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사탄의 거짓말과 참신앙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와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불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구원만 받으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어떤 희생과 대가를 요구하면 피하고 등을 돌립니다. 그런 분들은 온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는 신앙까지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놀라운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은 지금은 새 언약 시대이므로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거짓말합니다. 사탄은 새 언약 시대에는 예수를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거짓말합니다.

 

사탄은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구원받았지만, 신약시대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된다.”고 거짓말합니다. 

사탄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되므로 더 이상 계명에 묶일 필요 없다.”고 거짓말합니다. 사탄은 “죄와 불순종의 자녀로 살아가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거짓말합니다.

 

참신앙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지구까지 오셔서 피를 뿌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어떻게 불순종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인생을 죄로 소모해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욕심과 내 갈증을 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짓밟을 수 있습니까? 누가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인생을 허공에 날려버리려고 합니까?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인생을 아무렇게나 소모해버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큰 희생이 치러졌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내 것”처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니까 내 마음대로 살겠다. 내 소유니까 내 마음대로 쓰겠다. 내 힘으로 벌었다. 나에게 권리가 있다. 내 것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피가 뿌려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생애에 있어서 그리스도 죽으심의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가 먹는 떡도 그분의 찢어진 육체로 산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물도 그분의 흘리신 보혈로 산 것이다. 날마다 음식을 먹는 자들 중에서, 그가 성자이건 죄인이건 간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을 받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 모든 떡덩이마다 갈바리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다. 모든 샘물에도 십자가가 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이 당신의 큰 희생의 상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Life of Jesus, 660)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매 시간, 매 분, 매 초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산 바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평안을 누렸으면, 그것은 예수께서 고통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갑에 돈이 들어있다면, 그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지혜과 지식을 주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신 인생을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 죄된 욕망과 갈증을 풀기 위해서 인생을 소모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6부, 어떤 인도 목회자의 고백

“나는 옛 언약 속에서 살아왔다”

올해 저는 70살이 되었는데, 50년 전에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목사의 길을 걸은 것은 43년이 되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볼 때 가장 뼈아픈 것은 옛 언약의 경험 속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20세에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누구도 나에게 옛 언약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새 언약에 대해서 설교했지만 새 언약의 경험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언약에 대해서 설교할 때 항상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새 언약 시대에 살기 때문에 계명에 묶이지 않아도 됩니다. 새 언약 시대에는 예수를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구원받았지만, 신약시대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흔들 수 없습니다. 불순종과 죄는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열매입니다.” 

나는 목사였지만 사탄의 종이었고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나이는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사춘기 소년처럼 무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적 무지함과 과거에 했던 나의 설교를 용서해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무지한 설교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이 사탄의 기만에 빠져서 구원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렵습니다.

인도는 18세기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살다가 1947년에 독립했습니다. 인도 사람들 중 누구도 억압받는 식민지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옛 언약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억지로 경건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새 언약을 주셨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옛 언약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거짓 새 언약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리스도와 새 언약을 맺었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옛 언약의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새 언약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것은 예수님을 믿은 지 16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옛 언약의 신앙을 했던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분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늘 내 마음은 목사들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지고 교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역을 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나의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장래에 대한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이해했지만, 예수께서 나를 정욕과 분노와 질투에서 건져주고 내 감정의 쓴 뿌리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인지 몰랐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 때 예수께서 나에게 구원의 선물을 보내주셨는데, 그것은 “고난이라는 선물”이었습니다. 나는 고난 속에서 내가 얼마나 참담하고 헐벗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새 언약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언약의 경험을 하면서, 성령께서 내 마음의 중심, 특히 동기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목사를 하는 이유, 내가 사역을 하는 이유, 내가 설교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에만 맞춰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복음 전파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확장과 교인 숫자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교인들이 천국에 가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설교는 “좁은 길”과 “진리가 무엇인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참된 구원의 경험이 무엇인가를 강조합니다. 내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만 맞추어지자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설교하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인생은 “내 뜻”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새 언약을 경험하면서 “내 뜻”은 사라지고 “주님의 뜻”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경험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8)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내 마음과 심령 속에서 하늘의 생명과 거룩한 분위기가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경험은 심령이 의와 진리로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것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수”였습니다(요 4:14).

 

늙은 종의 호소

옛 언약하에서 나의 모습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고 말씀을 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과 심령은 언제나 목마르고 만족이 없고 공허했습니다. 겉모습을 신앙으로 포장했지만 속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옛 언약의 신앙으로 살 때는 6일 동안 은근히 불평하고 은근히 비난하고 은근히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다가 예배일만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걸었던 옛 언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6일 동안은 하나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삽니다. 평일에는 남들에게 크게 욕 얻어먹지 않을 정도로 삽니다. 그러다가 예배일이 되면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가 예배드립니다. 그런 사람은 옛 언약의 덫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경험은 내 삶 전체가 하나님께 산 제사로 바쳐짐으로 영혼 속에 하늘이 주는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표정과 말에서 여유와 확신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참된 새 언약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을 채찍과 당근으로 보게 됩니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채찍) 때문에 순종하고, 순종에 대한 약속(당근) 때문에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잘 믿고, 헌금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면 직장에서 승진하고 자녀들이 잘된다고 믿는 신앙은 옛 언약의 신앙입니다.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옛 언약의 신앙으로는 결코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옛 언약에서 사는 사람들은 억지로 순종하려고 애쓰다가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길로 인도함 받은 성도들은 범사에 감사하고 가난 속에서도 나눔의 삶을 살게 되고 주님을 늘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 언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2,3,6)

 

나는 오래전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율법주의이고 하나님께서 저주하는 행위신앙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과거의 나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저처럼 옛 언약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이제 새 언약으로 나와야 합니다. 의인은 빛이 주어질 때마다 점점 더 밝은 빛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19).

 

Do you know? 구약시대는 행위로 구원받고 신약시대는 은혜로 구원받습니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의 경험은 동일합니다.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는 것처럼, 구약시대에도 어린양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들은 장차 올 메시아의 죽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양을 죽이고 피를 성소에 뿌렸는데 그것이 속죄제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죄인의 심령 속에 역사하여 새 마음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험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에스겔서 36장과 예레미야 31장에 이미 새 언약의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많은 사람들이 구약시대는 옛 언약의 시대라고 생각하지만, 구약시대에도 새 언약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지만, 그분의 소원은 언제나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기록되는 새 언약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서에도 새 언약의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3)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에는 옛 언약의 행위로 구원받고 신약시대는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행위로 구원받는 성도들과 은혜로 구원받는 성도들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죄인은 내 죄 때문에 죄 없는 양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깊은 회개의 경험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시대에도 양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새 마음을 받는 경험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은 신자들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구약시대부터 존재해온 계명이었습니다.

 

신약시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구약시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Q & A : 이런 질문을 갖고 계십니까?

 

  1. 첫 번째 질문: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서 “우리 어머니”는 누구인가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요즘 어떤 교회들에서는 “아버지 하나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하나님”도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신흥교회에서는 “어머니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은 아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의 인간 생활에 대한 관념을 갖고 하나님을 해석하면 이상한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어머니가 있고 아내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도 어머니와 아내의 관념으로 보면 진리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실제로 표현되었는지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설명하기 앞서 24절에서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나오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어머니”는 비유이고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갈과 사라 = 두 언약

바울은 갈라디아 4장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내 이야기를 통해서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경험을 설명하였습니다. “여종(하갈)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사라)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갈 4:23,24). (하갈 = 옛 언약 / 사라 = 새 언약)

그런데 바울은 옛 언약을 상징하는 “하갈”을 사용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하갈(옛 언약)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유대인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율법주의)”(갈 4:24,25)

 

이 말씀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만들어내는 경험을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으로 비유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옛 언약의 신앙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갈 = 옛 언약 = 유대인의 예루살렘 = 율법주의)

 

이와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를 낳은 “사라”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하늘 새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6,2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약속의 자녀(이삭)를 낳은 <어머니 사라>를 하늘 새 예루살렘 성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은 것처럼, 새 언약하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음이 새롭게 창조된 성도들은 하늘 새 예루살렘(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사라 = 약속의 자녀를 낳은 어머니 = 새 언약 = 하늘 새 예루살렘)

 

바울은 두 명의 다른 어머니가 두 명의 다른 아들을 낳은 것처럼, 두 개의 다른 예루살렘 성이 두 개의 다른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자녀들을 낳은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성”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의 힘으로 지켜서 구원 얻으려 했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지적한 것입니다. 

 

  1. 두 번째 질문: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신부”가 누구인가요? 요즘 어떤 교회에서 “하나님은 아내(신부)가 있다.”고 말하는데 정말 하나님도 우리처럼 결혼하나요?

우리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결혼하고 아내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도 우리처럼 아내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 말씀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다음 말씀에서 성령과 신부를 나란히 기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아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계 22:17)

 

이 말씀에서 신부는 누구일까요?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구원받아서 하늘에 간 성도들에 대한 말씀인데, 사도 요한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을 “신부”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사도 요한은 왜 새 예루살렘 성을 아름답게 “단장한 신부”라고 표현했을까요?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신부”를 “어린양의 아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구원받아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 성도들을 “어린양, 그리스도의 아내”로 설명한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계 21:9).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등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 신부 = 어린양의 아내 = 구원받은 성도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의 끝에 나오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령과 신부(죄로부터 구원받은 성도들)가 함께 성경의 마지막 장면에서 온 우주를 향해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 목마른 자, 원하는 자는 모두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고 구원받았습니다. 아무도 죄에 대하여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자는 모두 생명수(말씀)를 마시고 구원받았습니다.”

5부, 누룩의 역사와 새 언약의 경험

새 언약과 성령의 역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누룩의 비유에서 새 언약의 경험에 대한 중요한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예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누룩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맛이 없고 딱딱해서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누룩이 없는 그리스도인도 맛이 없고 딱딱해서 성품과 생애 속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은 우리에게 성령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설명해 줍니다.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수 없을 만큼 극악하고 타락하고 저속한 사람은 없다.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는 사람 속에는 새로운 생명이 심어짐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된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써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섞지 아니하면 변화가 생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죄인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이룰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교양과 교육을 받을지라도 죄인이 하늘의 자녀로 변화될 수 없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변화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예수님의 비유, 96-97)

누룩은 밀가루의 성질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시키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우리 마음과 생애를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으면, 속에서부터 부풀게 하는 작용을 일으켜 점차 밖으로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도 먼저 마음속이 새로워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하나씩 뜯어고치는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저런 악한 습관을 교정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윤리와 도덕을 개선해서 하늘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진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리를 지식적으로 알더라도, 마음과 생각의 방향이 전격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던 것이 좋아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이런 변화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마음이 변화되면, 육체에 끌려다니지 않는 승리의 생애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새 언약하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새 언약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새 언약의 경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새 언약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교회 안에는 새 언약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참된 새 언약의 경험을 모르기 때문에 죄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계명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회를 휩쓸고 있는 거짓 복음

참된 새 언약의 경험을 모르면 결국 다음과 같은 거짓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타고난 기질과 성벽을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부모에게 받은 성격대로 살다가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 죄는 이길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순종할 수 없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계명은 정말 지킬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셨고,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옥불에 던지는 것인가요? 사탄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할 수 없다.”는 말과 설교를 들을 때 박수를 치고 춤을 춥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과 설교는 죄와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복음은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복음은 죄인의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로 새 언약을 맺으면 죄를 버리고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죄” 때문에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면, 죄인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이 죄송하고 감사한 빚진 자의 심령”이 생기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 심령을 받는 사람들은 새 언약의 승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십자가 앞에서 빚진 자의 심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속에 의를 사모하는 소원을 새겨주십니다.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고 싶어하는 소원을 넣어주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이 이루어지는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심령 속에서 새 언약이 이루어져야만 죄와 유혹을 뿌리치는 승리의 생애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새 언약의 시대에 산다고 무조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의의 경험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지배하시면, 죄를 품은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습관을 끊게 됩니다. 분노와 시기와 분쟁이 사라지고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생깁니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우리의 표정과 모습에서 하늘의 빛을 반사하게 됩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늘의 능력이 내려와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게 되는데, 이것이 새 언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4부, 새 언약의 경험을 아십니까?

옛 언약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모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언약이 맺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고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옛 언약이 가지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잘사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게 되었고 우상을 섬기는 죄에 쉽게 빠졌던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이기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만 의무감으로만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요구하니까 억지로 지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순종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이 자신의 성향(기질)과 충돌된다고 해서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없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속에 새겨진 원칙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순종은 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모든 의의 본질은 구세주께 대한 충성심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할 것인데, 이는 그것이 옳은 일이고 또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예수님의 비유, 89)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문제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문제는 그들이 했던 노력과 행위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심령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지지 않고 굴복되지 않은 것에 있었습니다. 마음은 세상을 사모하고 돈을 사랑하면서, 행위와 겉모습에서 경건의 열매를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경건의 모양”에만 골몰했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오해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말씀 속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law, 공의)와 인(mercy, 긍휼)과 신(faithfulness,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외식(위선)”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와 각종 헌물을 잘 드렸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공의와 긍휼과 신실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은 이기적이고 불공평하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노력과 헌물보다 공정함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신실함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옛 언약하에 사는 바리새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이런 문제를 보셨기 때문에 “마음을 변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는 새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옛 언약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4-26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경된 바리새인들이여, 하루살이와 같은 하찮은 것은 안 먹으려고 노력하면서 그것보다 훨씬 큰 낙타를 삼키는도다. 눈에 보이는 종교적 행위는 열심이면서, 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마음과 영적인 경험은 무시하고 있는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7-28절)   

 

이 말씀에 옛 언약하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외식(위선)”이었습니다. 유대교회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무덤 위에 하얀 횟가루를 뿌려놓으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는 “썩어서 냄새나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다시 말해서 겉모습은 행위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지만, 속 마음은 죽은 사람의 무덤처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옛 언약의 문제였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마음으로 순종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문제에 빠져서 구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옛 언약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정결하지 않은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속은 더러운데 겉에는 종교적 행위들이 무성하여 깨끗하게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더 깊은 기만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에 속한 신앙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옛 언약에서 유대인들이 이런 문제에 빠져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을 씻는 성도들과 새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새 언약의 경험이 없으면 멸망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시대에 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새 언약의 경험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새 언약의 시대에 살면서 옛 언약의 경험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새 언약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른 채 영적 무기력과 곤고함 속에서 방황하다가 멸망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는 새 언약 시대에 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새 언약 시대에는 예수를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구원받았지만, 신약시대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된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거짓 가르침을 붙잡고 넓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언약의 조건과 내용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요일 2:7)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돌비에 계명을 기록했던 것처럼,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당신의 법을 새겨놓으십니다. 언약의 내용은 같지만 기록하는 장소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새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새 언약 – 하나님의 법이 성도의 마음에 새겨짐

하나님께서 계명을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이 마음과 생각에 기록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사랑하도록 마음과 생각이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이란,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심령이 변화되는 경험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가면 그분의 죽음과 희생과 사랑을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싶다는 거룩한 소원과 충동이 올라오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 잡고 주관하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과 이기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새 언약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인은 비록 육체에 갇혀서 살지만, 육체의 정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나가 새 언약을 맺은 성도들은 육체의 충동을 물리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8-9)

 

우리 마음에 기록되는 계명은 시내산에서 돌비에 기록된 계명과 동일한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계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이 새겨진 장소에 있는 것입니다. 돌비에 새겨진 계명은 우리를 단지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말처럼, 육신의 생각은 …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롬 8:7). 그러나 동일한 계명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변화된 마음에 받아들여져서 새겨지면,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이런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이것이 새 언약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참된 새 언약의 경험

그리스도와 새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본성의 충동을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죄와 유혹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십자가 앞에서 새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바치게 되고, 그런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죄를 이기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육체로부터 더러운 욕망이 올라올 때 새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 하늘 성소의 은혜의 보좌에 올라가 “주여, 죄가 나를 엄습해 옵니다. 저를 살려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죄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육체의 충동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게 되고, 교만과 이기심이 추하게 보이게 됩니다. 죄를 사랑하지만 구원받기 위해서 죄를 버리는 것이 아니며 지옥불이 무서워서 억지로 죄를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가 너무나 추하고 더럽게 보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승리의 경험입니다. 옛 언약의 유대인들은 이런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새 언약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유대인들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는 위선자와 율법주의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옛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멸망당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옛 언약에 대한 오해와 새 언약에 대한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빠져나오지 않으면 참된 구원의 경험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Q & A 지금은 새 언약의 시대이므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데 왜 계명에 묶여서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의 의미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까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말씀을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바울은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씀으로 기록했지만,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하여졌다. 새 언약하에서는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계명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이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심판 아래 있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마치 철봉에 매달려 있는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철봉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에는 힘에 부쳐서 손을 놓고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옛 언약의 신앙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죄에 지치고 상한 심령으로 십자가에 나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새겨지는 새 언약의 경험을 한 성도들은 기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보면서 사는 성도들은 십자가 은혜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가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롬 8:1, 킹제임스역)

3부, 옛 언약이 폐해졌을 때 십계명도 폐해졌나요?

3부에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옛 언약과 십계명을 동일시합니다. 그런 분들은 옛 언약이 폐해지면서 십계명도 함께 폐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이 폐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십계명은 폐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폐해진 것은 십계명이 아니라 옛 언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서 8장 6-13절을 근거로 옛 언약이 폐해질 때 십계명도 폐해졌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그 말씀은 폐해진 것은 십계명이 아니라 옛 언약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증거

“이제 그리스도께서 더 아름다운 직분(하늘 성소의 대제사장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옛 언약)이 무흠하였더면(흠이 없었다면) 둘째 것(새 언약)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 8:6-7)

 

  1. 첫 번째 증거, 더 좋은 약속과 더 좋은 언약을 주신 것이지 계명을 폐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더 좋은”이라는 표현은 구약시대에 세워진 옛 언약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해 줍니다. 그런데 십계명과 옛 언약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십계명이 “옛 언약” 그 자체라면, 십계명 속에서 어떤 빈약하고 좋지 않은 약속들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의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십계명에 기록된 도덕률이 매우 “옳다.”고 말했습니다.

 

“자녀들은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옛 언약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암시했던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는 십계명을 빈약하거나 흠이 있는 언약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 권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8장에 기록된 흠이 있는 옛 언약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두 번째 증거, 옛 언약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계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옛 언약에 대한 오해 중에서 가장 큰 오해는 “옛 언약에 결함이 있었다.”는 말씀에 대한 의미입니다.

 

“저 첫 언약(옛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흠이 없었다면) 둘째 것(새 언약)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 8:7)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옛 언약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이 생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계명과 옛 언약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십계명이 “옛 언약” 그 자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돌비에 기록하신 십계명에서 어떤 결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시편 저자의 말씀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시 19:7)  

 

히브리서에서 옛 언약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던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성경은 “옛 언약에는 흠이 있다.”고 했지만, “십계명은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우며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에 흠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흠이 없는 완전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한 흠이 있는 옛 언약은 십계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세 번째 증거, 낡아지고 없어진 것은 옛 언약이지 십계명이 아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옛 언약)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옛 언약이 폐지되어 없어졌다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말한 옛 언약이 “십계명”을 뜻한다면, 하나님께서 돌비에 새겨서 주신 십계명이 낡아져서 없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에서는 옛 언약은 낡아지고 사라진다고 했던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는 “계명은 폐해질 수 없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8장에서는 옛 언약이 낡아져서 사라졌다.고 했는데, 로마서 3장에서는 계명은 결코 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단순합니다. 문제가 있어서 사라진 것은 옛 언약이고, 결코 폐할 수 없는 것은 십계명이라는 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낡아져서 사라진 옛 언약이 결코 십계명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십계명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

 

새 언약이 더 좋은 약속인 이유

“이제 그리스도께서 더 아름다운 직분(하늘 성소의 대제사장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시내산의 옛 언약에서 약속을 깨뜨린 것은 누구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언약이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8장에서 “옛 언약에 흠이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옛 언약에 있는 “흠”이란 무엇일까요? 백성들의 마음 상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 안에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의 속박에 갇혀서 율법의 종으로 불행하게 살다가 멸망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옛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약속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왜 “순종하겠다.”는 언약을 지킬 수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마음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계명이 너무나 무거운 멍에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순종하겠다.”고 맹세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거룩한 계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에 끌려다니는 참담함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전적으로 세상을 버리기로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상을 받아들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배도에 깊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예수께서 둘째 언약, 즉 새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동일한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깊은 죄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순종하기 원하지만 순종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새 언약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히브리서 8장에서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를 죄로부터 구원해내는 새 언약의 복음입니다.

 

내 법(십계명)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0-12)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율법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이 새 언약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 언약이 “더 좋은 약속”인 이유입니다.

 

Q & A  바울은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다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십자가 이후 새 언약 시대에도 유월절과 같은 절기를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어떤 교회에서는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기 때문에 십계명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오늘날 많은 분들이 이런 혼돈을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두 가지 법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관련된 두 가지 법이 있는데 하나는 십자가에서 폐지되었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서 완전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폐지된 법은 어떤 법이고 완전케 된 법은 어떤 법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모르면 계명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게 됩니다. 지켜야 할 법을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폐지시켜야 할 법을 지키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소 안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38)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한 손에 의해서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 왜 성소 휘장이 찢어졌을까요? <The Life of Jesus>라는 책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는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큰 부르짖음이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나왔을 때 성전에서는 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 서서 희생제물인 어린양을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사장이 희생제물을 죽이려고 칼을 들자 땅이 진동하였다. 제사장은 놀라서 칼을 땅에 떨어뜨렸고 어린양은 도망을 쳤다. 지진과 천둥의 소음 속에서 성전예식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성전 휘장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시간에, 유월절 양이신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신 채 운명하셨다. 드디어 구약시대 동안 동물의 희생제도로 지켜져왔던 표상이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여러 세기를 통해 성전의 봉사가 가리켜온 바로 그 사건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속죄를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표상이 실체와 만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예표하는 모든 의식들은 폐지되어야 했다.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희생제물을 죽이는 칼이 떨어졌으며 어린양이 도망친 것이다.”(The Life of Jesus, 756)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이유와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제사제도의 종말을 알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유대인의 성소에서 행했던 동물의 희생제도가 종말을 고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죽음이 동물의 피를 필요 없게 했을까요?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흘려질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새 언약을 인치셨기 때문에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흘려질 필요가 없게 되었고 제사제도와 관련된 모든 의식법이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지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계명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서 의문의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기록한 말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아서 제거했다는 “의문에 쓴 증서”란 무엇일까요? 의문의 율법이란, 구약시대 모세가 제사제도에 대해서 기록한 법입니다. 의문의 율법은 십계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골로새서 2장 14절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성소와 동물 제사에 대한 의문의 증서와 법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둘로 찢으신 것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

 

바울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육체로 폐한 법을 어떤 법이라고 했습니까?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말씀을 에베소서에서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더 이상 모세가 기록한 제사제도에 대한 율법은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돌비에 직접 기록하신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두루마리에 기록한 의문의 율법입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법입니다.

십계명의 내용과 보관 장소: 십계명은 어떤 내용의 법입니까? 십계명의 첫째부터 넷째 계명은 하나님을 향해서 지켜야 할 법이고 다섯째부터 열째 계명은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돌비에 새겨서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속에 보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의문에 속한 율법의 내용과 보관 장소: 의문에 속한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법입니다. 모세는 절기들과 성소 의식에 관한 의식법을 두루마리에 기록했습니다. 절기에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과 요제절과 나팔절과 같은 절기들이 있으며, 의식법에는 양을 잡는 법과 제사장이 행하는 여러 가지 의식이 있었습니다. 또한 의문의 율법들은 지성소의 법궤 옆에 두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말한 “의문의 증서”와 “의문의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의식법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십계명과 의문에 속한 율법은 전혀 다른 법입니다. 법을 기록한 저자가 다르고, 법을 보관한 장소도 다르며, 법을 기록한 소재도 다르며 내용도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서 폐해졌다고 한 “의문에 쓴 증서”나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제사제도와 절기에 대한 법을 뜻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교회들에서는 지금도 유월절과 같은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왜 그렇게 가르칠까요? 왜냐하면 유대인의 절기가 의문의 율법과 함께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말씀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현대 기독교회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폐해진 것은 모세가 쓴 의문의 율법이지 하나님께서 기록한 십계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계명에는 제사제도나 제사장의 의식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십계명을 폐지시켜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 “제칠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지될 이유가 전혀 없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상관없이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영원토록 지켜야 할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얼마나 분명합니까? 이렇게 성경을 이해해야만 구약과 신약이 분명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계명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속적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끊임없이 십계명을 폐지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은 계명을 구약시대의 죽은 유물 취급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새 언약을 맺은 사람들은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믿음과 은혜는 계명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2부, 옛 언약이 폐지된 이유

시내산에서 맺은 옛 언약은 어떤 언약이었을까요? 주인과 종이 노동과 노력의 대가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언약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열심히 노력해서 계명을 지키면 구원하겠다는 언약입니까? 아닙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어떤 언약이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2)

 

시내산의 옛 언약은 어떤 언약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기로 약속하는 언약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내 아내처럼 돌보겠다.”는 혼인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와 결혼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예, 결혼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옛 언약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혼인언약을 맺었는데, 그 후부터 영원토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혼인관계가 깨어지는 이유

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남편”이 되어주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언약을 깨뜨렸을까요?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 31:32).

결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엄격한 원칙이 포함된 관계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자신이 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하기로 약속해야 합니다. 신랑은 이제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남은 생애를 오직 한 여성을 위해 묶어놓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남편에게 바쳐야 하며, 이전에 사귀어온 남성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기로 서약해야 합니다. 결혼 서약이야말로 가장 좁고 협착한 길을 걷기로 맹세하는 서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전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을 하면 인생이 불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혼처럼 비참하고 불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결혼하는 신랑 신부를 보면서 불행한 결정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자신의 생애를 신랑에게 바치기로 서약할 때 왜 그토록 빛나고 행복하게 보일까요? 신랑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에 가장 까다롭고 엄격한 원칙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왜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함께 수많은 규칙과 법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들은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결혼에 관한 법과 규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까다롭고 엄격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간음을 하면 국가의 법에 의해서 체포되어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런 법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엄격한 법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멍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랑과 신부 모두 그들 마음에 법을 범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간음에 대한 법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형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행복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 전체를 바치는 것, 그것이 아내의 사랑입니다. 구약시대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5,6).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신랑 신부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결혼했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입니다. 그런 결혼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랑이 깨지는 순간, 그들은 자신을 묶고 있는 규칙과 법에 대해서 불평을 시작합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순간부터 그런 부부는 결국에는 서약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은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결혼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계명과 진리를 무거운 멍에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길과 계명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으면 “설교가 너무 삭막하고 사랑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한 경험이 없으면 진리와 성경이 말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지만, 지옥불이 무서워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신앙을 하게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원칙과 교리들이 이곳저곳에 쌓여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한 계명과 거절하기로 선택한 말씀이 마음속에 쌓여서 먼지가 덮혀 있을 때, 영혼은 힘을 잃고 죽어가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어디까지 들어가야 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원칙을 온 마음을 다해서 받아들이는 지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좁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관계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이런 관계를 맺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은 이상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천둥과 벼락을 맞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고,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영접하며, 지옥불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말과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과 감사를 느낄 수 없습니다.

 

옛 언약이 깨어진 이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옛 언약은 혼인하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옛 언약이 깨지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입으로는 순종하겠다.고 했지만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예배드렸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분노해서 십계명 돌비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렸습니다.

 

“(모세가)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십계명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 32:19)

 

모세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십계명 돌비를 던진 것은 이스라엘의 배도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비를 던져서 깨뜨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십계명 돌비가 깨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파기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서 언약을 깨뜨리자 하나님께서는 그 배도에 참여한 3천 명을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불순종으로 언약을 깨진다는 것은 곧 멸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불과 두 달 전만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금송아지를 세우고 예배드릴수 있을까요? 기적과 능력으로 구원받았을 때는 기쁘고 감격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심령 속에 새겨지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을 순종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을 고집하고 계명을 외면하면 언약이 깨어지고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이스라엘) 백성으로 즐거이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 105:43-4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을 지키게 하려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계명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구원은 은혜로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애굽의 죄에서 해방시키신 이유는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까요? 죄를 마음대로 범하라고 용서해 주시나요? 옛 생애로 돌아가서 마음대로 살라고 용서해 주시나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이렇게 타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을 맺고 구원받은 자들은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이상한 교리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계명을 범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구원받았다.는 거짓 평안과 거짓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언약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언약이 아니라 마음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다 준행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하나님과 옛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대답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겠다.”는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왜 옛 언약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계명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가 다 준행하겠나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순종하려고 하다가 율법주의에 빠졌으며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는 백성들의 태도와 마음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대신에 우리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사랑과 욕심과 이기심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불가능한 약속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눈에 보이는 행위로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마음의 생각과 동기까지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하고 교만한 마음으로는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마음과 심령의 변화를 받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명령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알코올 중독자를 절제하는 자로 변화시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속이는 자를 정직한 자로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훔치는 자를 이웃에게 봉사하는 자로 변화시키고 악한 자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복음은 마음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동기까지 순결하게 변화시켜 주는데, 이것이 구원의 경험이고 거듭나는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깊이 젖은 성도들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마음속에 감사와 충성이 새겨진 사람들만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 마음속에 감사와 충성이 새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열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동풍으로 바닥을 말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서 홍해를 건널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해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이 새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불평하면서 광야 길을 걸어갔습니다. 바로 그것이 옛 언약의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십계명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옛 언약의 문제는 언약을 맺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시내산에서 맺은 옛 언약이 깨어지고 폐해진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내산에서 맺은 옛 언약이 무슨 문제 때문에 폐지되었습니까? 너희가 순종하면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문제가 있습니까? 우상을 섬기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순종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지만, 신부가 간직해야 할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해 보셨나요?

  1. 언약의 조건

많은 사람들이 옛 언약에서는 순종해야만 구원받고,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에서 언약의 조건은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언약을 이루시는 원동력이 인간의 노력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1. 언약이 맺어진 방법

두 언약 모두 피로서 맺어졌다: 언약에는 반드시 그것을 맺는 의식이 치러집니다. 옛 언약에서는 수소의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4-8)

 

옛 언약은 수소의 피로 맺어졌는데, 새 언약은 누구의 피로 맺어졌을까요?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 아들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1. 언약의 기초

옛 언약은 인간의 약속 위에 세워짐: “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6-8).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옛 언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한목소리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다 행하리이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옛 언약의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은 인간의 빈약한 약속으로 맺어졌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짐: 새 언약은 인간의 약속 대신에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졌습니다.

 

“양의 큰 목자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 13:20-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 자기 뜻을 우리 속에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여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새 언약하에서는 우리의 노력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순종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옛 언약에서는 인간의 노력과 결심으로 순종하려고 하다가 실패했지만,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놀라운 역사를 해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생긴 거룩한 소원과 충동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하게 되는데, 이것이 새 언약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의를 이루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에게 새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받는 그리스도인에게 새 언약이 이루어지고 순종하는 생애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새겨지는 장소

옛 언약에서는 돌비에 기록하심: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신 4:13)

새 언약에서는 마음에 기록하심: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한 다음의 도표를 보면, 두 언약의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1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주신 이유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까지 들어가는 여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여행을 왜 자세히 기록했을까요? 왜냐하면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까지 가는 그들의 여행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늘까지 가는 여행길을 보여주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수백 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죄에 깊이 빠져 있었고 거룩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공로와 행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명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관심을 가지셨더라”(출 2:23-25)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셨습니까? 애굽에서 재미있게 살면서 만족하는 사람을 구원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노예생활과 고역으로 인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일방적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부르짖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구원받을 자격이 없었고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면, 죄의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탕감하기 위해서는 피가 흘려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부터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유월절에 짐승의 피를 대문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유월절 양을 죽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양의 피를 각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했습니다. 왜 피를 각 집에 발라야 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가 각 영혼에게 적용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믿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나를 위해서 피 흘리고 죽은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와 감격이 올라오게 되고,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넌 홍해

유월절에 짐승의 피가 흘려진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로 인도하셨고 그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고전 10:1-2)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양의 피로 구원받고 홍해를 건너면서 침례를 받았을 때 그들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더 이상 애굽의 종살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태어난 후부터 그때까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되었으니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출애굽기 15장에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의 찬양이 나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출 15:2-6)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거기서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전히 걸어가야 할 광야가 있었습니다.

왜 광야에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 주변에 살던 가나안족의 풍요로움과 재물을 부러워했고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광야 길을 불평하면서 따라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광야를 지나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어야 했습니다. 단 하루도 만나가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광야를 무사히 통과해서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의 만나를 먹어야만 영적 생명을 유지하면서 뜨거운 광야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두 단계의 구원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 구원은 애굽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면서 침례를 받는 구원의 경험입니다. 둘째는 광야를 지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구원의 경험입니다. 애굽를 떠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최종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에서 빠져나와 교회 와서 침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구원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예수의 피로 구원받고 침례를 받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분들은 이제 기나긴 광야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마치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게 되었을까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당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사람들은 광야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그러나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을 엄숙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5-6)

 

십계명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계명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제 율법을 주셨습니까? 광야에서 주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부터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준비 과정입니다. 애굽에 살 때는 계명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었지만,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부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계명을 지키면서 가나안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부터는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옛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언약의 조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3-6)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공로와 노력으로 애굽을 탈출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와 언약을 맺자. 언약의 조건은 너희는 나의 말을 잘 듣고 지켜라이다. 이 언약의 조건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조건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조건하에서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가서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하자 백성들이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백성의 대답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출 19:7-8)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언약이 맺어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가진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로 언약을 맺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옛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뜻합니다. 그런데 옛 언약은 십자가에서 새 언약이 세워지면서 폐지되었습니다. 왜 폐지되었을까요? 2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서론, 교회를 뒤덮고 있는 언약에 대한 오해

오늘날 기독교회는 언약과 계명에 대하여 큰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만난 그리스도인도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십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십니까? 지금은 새 언약의 시대인데 왜 우리를 구약시대의 옛 언약으로 끌고 가십니까? 십계명은 옛 언약에 속한 것이고 옛 언약은 십자가에서 폐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계명에 구속받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성경이라는 저울 위에 달아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계명과 언약에 대한 오해야말로 기독교회를 세속화시킨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국가법이 폐해졌거나 불필요하다는 사상이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 어떻게 될까요? 온 나라가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동네와 도시에 온갖 범죄와 부도덕함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인 계명을 경시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교회 안에는 부도덕과 세속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명에 얽매이거나 순종하지 않아도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기독교회를 뒤덮으면서 기독교인의 삶이 죄와 불순종으로 부패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면서 살아도 구원이 정말 유지될 수 있을까요?

 

언약이란 무엇인가?

언약은 히브리어로 “berith(베리트)”이고 영어로는 “covenant(커버넌트)”인데 그 의미는 “계약”입니다. 집과 자동차를 살 때도 계약을 하고 대통령이 취임할 때도 국민과 계약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대통령은 “법대로 집행”할 것을 약속해야만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백성은 “국가의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해야만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언약은 서로의 약속과 맹세에 기초한 상호 간의 합의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고, 어떤 경우에는 국가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언약이 맺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조건은 언제나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폐지되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리고 불순종했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과 인류의 조상(아담과 하와) 사이에 언약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으로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그 결과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기초하여 성도들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마음은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고 그 결과 구원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조건

하나님께서 사람과 구원의 언약(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들만 구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새 언약을 주셨으므로 한번 거듭나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의 언약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라오는 사람들이 주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예수께서는 구원의 언약에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이처럼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구원의 계약에 분명한 조건들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십자가를 진 “공로”와 좁은 길을 걸은 “수고”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십자가의 은혜와 공로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랑을 본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에 압도되어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면서 좁은 길을 걷고 싶은 거룩한 충동을 날마다 느끼면서 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변화를 “열매”라고 부르셨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에는 “열매”라는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한번 맺은 언약은 결코 깨질 수 없는가?

하나님과 한번 언약을 맺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을까요?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서 맺는 계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상호 간의 약속입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이라는 계약을 할 때 그들은 서로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 신부는 결혼식장에서 죽을 때까지 서로에 대해서 충성과 헌신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했어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충성과 헌신이라는 약속을 저버리면 결혼관계가 깨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을 맺었어도 계속해서 불순종과 죄의 길을 걸으면 언약은 깨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을 불쌍히 여기지만, 인간 스스로 언약을 깼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과 죄를 고집하여 언약을 저버린 사람을 강제로, 억지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떠나가는 아들을 억지로 붙잡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다만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이 한번 하나님과 구원의 언약을 맺으면 결코 깨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에덴동산의 언약은 세상 끝까지 유지되는 구원의 원칙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주 안에서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야만 구원의 언약이 유지되고 생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영역 밖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찬송을 부른다고 할지라도, 뜨거운 난로를 손으로 잡으면 크게 화상을 입습니다. 우리 스스로 독약을 마시면서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구원의 언약에도 그것을 유지시키는 분명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순종”입니다.

 

언약에 대한 심각한 오해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언약에 대한 정반대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있는 두 가지 가르침은 크게 충돌하고 있는데 특별히 계명을 중심으로 충돌합니다.

 

주장 A : “우리는 새 언약 시대에 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새 언약 시대에는 예수를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주장 B : “새 언약 시대에는 정말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까? 그렇다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범해도 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까? 새 언약 시대에는 마음대로 계명을 범하면서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주장 A :  “구약시대는 계명으로 구원받았지만, 신약시대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된 것입니다.”

 

주장 B : “구약시대는 계명으로 구원받고, 신약시대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면, 천국은 계명을 열심히 지켜서 구원받은 사람들과 은혜로 거저 구원받은 사람들로 나눠진다는 말입니까? 구약시대는 계명을 범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신약시대에는 계명을 마음대로 범하면서 살아도 구원받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다른 기준을 갖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나요?”

 

주장 A :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주장 B : “그렇다면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간음을 해도 되고 거짓말하면서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가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온갖 죄를 범하면서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말인가요?”

 

기찻길처럼 나란히 가는 두 개의 주장 중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분명한 사실은 한 가르침은 우리를 “순종의 자녀”로 이끌어가고 다른 가르침은 “불순종의 자녀”로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죄와 불순종으로 물든 삶을 살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고 굳게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약에 대한 진리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모르면 기독교 안에 있는 수많은 거짓 가르침과 복음의 혼돈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언약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써 참된 구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27호를 시작하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진 이후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을 통해서 구원받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기독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 전혀 다른 대답들이 나오게 됩니다. “새 언약으로 구원받은 사람들도 계명을 지켜야 할까요? 그리스도와 새 언약을 맺으면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에 구속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도 될까요?” 독자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언약을 맺은 후에는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날 기독교회는 앞을 다투어 교인들에게 구원받은 확신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받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다니는 것과 종교적 행위를 제외하면 신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말씀을 파고 드는 열정이 없고 영혼의 고뇌와 죄에 대한 탄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복음으로 인생 전체가 뒤바뀌는 경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회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거짓 가르침이 기독교회를 참된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통해서 내 삶을 인도하시고 교훈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구원과 언약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옛 언약은 무엇이고 새 언약은 무엇입니까? 옛 언약은 왜 폐지되었고 새 언약은 왜 세워졌습니까? 새 언약의 경험이란 어떤 것일까요? 구원의 참된 경험이 무엇인지를 찾는 성도들은 이번 호에서 놀랍고 분명한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