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급격하게 사라진 말씀은 “거룩함”에대한 강조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의 공백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현대 기독교회는 거룩함에 대한 말씀을 미워합니다. 물론, “거룩함”에 대한 설교를 이렇게 하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함”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규정하기 시작하면 교회에서 용의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성경은 거룩함을 구원과 연결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거룩함을 설교하면 “행위 신앙, 율법적 신앙”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거룩함을 오해하고 잘못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을 행위 신앙과 율법적 신앙으로 이끌어 가지만, 거룩함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시작됩니다. 거룩함은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와 중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령께서 어떤 사람을 개심시키고 거듭남의 경험 속으로 인도하시면, 영적 경험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새롭게 거듭난 영혼에게 계속해서 더 밝은 빛을 주시고 더 깊은 경험으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은 한번 시작한 일을 끝마치실 때까지 하늘의 역사를 멈추지 않습니다.
“너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하나님을 믿지만 거룩함이 없는 이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거룩함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성령께서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역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성령께서 마음과 생애 속에 역사하지 못하게 될까요?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서 “이 길이 정로니 이리로 가라”고 해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께서 더 밝은 빛으로 인도하셔도 빛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무시하고 성령의 호소를 거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왜 빛을 거절하게 될까요? 사도 요한은 그들이 빛과 조화될 수 없는 악인의 마음과 행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21).
마음을 지배하면 몸을 지배하게 된다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마음은 피나 근육이 아니지만 그것은 몸과 분리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면 몸까지 지배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몸”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바울은 왜 몸을 바치라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몸도 바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친 성도가 몸을 바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아니라 몸까지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을 바친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고 찾는 것입니다. 왜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까요?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것을 우리 몸과 생애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청교도 신앙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고, 어떤 것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혀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고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던 것이 청교도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신앙이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신앙이라고 믿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는 절제가 포함된다
물론, 거룩함은 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거룩함은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거룩함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회는 “성령은 내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외적인 표현과 행함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해도 그리스도인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상과 구별되는 “절제의 선”이 그어져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정욕과 욕심을 못 박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절제”라는 열매가 맺혀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성령의 열매는 따로따로 맺어지는 열매들이 아닙니다. 하나의 오렌지 안에 여러 개의 알갱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도 사랑부터 절제까지 모든 것이 섞여서 균형을 이룬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자비와 온유는 있는데 절제에는 관심이 없다면,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참된 절제란 “해로운 모든 것을 제거하고, 유익한 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를 강력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용하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명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절제와 승리
절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상은 분명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올림픽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선수들은 엄격한 절제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 올림픽에서 사탄과 투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에” 절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올림픽에서 승리하기 원하는 선수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절제와 훈련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100미터 달리기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서 온 생애를 바칩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승리하는 생애를 위해서 깊은 헌신과 집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은 유럽에서 최고이며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 중의 한 사람인 나이 많은 연주자가 자신의 마지막 연주회를 했습니다. 연주를 마치자 깊은 감동을 받은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처럼 훌륭한 연주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이 많은 연주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은이여, 지금의 연주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네. 지금의 나처럼 연주하기 위해서 나는 생애 전체를 바쳤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정말 경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정말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삶 속에 세상과 구별되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각종 집회에 가서 찬양하고 목이 쉬도록 통성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조용한 광야를 찾아가십시오. 광야에 홀로 있으면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일주일 동안 금식하면서 말씀을 살펴보고 명상하면서 오직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속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핸드폰과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속에는 세상과 분리되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