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축복이 될 수 있고 가장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롭다는 사실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고 참된 중생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공의로 심판을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때 그 결과는 두려운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이런 멘트와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에 대한 설교는 오래전에 유행하던 설교인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습니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는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성경 말씀과 부딪히고 말씀의 본질을 뒤집어 놓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하나님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포장하는 설교자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만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실 뿐 아니라 미워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이런 문구가 잘 팔리는 크리스천 티셔츠 뒷면에 써 있지만, 이런 표현을 잘못 이해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고 고집하며, 죄를 붙잡고 있는 죄인을 미워하실 뿐 아니라 멸하십니다.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시 5:5).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사람을 불쌍히 보십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으시며 죄가 없는 것처럼 감추거나 심판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한쪽 면만 보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펼치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을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의 말씀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롭지만 진노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쪽 면만 보도록 인도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번은 어떤 목사님이 주말 부흥회에서 죄를 경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을 설교했더니 교인 몇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강조했는데 왜 어제는 사랑만 설교하냐고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보여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사랑만 보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죄를 덮은 채 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순종과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아는 유능한(?) 설교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나눠 주어서 교회를 키워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설교자들의 마케팅을 따라가면 복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뜨거운 반응을 나타낼까요?

칠흙같이 캄캄한 밤하늘에서는 별이 빛나지만, 대낮에는 태양의 빛 때문에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밝은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하면 복음을 볼 수 없습니다. 칠흙같이 캄캄한 죄인의 형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것인지 볼 수 있고 참된 가치를 알게 됩니다. 죄인을 칠흙같이 캄캄한 구덩이에 빠뜨려야만, 교만하고 목이 곧은 죄인이 하나님께 굴복하고 죄를 자복하며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드리도록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파서 죄인을 무덤 속에 깊이 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인의 상황이 얼마나 캄캄하고 절망적이며 처절한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를 말해 주어야만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며 온 마음을 다해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길에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나눠 주면 귀찮게 여기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게 열쇠를 보여 주면서 탈출하는 길을 가르쳐 주면, 온 마음을 다해서 열쇠를 받고 엄청난 기쁨과 에너지로 감옥의 문을 열고 뛰쳐나갑니다.

죄인에게 죄를 말해 주지 않는 것은 죽어 가는 암 환자에게 암 덩어리를 말해 주지 않는 의사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수치와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알아야만 십자가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과 헌신은 정통 교파에 속해야 나오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표준에 도달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비참하고 참담한 구덩이에 빠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의 참담함을 치워 버리면 복음의 영광스러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왜 마약 중독자, 창녀 또는 살인자와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향한 열성적인 사랑과 충성을 불태울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시궁창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창녀 굴을 빠져나왔고 죽음보다 무서운 마약을 끊었으며 살인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들은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을 때 심장이 터져 버렸고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공로를 쌓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올라온 감격스런 사랑과 충성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삭개오처럼 경건치 않은 사람에게 특별한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막달라 마리아처럼 경건치 않은 여인에게 특별한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38).

 

하나님께서 분노하는 이유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진리를 싫어합니다. 인간의 설교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달라지지만 진리는 사람들의 선호도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도착증 환자가 6명의 어린아이들을 성폭행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농담하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그 사람을 “사람취급”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당신 정말 역겨운 사람이군. 어떻게 그런 기사를 읽으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날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와 악을 보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한 것을 사랑하게 되면 거룩하지 않는 것들을 보면서 분노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죄에 대한 분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죄를 죄라고 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것들 중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분노하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분노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은혜를 거두시고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죄를 사랑하는 사람,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 거룩한 것에 관심이 없던 사람은 어린양의 진노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 산과 바위에 숨어서 두려움으로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사랑스럽게 보셨을까요? 날마다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의 타협과 교만과 비웃음과 무시와 거룩하지 않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무관심하게 내려다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말마다 목사들이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진리를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깎아내리는 설교를 들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 안에 들어 온 죄와 배도에 대해서 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점잖은 장로와 집사들을 하나님께서 어떤 눈으로 보실까요?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오늘날 “나는 분노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가르치지 않고 설교하지 않는 목회자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분노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모두 미워하시며”(시 5:5, 킹제임스성경). 얼마 전에 한 여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분노하실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추론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거룩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기로 골라 놓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이어지는 3부에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