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을 경고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는 마지막 시대 교회에 무슨 문제가 생기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 디모데전서 4장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경고입니까? 사도 요한 역시 동일한 경고를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게 주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귀신의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마지막 시대 교회에 대한 경고가 우리 마음속에 분명하게 각인되어야만 디모데전서 4장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됩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마지막 시대 교인들의 양심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나타나게 되는 두 가지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양심이 화인맞는 것”과 “외식으로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시대에는 미혹케 하는 영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귀신의 가르침을 전할 것인데,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양심이 마비될 것이고 위선과 자기기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일어나게 될까요? 마지막 시대에 다음과 같은 복음과 가르침이 기독교회를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범하는 삶을 살아도 구원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열매가 없어도 구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이런 복음과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양심은 마비되고 짐승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해도 두렵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며,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전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거짓 목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도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해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속은 시커먼 암흑 속에 있는데 겉은 구원을 찬양하는 외식을 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거짓 은사와 이적으로 미혹함으로써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뜨립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를 받아들인 교인들의 양심이 마비되고 위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doctrine, 교리)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6)
바울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미혹하는 영들이 온갖 거짓 복음을 교회 안에 들여와서 교인들의 양심을 파괴하고 신앙을 무너뜨릴 때, 교인들을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교리)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는 참된 믿음과 성서적 교리로 성도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에는 날이 분명하게 서 있는 말씀으로 교인들의 이기심과 교만을 무너뜨리고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종들이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종입니다. 이 시대에는 참된 복음과 정확한 교리로 성도들에게 중생의 경험을 가르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종들만이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로는 거짓 복음에 붙잡힌 사람을 진리로 양육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령께서 사람의 고집과 이기심을 꺾고 순종으로 인도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해결책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딤전 4:7)
사도 바울은 미혹하는 영들이 퍼트리고 있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 같은 말씀을 버리라고 호소합니다. 오늘날 서점에 나와 있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는 심리학”이나 “교회를 성장시키는 다섯 가지 비결” 같은 이론들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입니다. 인간의 수단에 매달릴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의 한구석에 있는 말씀을 마치 가장 중요한 진리처럼 떠받드는 태도, 성경 전체의 흐름을 무시하는 성경 해석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넓을 길을 걸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가르침들, 이런 것들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직 유치한 수준의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이 “교회 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일수록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관심을 나타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바울은 오직 “경건에 이르는 연습”에 집중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까? 정말 부흥과 개혁을 갈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훈련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당하지 않으려고 경건을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에 연습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생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 3:2).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기록된 사람들,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새겨진 사람들은 “뭇사람”을 위해서 경건의 연습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연습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물론,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다가 율법적 신앙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을 강조하고 깊이 파고 들어가다가 자기 의에 빠져서 영적 교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될까요? 자신을 위해서 경건을 연습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쌓아서 구원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경건을 연습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경건의 연습에 매진하면 바리새인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거룩함을 버린 현대 기독교회는 “빗나간 경건의 연습”을 지적하면서 훈련과 노력을 율법적 신앙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하는 연습하다가 부상을 입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한 연습을 통해서 강인한 체력을 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온 마음과 생애로 붙잡고 있는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투쟁을 깊이 이해한 성도일수록 경건에 이르는 훈련과 연습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악하고 교활한 존재와 싸우고 있습니다! 사탄은 매우 치밀한 전략을 세워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전쟁은 믿기만 하면 저절로 승리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연습하십시오. 날마다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는 훈련을 하십시오. 창세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해서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법을 연습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언제 잠을 자고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정하고 연습하십시오. 과식을 피하고 자극적인 식품을 삼가하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생에서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놀라운 사역을 했던 사람들은 대개 노력과 훈련으로 다져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생애를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어떤 노력을 했으며 무슨 수고를 했는가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택하셔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경건을 위해서 노력하고 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 쾌락을 포기하고 희생해야만 가능한 훈련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면 희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서 죽음도 불사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면 가난해지기도 하고 외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현대 기독교회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우리의 영생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베드로는 나그네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했습니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경건한 삶을 산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은 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게 될까요? 왜냐하면 나그네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가는 나그네는 이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경건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가 마쳐지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사람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경건의 연습을 하면서 나그네로 살았던 성도들은 온 우주에서 높임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말뚝을 깊이 박고 경건의 연습을 무시한 채 살았던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에 끌려다니다가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딤전 4:10)
그리스도인이 온 마음을 다해서 “수고하고 진력하는” 이유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망한 이 세상을 위해서 인생이 소모되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우리가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힘과 근육이 있을 때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영혼 구원에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합니다. 영화나 유행가나 패션 같은 것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힘과 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늘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1,15)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고 빨아들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과 생애로 빨아들이십시오. 불로 연단된 믿음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진정으로 얻기 원하는 사람은 경건의 연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명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 생각 없이 복음을 전달하는 배달꾼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누구보다도 깊이 회개하고 경건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에 사로잡혀서 복음을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육적인 교인들의 콧물을 닦아 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공부방에 들어가서 말씀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 속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진지하게 듣게 될 것입니다. 목사는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신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바르게 선포함으로써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을 흔들고 굴복시킬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마음과 생애를 집중할 수 있도록 짐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바로잡고 꾸짖고 경고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알려 주시고 죄를 책망해 주십시오.”
맺는 말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되돌아보고 확인했던 것이 언제입니까?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지 살펴본 것이 언제입니까? 참된 개심과 중생의 경험을 연구하고 사람들과 토론할 때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까? 최고의 경건에 도달했던 사람도 믿음에서 떠나 죄의 길을 걸어가면, 그 사람의 신앙과 생애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한 번 구원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종으로 끌려다니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 바울도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 중 누구도 하늘 진주 문을 들어갈 때까지 “나는 구원받았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상하는 성도마다 예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부흥과 개혁의 길을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