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영혼의 평안을 갖는 첫 번째 비결은 “빚진 자의 심령”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빚진 자이기 때문에 육체의 욕망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빚을 졌기 때문에 육신에게 져서 육신이 끄는 대로 따라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빚을 졌을까요? 하나님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빚을 얼마나 졌습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늘의 왕께서 하늘을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와서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더럽고 먼지 나는 유대 땅에서 낮고 낮은 사람으로 살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렸는데, 아무도 그분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끝까지 죽음의 길을 홀로 걸으셨고 십자가에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외로운 삶과 피가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희망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가 지옥 불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롬 8:12). 이 말씀은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졌는데 어떻게 성령의 음성에 등을 돌릴 수 있는가!”라는 도전입니다. 빚진 자이기 때문에 양심에서 들려오는 의의 음성을 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고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생애 속에서 여러 번 성령의 음성을 거절했지만, 내가 빚진 자의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만큼은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호소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빚진 자와 탕자
빚진 자의 심령이란 돌아온 탕자의 심령을 말합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내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유산을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얼마 후,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준 귀한 유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평생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는 죄를 범했지만, 너무나 삶이 힘들고 고달파서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눅 15:17).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다음과 같은 회개와 고백을 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탕자는 자신을 다시 아들로 받아 주시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저를 받아 주시고 먹여 주시고 재워 주시는 것만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집의 종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께 빚진 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내가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라고 자랑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주신 새 옷과 금가락지를 뽐내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아들이 되었고 다시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을 종으로 낮추었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왜 그런 태도와 모습이 나왔을까요? 왜냐하면 죄를 탕감받으면, 죄만 탕감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은 자의 마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마음이 빚진 자의 심령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이 “주께서 원하시면 제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는 심령으로 변화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정말 우리가 빚진 자의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입니다. 여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빚진 자의 심령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억지로 순종하려고 애쓰다가 쓰러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냉랭하고 형식적인 신앙을 갖게 되며, 늘 정죄와 가책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삶이 너무 메마르고 힘들기 때문에 결국에는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받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죄를 붙잡고 있고 세상을 사랑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하나님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심령 없이 신앙을 하면 사탄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죄를 탕감받은 만큼 살아가게 됩니다. 탕감받은 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탕감받은 만큼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 7:42~43).
거짓 평안이 생기는 이유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씀은 빚진 자의 심령 속에서만 가능한 경험입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7). 복음은 단순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과 생애에는 의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예수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복음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는 가르침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와 이기심을 합리화시키면서 거짓 평안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말하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의의 열매가 맺힌다.”는 진리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3~16)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예수께서 오신 이유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선언하였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마귀의 일”이 무엇인가요? 우리를 유혹하고 죄에 끌려다니게 해서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참된 영혼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의미하고 생명이 없는 것으로 변질됩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누구든지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희생을 깊이 바라보면 성령을 통해서 빚진 자의 심령이 마음과 생각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게 되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르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가나니”(롬 8:1, 킹제임스 성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