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언약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모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언약이 맺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고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옛 언약이 가지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잘사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게 되었고 우상을 섬기는 죄에 쉽게 빠졌던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이기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만 의무감으로만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요구하니까 억지로 지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순종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이 자신의 성향(기질)과 충돌된다고 해서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없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속에 새겨진 원칙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순종은 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모든 의의 본질은 구세주께 대한 충성심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할 것인데, 이는 그것이 옳은 일이고 또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예수님의 비유, 89)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문제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문제는 그들이 했던 노력과 행위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심령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지지 않고 굴복되지 않은 것에 있었습니다. 마음은 세상을 사모하고 돈을 사랑하면서, 행위와 겉모습에서 경건의 열매를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경건의 모양”에만 골몰했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오해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말씀 속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law, 공의)와 인(mercy, 긍휼)과 신(faithfulness,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외식(위선)”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와 각종 헌물을 잘 드렸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공의와 긍휼과 신실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이기적이고 불공평하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노력과 헌물보다 공정함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신실함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하에 사는 바리새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이런 문제를 보셨기 때문에 “마음을 변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는 새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옛 언약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4-26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경된 바리새인들이여, 하루살이와 같은 하찮은 것은 안 먹으려고 노력하면서 그것보다 훨씬 큰 낙타를 삼키는도다. 눈에 보이는 종교적 행위는 열심이면서, 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마음과 영적인 경험은 무시하고 있는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7-28절)   

 

이 말씀에 옛 언약하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외식(위선)”이었습니다. 유대교회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무덤 위에 하얀 횟가루를 뿌려놓으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는 “썩어서 냄새나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다시 말해서 겉모습은 행위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지만, 속 마음은 죽은 사람의 무덤처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옛 언약의 문제였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마음으로 순종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문제에 빠져서 구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옛 언약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정결하지 않은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속은 더러운데 겉에는 종교적 행위들이 무성하여 깨끗하게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더 깊은 기만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에 속한 신앙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옛 언약에서 유대인들이 이런 문제에 빠져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을 씻는 성도들과 새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새 언약의 경험이 없으면 멸망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시대에 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새 언약의 경험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새 언약의 시대에 살면서 옛 언약의 경험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새 언약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른 채 영적 무기력과 곤고함 속에서 방황하다가 멸망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는 새 언약 시대에 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새 언약 시대에는 예수를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구원받았지만, 신약시대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된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거짓 가르침을 붙잡고 넓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언약의 조건과 내용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요일 2:7)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돌비에 계명을 기록했던 것처럼,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당신의 법을 새겨놓으십니다. 언약의 내용은 같지만 기록하는 장소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새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새 언약 – 하나님의 법이 성도의 마음에 새겨짐

하나님께서 계명을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이 마음과 생각에 기록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사랑하도록 마음과 생각이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이란,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심령이 변화되는 경험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가면 그분의 죽음과 희생과 사랑을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싶다는 거룩한 소원과 충동이 올라오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 잡고 주관하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과 이기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새 언약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인은 비록 육체에 갇혀서 살지만, 육체의 정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나가 새 언약을 맺은 성도들은 육체의 충동을 물리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8-9)

 

우리 마음에 기록되는 계명은 시내산에서 돌비에 기록된 계명과 동일한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계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이 새겨진 장소에 있는 것입니다. 돌비에 새겨진 계명은 우리를 단지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말처럼, 육신의 생각은 …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롬 8:7). 그러나 동일한 계명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변화된 마음에 받아들여져서 새겨지면,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이런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이것이 새 언약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참된 새 언약의 경험

그리스도와 새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본성의 충동을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죄와 유혹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십자가 앞에서 새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바치게 되고, 그런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죄를 이기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육체로부터 더러운 욕망이 올라올 때 새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 하늘 성소의 은혜의 보좌에 올라가 “주여, 죄가 나를 엄습해 옵니다. 저를 살려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죄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육체의 충동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게 되고, 교만과 이기심이 추하게 보이게 됩니다. 죄를 사랑하지만 구원받기 위해서 죄를 버리는 것이 아니며 지옥불이 무서워서 억지로 죄를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가 너무나 추하고 더럽게 보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승리의 경험입니다. 옛 언약의 유대인들은 이런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새 언약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유대인들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는 위선자와 율법주의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옛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멸망당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옛 언약에 대한 오해와 새 언약에 대한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빠져나오지 않으면 참된 구원의 경험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Q & A 지금은 새 언약의 시대이므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데 왜 계명에 묶여서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의 의미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까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말씀을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바울은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씀으로 기록했지만,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하여졌다. 새 언약하에서는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계명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이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심판 아래 있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마치 철봉에 매달려 있는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철봉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에는 힘에 부쳐서 손을 놓고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옛 언약의 신앙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죄에 지치고 상한 심령으로 십자가에 나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새겨지는 새 언약의 경험을 한 성도들은 기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보면서 사는 성도들은 십자가 은혜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가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롬 8:1, 킹제임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