선과 자기기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일어나게 될까요? 마지막 시대에 다음과 같은 복음과 가르침이 기독교회를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범하는 삶을 살아도 구원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열매가 없어도 구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이런 복음과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양심은 마비되고 짐승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해도 두렵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며,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전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거짓 목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도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해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속은 시커먼 암흑 속에 있는데 겉은 구원을 찬양하는 외식을 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거짓 은사와 이적으로 미혹함으로써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뜨립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를 받아들인 교인들의 양심이 마비되고 위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doctrine, 교리)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6)

바울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미혹하는 영들이 온갖 거짓 복음을 교회 안에 들여와서 교인들의 양심을 파괴하고 신앙을 무너뜨릴 때, 교인들을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교리)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는 참된 믿음과 성서적 교리로 성도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에는 날이 분명하게 서 있는 말씀으로 교인들의 이기심과 교만을 무너뜨리고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종들이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종입니다. 이 시대에는 참된 복음과 정확한 교리로 성도들에게 중생의 경험을 가르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종들만이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로는 거짓 복음에 붙잡힌 사람을 진리로 양육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령께서 사람의 고집과 이기심을 꺾고 순종으로 인도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해결책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딤전 4:7)

사도 바울은 미혹하는 영들이 퍼트리고 있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 같은 말씀을 버리라고 호소합니다. 오늘날 서점에 나와 있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는 심리학”이나 “교회를 성장시키는 다섯 가지 비결” 같은 이론들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입니다. 인간의 수단에 매달릴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의 한구석에 있는 말씀을 마치 가장 중요한 진리처럼 떠받드는 태도, 성경 전체의 흐름을 무시하는 성경 해석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넓을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가르침들, 이런 것들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직 유치한 수준의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이 “교회 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일수록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관심을 나타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바울은 오직 “경건에 이르는 연습”에 집중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까? 정말 부흥과 개혁을 갈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훈련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당하지 않으려고 경건을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에 연습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생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 3:2).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기록된 사람들,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새겨진 사람들은 “뭇사람”을 위해서 경건의 연습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연습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물론,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다가 율법적 신앙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을 강조하고 깊이 파고 들어가다가 자기 의에 빠져서 영적 교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될까요? 자신을 위해서 경건을 연습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쌓아서 구원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경건을 연습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경건의 연습에 매진하면 바리새인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거룩함을 버린 현대 기독교회는 “빗나간 경건의 연습”을 지적하면서 훈련과 노력을 율법적 신앙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하는 연습하다가 부상을 입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한 연습을 통해서 강인한 체력을 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온 마음과 생애로 붙잡고 있는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투쟁을 깊이 이해한 성도일수록 경건에 이르는 훈련과 연습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악하고 교활한 존재와 싸우고 있습니다! 사탄은 매우 치밀한 전략을 세워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전쟁은 믿기만 하면 저절로 승리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연습하십시오. 날마다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는 훈련을 하십시오. 창세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해서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법을 연습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언제 잠을 자고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정하고 연습하십시오. 과식을 피하고 자극적인 식품을 삼가하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생에서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놀라운 사역을 했던 사람들은 대개 노력과 훈련으로 다져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생애를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어떤 노력을 했으며 무슨 수고를 했는가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택하셔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경건을 위해서 노력하고 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 쾌락을 포기하고 희생해야만 가능한 훈련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면 희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서 죽음도 불사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면 가난해지기도 하고 외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현대 기독교회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우리의 영생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베드로는 나그네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했습니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경건한 삶을 산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은 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게 될까요? 왜냐하면 나그네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가는 나그네는 이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경건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가 마쳐지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사람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경건의 연습을 하면서 나그네로 살았던 성도들은 온 우주에서 높임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말뚝을 깊이 박고 경건의 연습을 무시한 채 살았던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에 끌려다니다가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딤전 4:10)

그리스도인이 온 마음을 다해서 “수고하고 진력하는” 이유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망한 이 세상을 위해서 인생이 소모되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우리가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힘과 근육이 있을 때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영혼 구원에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합니다. 영화나 유행가나 패션 같은 것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힘과 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늘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1,15)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고 빨아들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과 생애로 빨아들이십시오. 불로 연단된 믿음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진정으로 얻기 원하는 사람은 경건의 연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명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 생각 없이 복음을 전달하는 배달꾼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누구보다도 깊이 회개하고 경건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에 사로잡혀서 복음을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육적인 교인들의 콧물을 닦아 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공부방에 들어가서 말씀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 속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진지하게 듣게 될 것입니다. 목사는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신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바르게 선포함으로써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을 흔들고 굴복시킬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마음과 생애를 집중할 수 있도록 짐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바로잡고 꾸짖고 경고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알려 주시고 죄를 책망해 주십시오.”

 

맺는 말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되돌아보고 확인했던 것이 언제입니까?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지 살펴본 것이 언제입니까? 참된 개심과 중생의 경험을 연구하고 사람들과 토론할 때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까? 최고의 경건에 도달했던 사람도 믿음에서 떠나 죄의 길을 걸어가면, 그 사람의 신앙과 생애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한 번 구원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종으로 끌려다니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 바울도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 중 누구도 하늘 진주 문을 들어갈 때까지 “나는 구원받았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상하는 성도마다 예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부흥과 개혁의 길을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

 

6부,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여섯 번째 돌, “구별되지 않으려는 태도”

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급격하게 사라진 말씀은 “거룩함”에대한 강조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의 공백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현대 기독교회는 거룩함에 대한 말씀을 미워합니다. 물론, “거룩함”에 대한 설교를 이렇게 하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함”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규정하기 시작하면 교회에서 용의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성경은 거룩함을 구원과 연결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거룩함을 설교하면 “행위 신앙, 율법적 신앙”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거룩함을 오해하고 잘못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을 행위 신앙과 율법적 신앙으로 이끌어 가지만, 거룩함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시작됩니다. 거룩함은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와 중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령께서 어떤 사람을 개심시키고 거듭남의 경험 속으로 인도하시면, 영적 경험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새롭게 거듭난 영혼에게 계속해서 더 밝은 빛을 주시고 더 깊은 경험으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은 한번 시작한 일을 끝마치실 때까지 하늘의 역사를 멈추지 않습니다.

“너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하나님을 믿지만 거룩함이 없는 이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거룩함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성령께서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역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성령께서 마음과 생애 속에 역사하지 못하게 될까요?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서 “이 길이 정로니 이리로 가라”고 해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께서 더 밝은 빛으로 인도하셔도 빛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무시하고 성령의 호소를 거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왜 빛을 거절하게 될까요? 사도 요한은 그들이 빛과 조화될 수 없는 악인의 마음과 행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21).

마음을 지배하면 몸을 지배하게 된다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마음은 피나 근육이 아니지만 그것은 몸과 분리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면 몸까지 지배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몸”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바울은 왜 몸을 바치라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몸도 바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친 성도가 몸을 바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아니라 몸까지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을 바친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고 찾는 것입니다. 왜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까요?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것을 우리 몸과 생애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청교도 신앙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고, 어떤 것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혀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고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던 것이 청교도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신앙이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신앙이라고 믿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는 절제가 포함된다

물론, 거룩함은 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거룩함은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거룩함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회는 “성령은 내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외적인 표현과 행함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해도 그리스도인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상과 구별되는 “절제의 선”이 그어져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정욕과 욕심을 못 박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절제”라는 열매가 맺혀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성령의 열매는 따로따로 맺어지는 열매들이 아닙니다. 하나의 오렌지 안에 여러 개의 알갱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도 사랑부터 절제까지 모든 것이 섞여서 균형을 이룬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자비와 온유는 있는데 절제에는 관심이 없다면,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참된 절제란 “해로운 모든 것을 제거하고, 유익한 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를 강력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용하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명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절제와 승리

절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상은 분명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올림픽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선수들은 엄격한 절제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 올림픽에서 사탄과 투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에” 절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올림픽에서 승리하기 원하는 선수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절제와 훈련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100미터 달리기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서 온 생애를 바칩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승리하는 생애를 위해서 깊은 헌신과 집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은 유럽에서 최고이며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 중의 한 사람인 나이 많은 연주자가 자신의 마지막 연주회를 했습니다. 연주를 마치자 깊은 감동을 받은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처럼 훌륭한 연주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이 많은 연주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은이여, 지금의 연주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네. 지금의 나처럼 연주하기 위해서 나는 생애 전체를 바쳤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정말 경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정말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삶 속에 세상과 구별되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각종 집회에 가서 찬양하고 목이 쉬도록 통성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조용한 광야를 찾아가십시오. 광야에 홀로 있으면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일주일 동안 금식하면서 말씀을 살펴보고 명상하면서 오직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속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핸드폰과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속에는 세상과 분리되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5부,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다섯 번째 돌, “가라지 중심의 목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갖고 계시는데, 그 교회는 정확한 진리로 인도되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성서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위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을 바치신 교회는 아름답고 흠이 없는 교회인데 성경은 교회를 어린양 예수와 결혼하게 될 “신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로다 하더라”(계 19:7~8)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순결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자라게 된 것입니다. 알곡만 있어야 할 교회 안에 가라지가 무성하게 자라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교회 안에서 자라는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사탄이 가라지를 뿌린 이유

하나님의 교회는 순결한데 어떻게 가라지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다고 하셨습니다. 밭에 가라지를 뿌린 것은 사탄입니다. 왜 사탄은 교회 안에 가라지를 뿌렸을까요? 왜냐하면 교회에서 알곡들이 자라서 열매 맺으면 복음이 능력 있게 전파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뿌려서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교회로 만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라지가 무성하게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혼돈합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이기적이고 세속적인가?”라고 말하면서 가슴을 치고 한탄합니다. 교회 안에 알곡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가라지들만 잔뜩 올라오는 것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실망하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밭에 가라지를 뿌린 이유는 교회를 가라지로 뒤덮어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가라지는 빠르게 번식합니다. 별다른 영양을 공급하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가라지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알곡이 있으며, 결국 알곡만 구원받게 됩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수많은 가라지가 있지만, 오직 알곡들만 구원받게 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a remnant shall be saved)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롬 9:27~28). 교회 안에 믿는 사람이 바다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오직 알곡들만 구원받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남은 무리입니다.

 

알곡을 위한 교회인가? 가라지를 위한 교회인가?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에 가라지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이 교회 밖만큼 죄가 많습니다. 교회 안이 교회 밖만큼 세속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교회 안이 교회 밖만큼 포르노와 음란물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창녀처럼 음란하지만,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어차피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서로 연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세상 끝까지 함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에 알곡만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알곡이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인간의 눈으로 가라지를 구별해서 함부로 뽑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7).

우리는 교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는 당연히 알곡과 가라지가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교회 안에 가라지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라지들이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죄와 배도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교회 속에 가라지가 뿌려졌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교회는 쓰러질 것처럼 보이고 연약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 구원받는 교회는 알곡이며 남은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 가라지가 많을지라도 심판의 때가 되면 가라지가 거두어져서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알곡을 키우기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알곡을 보호하고 알곡이 성장할 수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알곡의 믿음을 향상시키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목회자가 가라지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가라지가 좋아하는 설교를 해 주고, 가라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가라지가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라지가 좋아할 만한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목회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가라지들이 활개를 치게 되고 알곡들은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가라지가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데, 알곡들이 교회에 대한 깊은 실망을 품고 떠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께서는 교회 안의 양과 염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염소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는 양들을 괴롭히고 놀리는 시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실망하는 것은 교회 안의 양들 때문이 아니라 염소들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가라지와 염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놀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라지와 염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마음에 말씀과 충성이 새겨진 성도

하나님의 교회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는 성도들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기록되는 경험을 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교회입니다. 성령께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충성을 새겨 놓으시는데 그것이 거듭남의 경험입니다.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충성이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교파도 아닙니다. 아무리 큰 건물을 갖고 있고 멋진 잔디밭과 아름다운 시설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새겨진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에게 유아 세례를 받는다고 하나님의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로부터 “당신은 구원받았다.”는 선언을 듣는다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집사와 장로로 안수받았다고 할지라도 심령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순종의 정신이 마음에 새겨지는 경험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교회에 속한 교인일지 모르지만, 하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의 신부는 아닙니다.

 

한마음으로 한길을 걷는 교회

“하나님의 교회에는 죄와 가라지가 가득 차 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부인 하나님의 교회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마음과 한 도(way, 길)를 주어”(렘 32:38)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단 한 번도 분열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신부는 언제나 “한마음으로 한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신부가 걷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장로교인이든지 침례교인이든지 성공회 교인이든지를 불문하고 성령에 의해서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새겨진 성도들을 만나면,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런 성도들은 말씀을 통해서 “한마음과 한길”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서로가 갖고 있는 빛의 종류와 밝기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말씀을 살펴봄으로써, 진리 안에서 하나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핍박이 올 때 서로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는 관계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한마음과 한길”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과 거룩함으로 가는 길”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교파에 속해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께서 인도하시는 “양”과 “알곡”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게 될 것이고 진리를 통해서 거룩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룩함은 진리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경험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어떤 교단에 속해 있든지 간에 진리를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진리를 통해서 거룩함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각 교파에 있는 알곡과 양들을 불러내서 “한마음과 한길”로 인도하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지금 기독교회의 상태는 하나님의 양들 가운데 수많은 염소가  들어와서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심어 놓으신 알곡들 사이에 사탄이 수많은 가라지를 뿌려서 함께 자라고 있는 것이 지금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목회자가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정확한 복음을 나눠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염소와 가라지가 마음대로 교회를 휘저으면서 돌아다니게 됩니다. 염소들과 가라지들이 교회 안으로 온갖 죄를 가지고 들어와서 양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목회자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 어떻게 될까요? 알곡과 양들이 말할 수 없는 실망을 가슴에 품고 다른 교회를 찾아가게 됩니다. 가라지와 염소를 지키기 위해서 알곡과 양들이 진리를 찾아서 떠나게 만드는 목사들은 장차 알곡과 양을 보호하고 지키지 않은 죄에 대해서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양을 지키는 목자가 있고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삯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요 10:12~13). 참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만, 삯꾼에게는 진리를 전하고 양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서는 용기와 믿음이 없습니다.

 

쉽게 끌어들이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면 사람들이 떠나게 되므로, 우선 교인 숫자를 늘려 놓은 다음에 진리를 전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가 영혼들에게 “값싼 은혜와 쉬운 구원”을 나눠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영혼들에게 30분 정도 성경 말씀을 재미있게 전한 다음 그물을 끌어올립니다. 그물에 잡힌 사람은  5분간의 상담을 받은 후에 “나는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라고 적힌 카드를 제출하면  목사는 그 사람에게 “구원받았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영혼들을 거두어들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세월이 흘러가면서 “왜 이 사람들이 성장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할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해마다 많은 사람이 세례(침례)를 받고 있는데 교회가 성장하지 못할까? 왜 교회에 입교한 신자들이 교회의 뒷문과 옆문으로 빠져나갈까?” 현대 기독교회는 소그룹과 제자 훈련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소그룹을 운영하고 신자들이 교회에 정착할 수 있는 여러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소그룹과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신자들을 교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중생에 대한 가르침을 정확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참된 회개와 거듭남을 경험해야만 소그룹과 제자 훈련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의해서 거듭난 영혼은 소그룹이 없고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부족해도 스스로 말씀을 붙잡고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온갖 핍박과 시험이 있어도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가라지를 알곡으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하면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지만, 알곡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에게 알곡처럼 살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알곡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의 심령 속에 회개의 정신을 불어넣는 생명의 말씀이 있어야만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돈과 세상을 사랑하는 염소의 마음 깊은 곳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만 양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곧바른 기별이 선포되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나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거짓말과 탐욕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교회 들어올 때 거짓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될 때 당황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한 번도 구원의 경험이 무엇인지 들어 볼 기회도 얻지 못하고, 알곡과 양으로 변화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과 진리가 선포될 때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가라지 중심의 목회가 가져온 재앙 

진리가 정확하게 선포되면 염소와 가라지가 교회를 떠나기 때문에 말씀을 정직하게 선포하지 않는 목회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한 목소리로 선포하는 목자는 매우 적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가라지와 염소가 득세하게 되었고 알곡과 양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진리로 운영되지 않고 다수결로 운영되기 때문에 압도적인 숫자의 염소와 가라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회가 가고 있으며, 그들이 원하는 타협적 원칙과 달콤한 설교가 교회 속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가라지와 염소가 교회를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알곡들이 힘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의 알곡들은 지금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세요! 우리에게 진리의 양식을 먹여 주세요!” 교회 안에서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양들의 외침을 무시하는 목사들, 알곡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 설교자들, 알곡과 양들이 잘 성장할 수 있는 영적 환경을 조성하지 않는 성직자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엄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성령께서 눈에 안약을 발라 주셔서 지금 현대 기독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낚시점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데 미끼를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낚시점 주인이 이렇게 묻습니다. “어떤 물고기를 잡기 원하십니까?” 주인이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고기마다 좋아하는 미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알곡이 좋아하는 말씀이 있고, 가라지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양이 좋아하는 복음이 있고 염소가 좋아하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들의 숫자는 적고 염소는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알곡은 너무나 적은데 가라지는 어디를 가든지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성장시키기 원하는 목회자들은 염소와 가라지에 초점을 맞춘 말씀의 그물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은 마침내 본인 자신도 참된 복음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양과 알곡에게 나누어 줄 양식이 자신에게도 없음을 발견하고 심령이 공허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값싼 은혜”라는 그물을 던져서 많은 물고기를 쉽게 잡아 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잡은 물고기는 참된 구원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빈 깡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는지 배우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허전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씀을 사모하는 신자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서 고통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 나타나는 말씀의 기근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만일 사랑하는 아내가 길거리에서 여러 명의 악인에게 모욕을 당하고 조롱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하면서 지나가겠습니까? 아내를 사랑한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그리스도의 신부가 교회 안에서 가라지와 염소들에 둘러 싸여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양과 알곡이 풍성하게 자라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할 사명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자 여러분,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라가는 데에는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과 친구와 재산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인기와 평판을 잃어버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교단과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희생을 받아들여야만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있으며 알곡이 양분을 먹고 성장하는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4부,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네 번째 돌, “거듭남에 대한 무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남겨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의’와 ‘복음’이 기독교회 안에 떠돌아 다니고 있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중생에 대한 경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가르침과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지만,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은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초월해서 오직 하나입니다. 구원의 경험은 오직 하나입니다. 구원의 경험은 설교자에 의해서 달라질 수 없으며 인위적으로 조작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와 중생의 경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천한 막달라 마리아가 회개와 중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로 연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듭남의 경험은 신분과 학식과 교파를 초월해서 한 경험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지금 어떤 교파에 있든지 간에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능력과 십자가의 은혜로 참된 회개와 거듭남을 경험했다면, 죄와 세속을 미워하게 될 것이며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미워하던 자를 용서할 것이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더 밝은 빛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그 빛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교파와 교회가 정해 놓은 틀에서 해방되어 계속해서 빛을 향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잠 13:9)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정결한 생애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 필요한 이유

놀라운 사실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위대한 능력이 죄인의 심령 속에 역사해야만 회개와 중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와 달과 물고기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의와 거룩함을 사모하는 새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구원의 경험을 주실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환자에게 의사가 심장 수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넣어 주는 성령의 수술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러나 털이 깎여지는 양처럼, 제단 위에 제물로 누운 이삭처럼,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역사에 자신을 맡기고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는 중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될 수 있으며 영적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새 생명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진리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증거해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듭남의 경험 없이 말씀에 대한 지식을 높이 쌓아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 교만의 늪에 빠지고 위선과 형식의 가면을 쓴 신앙인이 됩니다.

 

중생의 경험과 설교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에 대한 가르침이 흔들리면 사탄의 미혹과 공격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목사가 된 후에도 오랫동안 성령께서 하시는 중생의 역사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회개와 성령의 재창조에 대해서 수많은 설교를 했었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설명했었기 때문에 내 말은 설득력이 없었으며 막연하고 추상적이었습니다. 내 설교 속에 구원에 대한 화려한 수사와 표현들이 가득 있었지만, 설교를 통해서 죄인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회개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성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진리와 성령에게 굴복하고 새 생명을 받았을 때까지 교인들에게 분명한 생명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선지자로서 기별을 선포해야 합니다. 선지자로서 기별을 선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 안에 가득 쌓여 있는 메마른 뼈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의 심령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것은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단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쳐야 합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4).

교회 속에 마른 뼈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5).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을 살리려면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거듭남에 대한 말씀이 정확하게 세워져야만 성령께서 진리를 통해서 마른 뼈들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회개와 중생에 대한 진리를 찾아야 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서 그것을 붙잡는 성도들은 현대 기독교회 속에 불고 있는 이상한 교리의 바람에 휩쓸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중세기의 구원과 현대 기독교회의 구원

중세기 종교 암흑기 동안 유럽의 모든 사람들은 ‘카톨릭’이라는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날 때 받은 유아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언약 속으로 들어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악마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대로 바꾸고 무시하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신부와 사제에게 세례 받고 죄를 고백하면 그것이 카톨릭교회에 속한 증거이며 중생이고 구원인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중세기에 거듭남의 교리는 교회 성직자들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교회가 그런 암흑 속에 있을 때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중생에 대한 가르침은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크게 회복되었고 강조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죄와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회심의 열매와 중생의 증거가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살피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과 택하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8,9,13,14)

안타깝고 슬픈 사실은, 현대 기독교회는 요한 웨슬리가 전파한 복음으로부터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세운 감리교회 속에서도 더 이상 웨슬리가 강조한 거듭남과 거룩한 생애에 대한 가르침을 듣기 어렵습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중생과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고 영접 기도를 드렸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여러분은 중생하였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런 설교가 성서적일까요? 아닙니다. 성서적 설교는 이렇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재창조의 역사에 대한 증거와 열매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참된 회개와 중생의 열매가 없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유아 세례”가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유아 세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대 기독교회는 자신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죄인의 기도”입니다. 중세기에는 유아 세례만 받으면 구원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에서는 “죄인의 기도”를 통해서 구원을 확정시키고 있습니다. “유아 세례”가 중세기의 금송아지였다면, 오늘날의 금송아지는 “죄인의 기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죄인의 기도”라고 불리는 기도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죄인의 기도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죄인의 기도”가 갖고 있는 문제는 회개와 거듭난 성도에게 맺히는 “열매”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에게 회개의 열매가 없고 거듭남의 증거가 없어도 목사가 가르쳐 주는 “죄인의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계 3:19), 현대 기독교회는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들은 손 드십시오! 손을 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께서 들어가실 것입니다. 손을 들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구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구원과 거듭남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은 복음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죄인들을 초청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진심으로 예수께 기도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해 줍니다. 그러면 교인은 성직자의 말을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신자들은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기도를 진심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자신 있게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취급당합니다. 그런데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 속에서는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구원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일까요? 아니면 사탄이 주는 착각과 미혹일까요?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어떻게 해야 그들을 구원의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확신이 아니라 열매가 필요하다!

문제는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확신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깊은 기만으로 끌고 갑니다. 현대 설교자들은 사도 바울의 경고를 들어 보아야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도 여러분, 구원의 확신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의 영혼은 평안을 누리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말과 표정과 태도를 통해서 신앙과 확신이 스며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회는 구원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주려고 합니다. 많은 목회자가 새로 교회 나온 새 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려고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선생님,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기 어려우면, 제가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할테니 제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선생님의 마음을 표현한다고 생각되면 제 손을 꼭 잡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세요.” 성도 여러분, 단 한 번의 결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진지한 고백과 결심을 근거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믿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음과 같은 구원의 경험을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으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죄를 미워하는 정신을 주셨습니다. 가끔 유혹에 쓰러지는 일이 생기지만, 그때마다 나는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가 회개하고 죄를 버립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내 마음속에 감사와 충성을 새겨 주었습니다. 나는 위선과 형식을 버렸으며 온 마음을 다해서 구원의 언약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현대 설교자들은 믿음이 흔들려 있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이렇게 심어 줍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인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과거에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다짐했던 기도를 회상해야 합니다. 그때 드린 기도가 진지한 고백이었다면, 여러분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성도 여러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거짓 확신을 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오늘날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보장받을까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만 읽지 말고 요한복음 3장 마지막 절도 읽어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사도 요한의 경고입니다. 물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위대한 진리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고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는 반드시 우리를 거듭남의 경험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남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진지했는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맺혀지는 열매로서 판단되어야 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성도 여러분, 눈을 떠서 지금 기독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신부에게 유아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구원을 확신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목회자의 선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국 기독교회에 그렇게 많은 숫자의 그리스도인이 거듭나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이렇게 타락할 수 없습니다. 정말 대부분의 교인이 회개하고 중생했다면,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조롱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이렇게까지 바닥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이 문제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놓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목회를 통해서 참된 거듭남의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지 못한 목회자의 어깨 위에 멸망당하는 수많은 교인의 피가 뿌려지게 될 것입니다. 참된 회개와 중생의 말씀이 설교단상에서 회복되고 세워지지 않는 한 기독교회 안에서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3부,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세 번째 돌, “성령께서 역사할 수 없는 설교”

복음을 받는 사람뿐 아니라 전하는 사람도 진지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웃는 얼굴로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시죠?”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의사가 암에 걸린 사람에게 웃으면서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암에 걸렸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설교 단상에서 너무나 가벼운 말과 유치한 농담들이 복음과 함께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을 그런 얼굴과 그런 말투로 전하면 그 말을 듣는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이 갖고 있는 심각함이 전달될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태도에 따라서 설교가 갖고 있어야 할 무게와 엄숙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좋지만, 거절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설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분위기로 전달되어야만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끔찍한 죄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진행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설교자는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와 세상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시대의 교회 형편을 올바로 보지 못하면, 이렇게 설교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런 식의 설교가 청중들의 마음속에 정말 구원의 경험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부흥과 개혁의 경험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거짓 안전감을 심어 주게 됩니다. 이 시대의 설교자는 이런 질문을 청중들에게 던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이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변화>라는 열매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과거에 사랑하던 죄가 떨어져 나갔습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죄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습니까? 죄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용솟음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충성이 날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옵니까?”

 

사람의 입맛을 맞추는 설교

지금 기독교회는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왜 기독교회의 설교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지 않고 교인들의 입맛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만” 듣기 원하는 교인들 때문에 설교의 엄숙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에서 기도주일에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면, 많은 경우에 교회를 오래 다닌 교인들로부터 이런 항의를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를 결코 그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왜 그런 반응을 하게 될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자기 나름대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1~22)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독하고 공부하지만, 구원의 경험에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지식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양심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지식 중 어떤 것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애에 실제적인 부흥과 개혁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보십시오. <자기 향상에 도움을 주는 정보>, <영성을 위한 다섯 가지 방법>, <신실해지는 여섯 가지 단계>, <넘어지지 않는 열 가지 전략>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찾는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향해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쉽고 편리한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만, 진리는 그렇게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설교를 보면 여러분의 마음과 신앙 상태가 어떠한지가 보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감사와 충성의 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순종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설교를 찾아서 들어야 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현대 기독교회에서는 설교를 듣는 청중의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순절 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7~38).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는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적인 속성을 정확하게 집어 주는 설교를 들어 보셨나요? 매 주말마다 선포되는 수많은 설교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정확하게 가르치는 설교가 얼마나 될까요? 예수께서 곧 재림하신다는 말씀의 선포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심각한 상황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우리 교회는 부흥하지 못할까? 왜 교인들이 이렇게 세속적이고 회개하지 않을까?”라고 의아해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진짜 하나님과 진짜 복음이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기독교회는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와 세속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상한 복음을 설교하는 한 교회에 참된 부흥과 개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세속을 포기하도록 초청하는 강력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호소하는 말씀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이 끌어당기는 힘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워가 말씀을 통해서 나가야 합니다. 설교에 예리한 말씀의 날이 서 있지 않으면 부흥과 개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지 못하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까?

몇 해 전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한번은 나이가 많은 은퇴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오래전에는 집회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은퇴 목사님은 진지한 눈으로 내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우리가 집회할 때는 성령께서 내려와서 영혼들을 직접 구원하셨다네.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었지. 그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집회는 없었다네. 우리는 한번 집회를 하면 적어도 2주나 3주 동안 설교를 하고 말씀을 가르쳤다네. 요즘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설교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네. 우리는 하나님의 영께서 죄인들의 마음을 깨뜨리시고 역사하실 때까지 성경 말씀을 읽어 주고 호소했다네. 집회에서 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은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을 부서뜨리실 때까지 쟁기질하고 쟁기질하고 또 쟁기질 하는 것이네.’

그때 나는 정말 알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성령께서 집회에 임재하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은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인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네. 주여, 나같이 악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새 신자를 교인으로 만들 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선생님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접 기도는 선생님을 천국문으로 데려다 줍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도 축복 받고 내세에는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 신자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종교적인 가면을 쓰고 위선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녀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참된 복음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의 눈에는 온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성도의 삶이 극단적이고 율법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점점 더 좁은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성령과 싸우는 설교

두려운 사실은, 설교자가 복음과 죄를 피상적이고 얄팍하게 다룰 때 그는 성령과 대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속에서 세 가지 면을 다루시고 역사하십니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께서는 죄인의 양심 속에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설교자는 죄를 가벼운 것으로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께서는 마음속에서 죄를 심각하게 다루시는데, 설교자는 죄를 붙잡고 있어도 구원받는 것처럼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설교자는 성령과 싸우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보여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야 하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데, 설교자는 신자들의 죄를 덮어 주고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런 설교는 성령과 대적하는 설교입니다. 설교자들이시여, 설교를 통해서 성령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오래전에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설교와 예배에 대해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1. 예배가 지루하고 축 늘어졌다.
  2. 양심의 가책을 주는 설교는 싫다. 교회에 가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싶지 않다.
  3. 설교가 너무 지루하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4. 교회가 냉정하고 불친절하다.
  5. 교회 가는 것이 마치 죄를 발견하러 가는 느낌이다.
  6. 심판과 형벌 대신에 축복과 긍정의 메시지를 듣고 싶다.

설문 조사에 따라서 교회 제직 회의는 교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설교와 예배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목회자를 교체했습니다. 새 목회자가 온 이후 설교와 예배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요? 설교는 짧아졌고 설교에서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이 빠지게 되었으며 양심의 가책을 주는 말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깊이 있는 말씀은 사라져 버렸고, 시사와 농담과 철학적 사상으로 설교가 채워졌습니다. 찬양과 음악은 동네 노래방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만족했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소수의 교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는 부흥과 개혁이 일어날 수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설문 조사를 성경 말씀보다 높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인기 있는 설교자일수록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이끄는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영생으로 가는 길보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피곤하게 살다가 교회에 나온 신자들의 죄를 지적하거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께서는 결코 그런 설교자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과 설교자의 사역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사역을 존중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도 그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는 것이 성령의 주요 사역인데, 목회자가 사랑만 강조하고 죄를 책망하지 않으면 그런 목회자는 성령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에서 신자들의 죄와 세속을 다루어야 합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설교자는 교인들의 죄와 세속에 대해서 침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보다 사람의 인정을 귀하게 여기는 목사는 신자들의 죄된 삶을 덮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설교에는 죄인을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를 가벼운 것으로 설교하는 지도자에 대한 예레미야의 경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6:14~15)

 

환자를 죽이는 의사가 될 수 있다 

죄를 가벼운 것으로 설교하면, 그것은 청중을 속이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환자가 암에 걸린 사실을 숨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갈 것을 두려워해서 환자가 지켜야 할 건강 원칙을 숨기고 환자가 듣기 원하는 말만 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환자는 죽을 것입니다. 그런 의사는 히포크라데스 선서를 부인한 채 환자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요한 웨슬리 시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현대인들은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휘트필드나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교회 문화와도 많이 다릅니다. 요즘 사람들의 마음은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여유가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밖에 모릅니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듣기 싫은 설교를 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진리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틴 루터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역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영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쫓겨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유대 교회는 그분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진리가 있는 그대로 제시될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진리가 정직하게 제시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나운 짐승처럼 복음에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오직 소수의 성도들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굴복시키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거룩함보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꺽고 진리 앞에 납작하게 엎드리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구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목사의 설교에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자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설교 속에서 죄와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제거하게 됩니다. 그런 목회자는 성령 없이 설교하고, 성령 없이 사역하기 때문에 영혼의 곤고함 속에서 무기력한 목회를 하게 됩니다.

설교자가 교인들의 세속과 죄에 대해서 입을 다물면, 교인들은 자신이 무슨 문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나가 죄를 용서받고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이 부드러운 설교로 죄를 덮어 주고 구원을 보장해 주는 목사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하게 됩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대신에 죄를 덮어 주는 목사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죄와 타락 앞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게 됩니다. 현대 기독교회의 설교에서 죄에 대한 책망이 사라져 버리자, 기독교회에서 부흥과 개혁이 사라졌습니다.

 

2부,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두 번째 돌, “교회 안에 들어온 마케팅 정신”

지난 30여 년 동안 교회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설교가 달라졌고 찬양이 달라졌으며 악기와 실내 장식과 교회 건물 디자인까지 달라졌습니다. 왜 교회는 모든 것을 바꾸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마케팅 정신이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온 마케팅 정신이야말로 부흥과 개혁의 길을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돌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여러 종류의 컨설턴트 회사가 있습니다. 컨설턴트 회사란, 문제를 해결하고 자문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음식점이 적자가 나서 힘들게 되었을 때 레스토랑 컨설턴트 회사에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면, 전문가들이 나와서 음식점에 적자가 나는 요인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해 줌으로써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레스토랑 컨설턴트 회사는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여 음식 메뉴를 바꾸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새롭게 해 주며 종업원을 재교육시키고 효과적인 SNS와 광고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음식점에 손님이 증가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교회 컨설턴트 회사, Church Consultant Company   

놀라운 사실은, 교회 컨설턴트 회사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컨설턴트 회사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위해서 일하는 회사가 아니라 교인 숫자를 늘려 주기 위해서 일하는 회사입니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여러 개의 교회 컨설턴트 회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교회 마케팅’이라고 부르는데, 교회 마케팅 팀은 신학자와 노련한 목사와 사회심리학자와 교회 음악 전문가와 소셜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회 컨설턴트 회사의 주요 고객은 다음과 같은 교회들입니다. 교인 숫자가 적은 교회, 재정적으로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 교회를 대형으로 키워 가려고 계획하는 교회. 이런 교회들이 교회 컨설턴트 회사에 서비스를 요청해 오면, 컨설턴트 회사의 전문가들이 나가 교회를 답사하고 문제를 파악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마케팅 기법에 의존하여 교인 숫자를 늘리고 성장시키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세상 회사와 기업에서 사용하는 고객 관리 기법을 교회에 적용해서 성장의 비법(?)을 찾아냅니다.

교회 컨설턴트 회사는 ‛customer satisfaction(고객 만족)’의 정신을 목회자와 교회 제직들에게 교육시킵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 변화를 줌으로 기존 교인들을 만족시키고 새로운 사람이 교회에 와서 불편을 느끼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그들이 제안하는 방법과 아이디어를 따라가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설교 내용이 바뀌어지며, 음악과 찬양이 바뀌고, 주일학교 프로그램도 바뀌며, 심지어는 조명과 교회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바뀌게 됩니다. 그들은 교인들이 싫어하는 설교와 마음에 부담을 주는 설교를 하지 말 것을 목회자에게 요구합니다. 그들은 재미있는 설교, 감성적인 설교,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설교, 교훈이 담겨 있는 짧고 단순한 설교를 요구하며 설교는 반드시 30분 이내에 끝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찬양과 예배 음악을 현대 감각에 맞춰서 변화시킬 것을 주문하기 때문에 드럼과 섹소폰과 전자기타가 예배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 속에 마케팅 기법이 들어오면 교회는 바벨론이 되고 귀신의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교회 성장법과 마케팅 기법이 만들어진 곳은 미국이지만, 그것이 가장 크게 꽃을 피운 곳은 한국입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 마케팅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인 대형교회 50개 중에서 20여 개 이상이 한국 기독교회에서 나왔고 제1위도 한국 교회입니다. 온 세계 교회들이 한국 교회의 성공 사례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회는 마케팅 기법을 최고의 교회 성장법으로 받아들여서 ‛결과’를 만들어 냈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독이 되어 온 교회를 황폐화시켰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황폐하게 되었을까요? 교회가 성경 말씀으로 돌아갈 수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회에서 성경은 최고의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성경 말씀을 분명하게 제시해도 듣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부흥과 개혁이 일어날 수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케팅을 받아들인 교회의 모습

교회 마케팅의 최종 목적이 무엇일까요? 교회를 사람들이 찾아오기 원하는 매력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느끼는 거부감을 제거하는 것이 교회 마케팅 전문가의 임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해야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교회 마케팅입니다.

마케팅 기법을 받아들인 교회마다 외치는 구호가 있는데, 그것은 “교인 만족, 죄인 만족”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만족할 때까지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케팅에 물든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케팅 정신에 젖어 들면 사도 바울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정신에 사로 잡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소원과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교회가 마케팅 기법을 받아들이면, 교회는 회사가 되고 복음은 상품이 되며 목사는 사장이 됩니다. 교회 성장 전문가들은 교회를 회사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복음이라는 상품을 잘 팔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결국, 교회 컨설턴트 회사의 영향을 받은 교회마다 설교가 값싼 은혜, 값싼 복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복음을 싼값에 잘 팔아야만 수입(헌금)이 늘고 고객(교인)의 숫자가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마케팅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마케팅의 기본은 고객의 불만과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고객 불만을 없애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마케팅입니다. 교회 마케팅 기법이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요? 분당의 어떤 교회는 교회 안에 흡연실과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담배 피우는 교인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 흡연실을 마련한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떤 교회는 대예배실을 레스토랑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식사를 즐기면서 결혼식을 관람하는 현대 웨딩 풍조처럼, 그들은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예배드립니다. 주일 아침에 식사와 예배를 함께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는 백화점과 MOU를 맺고 백화점 몰 중앙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백화점은 일요일마다 수천 명의 교인들이 백화점을 찾게 되니 좋고, 교회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에 교회를 세울 수 있으며 예배와 쇼핑과 식사를 한자리에서 제공하는 one stop(원 스톱) 서비스를 교인들에게 제공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백화점과 교회가 서로 윈윈하는 마케팅 전략을 세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교회 마케팅이 무엇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기독교회는 ‛마케팅’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 마케팅에 초점을 맞춘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 대신 설문 조사를 따라가는 교회

마케팅에 물든 교회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설문 조사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고객인 교인들에게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 어떤 음악을 듣기 원하나요? 어떤 분위기의 예배를 원하십니까? 어떤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십니까?”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고객들이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교회 성장 전문가를 찾아갑니다. 교회 성장 전문가는 고객의 불만과 불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제시할까요? 그들은 설문 조사 결과를 토대로 주로 세 가지를 바꿀 것을 제안하는데, 첫째는 예배 방식이고 둘째는 설교 내용이며 세째는 음악과 교회 분위기입니다. 교회가 마케팅과 성장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부흥과 개혁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고 방법과 아이디어만 남게 됩니다. 성령께서 깊이 역사할 수 없는 교회가 되고 그 안에 있는 교인들은 깊이 잠들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세상이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세상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케팅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기독교회의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교회를 아는 세상의 지식인들은 교회를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가면 갈수록 교회 마케팅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마케팅 전문가를 신기한 마술사로 생각하는 교회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할 것을 사람에게 물어볼 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현대 기독교회를 향해서 던지는 경고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사 8:19)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마케팅 전문가와 교회 성장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들과 교회성장 전문가들은 3년에 한 번씩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기독교회는 그때마다 새로 나온 이론을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성장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이론은 몇 년에 한 번씩 유행처럼 지나가는 ‛허탄한 신화’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고 눈물로 무릎을 꿇고 성경 말씀을 펼치고 선포해야 합니다. 교회성장법을 따라다니는 성직자는 결국 진리를 버리고 넓은 길을 걷게 됩니다. 교회 마케팅 기법은 교회 안에 영적으로 무기력한 가라지들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19~20)

성도 여러분,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물어보고 상담해야 할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죽은 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자들은 결국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

 

1부,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첫 번째 돌,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난 수십 년간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극심한 논란과 혼돈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자유주의적인 노선을 추구하는 목사와 신학자일수록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경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도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면서 성경 이외에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교회 안에 큰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전쟁은 성경이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흔드는 전쟁입니다. 교회의 한쪽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흔드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서는 성경 말씀을 높이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성경에도 오류가 있기 때문에 선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경 말씀에 마음과 생애를 바쳐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만으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가? 현대와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성경만 가지고 목회할 수 없다. 심리학과 사회학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입해서 교회 운영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

문제는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상에 빠지면 계속해서 다른 것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사회학 연구 자료와 통계와 문화가 성경 말씀보다 우위를 점하는 교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기보다는 사회학적 통계와 설문 조사에 의지해서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고, 예배를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선교하고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정신이 들어오면, 부흥과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현대 기독교회에서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이 예배와 선교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침이 되면서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인가?”를 찾는 열정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경만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5~17)

 

어떤 신학자들의 경고

수십 년 전부터 소수의 경건한 신학교 교수들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지금 신학교의 복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닐고 있다. 신학교 강의실에서 플라톤이 강의하고 있다. 신학교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나타나자,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신학생들이시여, 조심하기 바란다. 세상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목소리가 신학교 강의실에서 울리게 되면서, 사도 바울의 음성과 사도들의 피 묻은 행적이 사라지고 있다!” 신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과 사회학이 득세하면서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의 신앙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가 교회를 운영하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리는 대신 사회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하고 심리학자의 책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 현대 목회자들을 향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시 23:1).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에 문제가 생겼는데, 왜 로마와 헬라에게 자문을 구해야 합니까? 사회과학의 이론이 어떻게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인 투쟁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인가? 하나님인가?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주의 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회에서는 비즈니스같이 거대한 조직을 가진 산업형 교회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그런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사라지고 교세 확장에 대한 이론과 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교회 성장법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법’이란,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메뉴얼을 기초로한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 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세상 학자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따라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할 때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경을 펼쳐 놓고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은 교회를 세우기 전에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좋아하십니까?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시나요? 어떤 분위기의 음악을 좋아합니까?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합니까?” 이런 종류의 질문이 담긴 설문지를 동네 사람들에게 돌려서 물어본 다음, 동네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현대 기독교회가 진리처럼 붙잡고 있는 ‘교회 성장 메뉴얼’입니다. 물론, 교회는 죄인들이 찾아오기 쉬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의 필요를 가장 정확하게 하시고 채우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지역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봉사하기 원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교회가 물어보고 따라가야 할 유일한 대상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우리가 세상에게 물어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가 원하는 쪽으로 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게 해서 생명의 말씀을 따라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큰 교회’를 세우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진리로 인도해서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중의 인정과 인기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달받은 모든 사람이 거절하고, 진리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이 외면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야만 합니다. 만일 교회를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아무나 모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

 

서론, 부흥과 개혁이 없는 이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분별한다고 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요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면서 하늘의 축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성소를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원하는 부분과 원하지 않는 것으로 구별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연약하며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의 진짜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교회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나란히 놓고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면에서 변화되어야 하고 무엇을 개혁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현대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디서, 어떻게 빗나갔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부담에 짓눌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사명>은 이번 호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부담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 호를 읽는 분들 중 어떤 분들은 글을 읽다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신이 나서 “아멘”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글을 읽다가 기분이 상해서 <마지막 사명>을 덮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태도 모두 적절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회가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목회자와 신학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일반 성도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교회의 부흥과 개혁에 대해서 말할 때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을 돌리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과 겸손과 용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너는 부흥과 개혁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인정해 주실까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선언을 들을 수 있을까요?

두 부류의 사람들

오늘날 교회 안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적 욕구와 감정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좋아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설교와 메시지는 “세속과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죄와 세속에 끌려다녀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해 주는 설교와 책들이 인기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설교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정직하게 펼쳐 보이는 설교와 책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좁은 길을 걸으라.”는 설교를 좋아하고, “말씀에 충성하라.”는 메시지가 강조되는 책을 찾습니다. 그런 분들은 “죄를 포기하라.”고 책망하는 설교를 들으면 “아, 이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그런 분들은 스펄젼과 휘트필드의 설교 듣기를 좋아하며, 토저와 요한 웨슬리의 글을 사랑하는데, 그들의 설교와 글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라.”고 외치는 강력한 호소와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깊은 혼돈과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책과 설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고민과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날마다 주 앞에 나가 “주여, 저를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주고자 하시는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설교와 책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심리학’으로 성경의 거룩함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과 합리적인 사고가 마치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죄인의 심령 깊은 곳을 파헤치고 들어가야 할 복음이 얄팍한 기술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에 물든 설교와 책에 빠져들면, 상한 심령으로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는 성령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하면서 돈과 세상을 사랑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지만 탐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애쓰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습니다. 매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사모하는 종들을 부르셔서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그들을 증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을 살피는 성도들을 부르시는데, 그들은 대개 이런 간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눈을 열어 주셔서 진리가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과 생애 속에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세속적이던 제가 이제는 말씀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성경이 지루한 책이었는데, 이제는 성경 말씀이 꿀처럼 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충동이 올라옵니다. 전에는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순결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간증과 고백을 들을 때 당황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당황할까요? 왜냐하면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때 그런 경험을 했지만 오래전에 성령의 역사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도 한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지만, 뜨거움은 오래가지 않았어. 결국에는 다 마찬가지야. 우리 모두는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에게 있어서 부흥과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야.” 성도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나가는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밝은 빛을 향해 나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사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부흥과 개혁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부흥과 개혁을 앞당기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살아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그런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라면,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란 없었을 것이며 종교개혁자들이 피를 흘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중간에 서 있겠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문 앞에 서서 부흥과 개혁의 물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큰 돌들이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교회와 개인의 부흥과 개혁을 막고 있는 돌들을 하나씩 살펴볼 것입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깊이 역사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18호를 시작하며…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설교 후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지금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지금이라도 불속에 뛰어들겠습니다. 목사인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순종하지 않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일에 지쳐 있지만 하루 종일 설교하라면 하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교회가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 몸뚱이를 던져서라도 그 길을 막아 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죽은 교회 속으로 하늘의 생명이 흘러들어 갈 수 있을까요? 이번 호에서는 부흥과 개혁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부흥과 개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부흥과 개혁이 생기기를 기도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만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기독교회를 망쳐 놓았습니까? 경건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학자와 목회자 때문에 교회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그들을 따라가는 무지한 양들 때문에 교회가 세속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참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망가지고 더렵혀진 것들을 청소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때문에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진리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를 원하시며 어떤 원칙 위에 서 있기 원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만 합니다. 분명한 성경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계시가 주어지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부흥과 개혁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는 허망한 것이고 부흥과 개혁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개혁에 대해서는 눈감은 채 부흥만을 말하는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읽고 고민해야 할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흥과 개혁이 생길 수 없도록 막고 있는 돌들을 보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