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가나안 성도’는 계시록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다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아십니까? 사도 요한은 계시를 통해서 마지막 시대에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의 대이동이 있을 것을 봤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2~4)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하셨는데, 어디서 나오라는 것입니까? 바벨론이 된 교회에서 나오라는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면서 예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이 된 교회들을 떠나는 일이 나타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지난 몇 해 전부터 세계적으로 기독교회에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설교에 대한 실망과 부패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바벨론이 된 교회에서 나오라고 하실까요? 바벨론을 떠나지 않으면 7재앙을 받고 멸망 당하기 때문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4절)

성도 여러분, 지금은 말씀의 기근이 든 교회를 떠나야 할 때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교회에 말씀이 없으면 떠나야 합니다. 거짓 복음으로 채워진 교회, 가라지들의 뜻대로 흘러가는 교회, 이런 교회에서는 떠나야 합니다.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사도 요한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가나안 성도’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자의 남은 자손”에게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연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기독교회 안에 아무리 가라지가 많아도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자의 남은 자손”을 만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롬 9:27~28)

성도 여러분, 믿는 자들이 바다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래전에 카터 콜론(Carter Conlon) 목사님이 바벨론이 된 기독교회를 보면서 깊은 탄식과 함께 경고의 설교를 전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그 목사님의 설교를 본시면, 교회를 떠나가는 ‘가나안 성도’의 아픔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모든 것을 바치신 하나님을 위해 우리 인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목숨을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교회 다니는 분들 많은 교인들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애지중지하면서 붙들고 있는 죄를 내려놓고 도망쳐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서, 사력을 다해서 도망쳐야 합니다. 무너져 내리는 건축자재에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도망치듯이 교회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러분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의 충돌이나 예수를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목숨과 가족의 생사가 달린 문제입니다

나는 뉴욕 쌍둥이 건물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고 무너질 현장에 있었던 뉴욕 경찰관들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경찰관과 소방수들은 불타는 건물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피해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살려면 빨리 달리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경찰관과 소방수들은 목숨이 걸린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뉴욕의 쌍둥이 건물을 향해서 가면 자신들이 죽을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그곳을 향하여 질주했습니다. 무거운 소방장비와 안전장비를 어깨에 메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사명감 때문에 그렇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교회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경찰관과 소방관의 사명보다 못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사명감이 불타는 건물을 향하여 뛰어가는 그들의 사명감보다 부족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뛰어드는 소방관들보다, 저희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갖는 사명감이 부족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여러분은 교회에 다니십니까? 좋은 설교를 듣고 좋은 교제를 나누면서 만족하기 위해서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교회를 다녀야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모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사명이 뉴욕의 소방관들보다 못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에 의해서 말씀이 거침없이 짓밟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묻은 깃발을 높이 들고 사람들 앞에 나가 살기 위해 도망치라고 외쳐야 합니다

성공과 번영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와 복음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거룩한 열매가 맺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교회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마지막은 영생이라”( 6:2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단지 교회 성장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들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자아를 계발하면 구원받을 것처럼 말하는 복음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믿기만 하면 순종의 열매가 없어도 구원받을 것처럼 말하는 설교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이 영광을 받는 교회들로부터 도망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높은 권위를 주지 않는 교회들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진리가 없고, 십자가의 피가 없는 교회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그들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라는 결정적인 호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붙잡고 회개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부정한 교회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마지막 시대에 교회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한다는 요한계시록의 경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18:2~4)

죄를 붙잡고 있어도 편안한 교회들로부터 도망쳐 나오십시오. 하나님의 집에 와서 죄를 품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게 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교회는 더럽고 가증한 악령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자신의 입지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를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 이익과 명예를 얻으려고교회 놀이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 생명의 말씀이 없어서 당신의 영혼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다면 도망치십시오. 그리스도의 묻은 복음을 단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심리학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십시오. 믿음의 열매인 행함과 순종을 강조하지 않는 교회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성도 여러분,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죄를 붙잡고 있어도 구원받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교회로부터 도망치십시오.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상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 말하는 교회들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진리를 붙잡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도망치는 성도들만이 살아남게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도 제 귀에는 그 목사님이 ‘도망치라’고 호소하는 처절한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백성이 말씀의 기갈이 들려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주여, ‘가나안 성도’를 보호해 주시옵소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말씀으로 인도해주시고, 진리를 보게 해주시옵소서. 그들이 무엇을 붙잡아야 살고, 어떤 복음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가나안 성도’들이 마지막 여자의 남은 자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번 호를 통해서 성령께서 듣는 자들의 눈에 안약을 발라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주께서 인도하는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4부, ‘가나안 성도’는 교회가 가라지 중심으로 돌아가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가라지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께서는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 교인이 있다고 말씀하면서, 가라지는 세상 끝에 불로 멸망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세상 끝)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지옥 형벌) 곡식은 모아 내 곳간(하늘 곳간, 천국)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물론, 교회 안에는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회는 알곡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가라지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 지금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곡을 키우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에 충성하는 성도들을 양육하기 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알곡을 보호하고, 알곡이 성장할 수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비록 가라지 교인일지라도 알곡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요? 곧바른 말씀과 회개시키는 복음이 전파되어야만 가라지 교인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가라지인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가라지가 듣기 원하는 설교를 해주고, 가라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가라지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라지가 좋아할 만한 교회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교회 안에서 알곡들이 외롭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가라지들이 거룩한 말씀 때문에 성령의 책망을 듣고 힘들어해야 하는데, 오히려 알곡들이 교회에 대한 깊은 실망과 좌절을 품고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들이 지금 말씀의 기갈 때문에 인터넷과 유튜브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숨막힘’입니다. 숨막힘, 교회에서 숨이 막혀서, 영적인 호흡을 할 수 없어서, 살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데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경험 말입니다.

이번 호는 교회 안에서 말씀과 예배 분위기에 대한 절망감을 느껴서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에 대해 깊은 동정과 연민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생명의 말씀을 찾지 못해서 고민에 빠져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을 불쌍히 보실 것입니다. 교회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교회가 세속화되면 될수록,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

예수께서는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마 13:30)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교회 안에 진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 안에 가라지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잘 때 원수(사탄)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가라지를 뿌린 자는 사탄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왜 교회 안에 가라지(거짓 그리스도인)를 뿌려놓았을까요? 왜냐하면 알곡이 자라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서 알곡이 풍성하게 자라면 사탄은 큰일 납니다. 왜 큰일 날까요? 왜냐하면 사탄과 대적해서 싸우는 성도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속이 꽉 들어찬 알곡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양육되면, 교회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탄과 싸우게 되기 때문에 교회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가라지를 뿌려놓은 것입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 수많은 가라지를 뿌려놓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곡을 뿌려놓아 진리를 지키고 말씀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전쟁이 지금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가라지가 교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십만 명의 성도들이 영혼의 숨을 쉬지 못해 고민하며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록 12장에 놀라운 예언을 주셨는데, 그것은 마지막 때가 되면 사탄과 싸우는 특별한 성도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는 사도 요한이 마지막 시대의 알곡으로 표현한 이 무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독자 여러분, 이 예언은 지금 이 시대에 성취되고 있는 예언입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이 예언을 성취시키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성도들을 ‘신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용-사탄은 교회(여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기독교회에 있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 누구입니까?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알곡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12:17)

마지막 시대에는 기독교회 안에서 용(사탄)과 싸우는 백성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여자의 남은 자손”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남은 자손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증거를 가진 것, 사도 요한은 이것을 마지막 시대 알곡의 특징으로 지목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사탄은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공격할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사탄은 모든 노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강조하면 율법주의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계명은 십자가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이제는 십계명에서 해방되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날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으면, 우상을 섬겨도 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며 간음해도 될까요? 몇 해 전 어떤 목사는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 이상 도덕률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천 명을 죽여도 이미 구원이 확정된 사람은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교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를 정말 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에 굴복해 더욱더 간절한 심령으로 주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여자의 남은 자손은 계명을 지키는 공로로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을 부르시고 모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로 짐승의 표 환난 때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용과 싸우는 성도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4:11~12)

하나님께서는 지금 짐승의 표 환난을 통과하면서 용의 세력과 싸우는 한 백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 여자의 남은 자손입니다. 사탄은 교회에서 여자의 남은 자손이 준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독교회에 수많은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을 뿌려놓고 가라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하는 목적은 알곡이 숨이 막혀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 교회의 알곡과 가라지의 모습입니다.

사탄은 여자의 남은 자손(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준비되는 것을 왜 그렇게 싫어할까요? 왜냐하면 여자의 남은 자손이 준비되면, 요한계시록에 남아있는 마지막 예언이 신속하게 성취되면서 예수께서 재림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탄(용)과 싸우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 준비되면 짐승의 표 환난이 시작됩니다. 짐승의 표 환난은 7재앙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일곱째 재앙 때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알곡은 모아서 하늘 곳간으로 들이고, 사탄을 따르던 모든 가라지들은 진멸시킬 것입니다.

“추수 때(세상 끝)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천국)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사탄은 마지막 예언의 순서를 잘 압니다. 그런데 이 모든 예언의 시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 즉 여자의 남은 자손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마지막 시대의 예언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이 준비되면 하나님께서 사탄과의 마지막 전쟁을 시작하시고 짐승의 표 환난이 올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백성(계명을 지키는 성도들)과 사탄의 세력이 크게 투쟁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 중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타나지만 예수께서 재림하심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남은 자손을 모으고 준비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제 사탄이 어떻게 해서든지 기독교회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이 생기지 못하게 막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제는 영적 눈을 떠서 기독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전쟁을 보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 가라지가 무성하게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좌절하게 됩니다. “왜 교회 속에 이렇게 가라지가 많을까? 왜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이 이렇게 이기적이고 세속적인가?”라고 한탄하면서 주저앉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 성도들은 교회 안에 많은 알곡들이 있을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말세에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가라지들이 올라와 교회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예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 원하는 성도들과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기 원하는 성도들은, 진리를 찾아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나안 성도’들입니다. 물론 교회를 떠났다고 모두 ‘가나안 성도’는 아닙니다. 진리를 사모하고 순수한 복음을 찾으려고 떠나는 성도들이 진정한 의미의 ‘가나안 성도’입니다.

3부, ‘가나안 성도’는 교회가 거짓 확신을 강요할 때 교회를 떠납니다

가나안 성도’인 40대 남성은 자신이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교회에서구원의 확신 강요당해 왔습니다. 구원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교회 때마다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말에 떠밀리다시피 대답하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전혀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까지나는 구원받았다 대답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싫었습니다. 교인들이 서로나는 구원받았다 말하면서 과시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는 교회가 교인들을 그렇게 몰아가는지 이해할 없었습니다.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교인들에게 강요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가나안 성도’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예수를 믿고 영접했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사상이 팽배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물어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교인들은 눈치를 보면서 “예,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기도를 진심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영적 열등감을 갖게 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 속에 아름다운 열매가 없고 나뭇잎만 무성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세상 사람처럼 교만하고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불교나 유교를 믿는 사람들보다도 겸손하지 않고 부도덕합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교회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깊은 불신과 의심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정직한 성도들은 교회의 위선을 견디지 못해 떠나고 있는데, 그들이 ‘가나안 성도’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중세기에 일어났던 일이 마지막 때 다시 개신교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중세기 종교 암흑기 동안 유럽의 모든 사람들은 ‘천주교’라는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구원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날 때 사제로부터 ‘유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세기 천 년 이상 동안 수백만 명의 성도들을 핍박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악마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십계명을 마음대로 바꾸고 무시하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신부와 사제가 교인들에게 ‘당신은 정통 천주교회 교인이므로 구원받았다’라고 선언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회가 그런 암흑 속에 있을 때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어떤 복음을 전파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라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복음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 밝은 빛으로 나갔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 당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던 개신교들을 향해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죄와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열매와 중생의 증거가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자신을 살피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과 택하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로마서 8장에서 이 말씀을 강조했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8:8~14)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슬픈 사실은, 오늘날 기독교회는 요한 웨슬리가 전파한 거룩한 복음으로부터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세운 감리교회 속에서도 더 이상 웨슬리가 강조한 ‘거듭남’과 ‘거룩한 생애’에 대한 가르침을 듣기 어렵습니다. 지금 기독교회는 중생과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고 영접 기도를 드렸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여러분은 중생하였고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설교가 성서적일까요? 아닙니다. 성서적 설교는 이렇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어디에서 이런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지금은 말씀의 기근이 내린 시대입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말씀을 읽고 찾아야 합니다.

중세기에는 신부가 유아 세례를 통해 구원을 선언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목회자가 간단한 의식을 통해서 구원을 선언해주고 있습니다. 중세기와 똑같은 일이 지금 개신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기독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들은 손을 들으세요! 손을 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께서 들어가실 것입니다. 손을 들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구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구원을 주는 방법입니다. 독자 여러분,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죄인의 기도’를 따라 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사영리를 따라서 읽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어떤 교리에 동의하고 손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구원을 가져오는 마법과 같은 방법은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고,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영혼은 평안을 누리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말과 표정과 태도를 통해서 신앙과 확신이 스며 나오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기독교회가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왜 수십만 명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그렇게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그 여파로 수십만 명의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마지막 시대에 수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리를 보내서 미혹하고 있습니다. 슬픈 사실은, ‘가나안 성도’ 중 많은 사람들이 미혹에 빠져서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매우 위험한 시대입니다. 말씀으로 분별하면서 한 걸음씩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가나안 성도’들을 무사히 하늘까지 인도해주시길 바랍니다.

2부, ‘가나안 성도’는 교회가 마케팅과 성장에 매달릴 때 교회를 떠난다

교회가 말씀을 곧바르게 세우는 일을 하지 않고 성장과 마케팅에 매달릴 때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기독교회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설교가 달라졌고 찬양이 달라졌으며 악기와 실내 장식과 교회 건물 디자인까지 달라졌습니다. 왜 교회는 모든 것을 바꾸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큰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신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작은 교회에서 여러 책임을 지기보다는 큰 교회에 가서 책임을 회피하기를 원합니다. 큰 교회가 갖고 있는 체육관, 카페, 어린이를 위한 공간과 같은 문화시설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춰서 대형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지금 기독교회 안에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마케팅 정신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정신이 교회를 지배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한국과 미국에 있는 대형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온 마케팅 정신이야말로 부흥과 개혁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애물입니다. 대형 교회가 생기면서 아버지 목사와 아들 목사 간 세습이 사회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아니라 엄청난 재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교회 마케팅 회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마케팅 회사는 어떤 일을 할까요? 그들은 교인 숫자를 늘려주기 위해서 일하는 회사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런 회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회사는 신학자와 목사와 심리학자와 교회 음악 전문가, 소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회 마케팅 회사의 주요 고객은 누구일까요? 바로 다음과 같은 교회들입니다. ‘교인 숫자가 적어서 적자가 나는 교회, 교회를 큰 교회로 키워 나가려는 야망이 있는 교회’.

이런 교회들이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마케팅 회사의 전문가들은 교회를 답사합니다. 그리고 ‘왜 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원인을 분석합니다. 교회 마케팅 회사는 어떻게 해서든 교인들을 만족시키고, 새 신자가 교회에 와서 불편을 느끼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 그들이 제안하는 방법과 아이디어를 따라가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설교 내용이 바뀌고, 음악과 찬양, 주일학교 프로그램이 바뀌며, 심지어는 조명과 교회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바뀌게 됩니다. 교회 마케팅 전문가들은 교인들이 싫어하는 설교와 마음에 부담을 주는 설교를 하지 말 것을 목회자에게 요구합니다. 그들은 재미있는 설교, 감성적인 설교,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설교를 요구하며, 설교는 반드시 30분 이내에 끝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찬양과 예배 음악은 드럼과 색소폰, 전자기타 같은 악기의 사용을 통해 교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길 원합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세상의 리듬과 음악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 교회 속에 마케팅 정신이 들어오면, 교회는 바벨론이 되고 귀신의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교회를, 귀신의 영들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훼손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예수께서 오실 때가 정말 가까웠습니다. 한국 기독교회는 ‘교회 성장’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독이 되어 온 교회를 황폐화시켰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황폐화되었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명목하에 하나님의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성경 말씀은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해야 교인들이 모여들고, 어떻게 해야 예배가 감동을 줄 수 있는가?’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성경 말씀을 제시해도 듣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부흥과 개혁이 일어날 수 없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나아가 교회를 살려달라고 울며 탄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름만 하나님이지 그들이 원하는 신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마음으로 시편 기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1~22)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정신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고 눈물로 무릎을 꿇으며 성경 말씀을 펼쳐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사람 숫자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넓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가라지들이 무성하게 자라게 되었고, 그런 모습에 실망해서 수십만 명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가나안 성도’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이 없는 ‘벽돌 교회’가 되었다고 슬퍼하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두렵고 가슴 아픈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상한 교리와 거짓 선지자에게 붙잡혀 구원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면서 주의 백성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 호를 통해 주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부, ‘가나안 성도’는 설교가 성령을 대적할 때 교회를 떠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대적하는 설교가 듣기 싫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복음과 죄를 가볍고 얄팍하게 다룰 때 설교는 성령과 대적하고 싸우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가 이런 설교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도 죄를 범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정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런 식의 설교에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교인들이 죄와 세속을 버리고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이런 설교가 우리에게 참된 구원의 경험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이런 설교가 교회에 부흥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핑계를 만들어주고, 구원에 대한 착각과 거짓 안전을 주게 됩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고 거룩함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말세의 교회 상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서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요? 교인들을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하려면 무엇을 강조해야 할까요?

성령께서는 교인들의 양심 속에서 죄를 심각하게 다루시는데, 설교자는 죄를 붙잡고 있어도 구원받는 것처럼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설교자는 성령과 싸우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보여주면서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데, 설교자는 신자들의 죄를 덮어주고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설교자는 성령과 대적하게 됩니다.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성령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사가 성령과 대적하는 설교를 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를 찾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이고, ‘가나안 성도’가 증가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바울은 성령과 싸우는 문제에 대해서 엄숙한 경고를 남겼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이 말씀에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은혜로 임하실 때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서 죄와 세속을 지적하는 은혜를 베풀 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은혜를 베풀 때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죄와 불순종의 삶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면 그것은 성령과 싸우는 것이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죄에 대한 진지한 설교를 듣기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충격적인 이유는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종교개혁 시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죄를 버려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진리가 있는 그대로 선포되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정말 지금 이 시대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말씀을 선포하면 안 될까요? 2천 년 전 예수께서도 유대교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외면당하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16세기의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역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영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쫓겨났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진리가 있는 그대로 제시될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제시될 때, 대다수의 교회와 사람들은 핍박의 정신을 갖고 복음과 대적하였고, 성령과 싸웠습니다. 매 시대마다 오직 소수의 성도들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 앞에 마음을 낮추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진리가 정확하게 제시될 때 저항하고 대적합니다.

<Very Important> 귀가 가려우면 다른 스승을 찾는다

교회에서 거짓 복음이 흘러나올 때,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진리가 정확하게 선포될 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교 단상에서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는데 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lust, 악한 욕망)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바울은 교인들이 왜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바울은 세 가지 이유를 말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귀가 가렵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자기 사욕을 따라가기’ 때문이며 셋째 이유는 ‘스승을 많이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왜 귀가 가렵게 될까요? 듣기 싫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할까요? 마음속에 있는 악한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누구일까요? 정확한 진리를 들을 때 귀가 시원한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들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고, 뱃속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감격을 느낍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주의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렵습니까? 아니면 막혔던 가슴이 열리면서 시원해집니까?

‘귀가 가렵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바르게 선포될 때 마음이 불편하다면, 마음속에 말씀과 충돌하는 더러운 욕망과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려운 병을 고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lust, 사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과 디모데후서 4장의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왜 말씀을 거절하는지 아십니까? 그대들 마음속에 있는 악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십자가 앞에 나가 그리스도의 희생과 피를 봐야 합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정욕과 욕심을 쳐서 복종시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분명한 말씀이 선포될 때 교인들이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듣지 않으려고 할까요? 왜냐하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3절)

이 성경절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왜 “스승을 많이 두”게 될까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스승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죄와 욕심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스승을 찾아가게 됩니다. 어떤 스승을 찾아갈까요? 귀가 가렵지 않는 설교를 해주는 스승(목사)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스승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거짓 선지자, 미혹하는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스승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게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기 원하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귀가 가렵고 마음이 불편해서 다른 스승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것이 말세의 교회 모습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튜브와 온라인에 매주 수많은 설교들이 올려지고 있습니다. 온라인에 올라오는 설교 중에서 어떤 설교를 들으면, 양심에 찔림이 오면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부담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구원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다른 설교를 들으면 ‘지금 내 상태 그대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죄를 버리지 않고 세속에 붙잡혀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요? 한 목사는 귀를 가렵게 하는 설교를 하고, 다른 목사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설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욕을 좇는 사람들은 스승을 많이 두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욕을 좇으면 왜 스승을 많이 두게 될까요? 내가 품고 있는 죄와 욕심을 정당화시켜줄 설교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욕을 좇는 사람들은 스승을 많이 두게 된다’고 했을까요? 재미있는 설교, 죄를 인정해주는 설교, 구원을 쉽게 주는 설교, 넓은 길을 걸어도 구원받는다고 해주는 설교, 종류대로 설교를 듣기 위해서 많은 스승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와 온라인에서 자신이 원하는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승을 찾기 원하십니까? ‘악한 욕망과 이기적인 성품을 갖고 있을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스승을 찾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부담이 되고 양심이 아플지라도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스승을 찾기 원하십니까?

바울은 ‘사욕을 좆는 사람들은 스승을 많이 두게 된다’고 했는데, 그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요? 거짓 스승이 나를 찾아와서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입맛에 맞는 거짓 스승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터넷을 통해서, 내 교만과 이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설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로부터 흔들려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과정입니다.

분명하고 예리한 성경 진리를 받아들이기 원하지 않는 자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양심을 진정시켜줄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영적인 설교를 싫어할 것이며, 자아를 부인하는 신앙과 겸비함을 적게 요구하는 말씀을 제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호감을 갖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악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지성과 양심이 말하는 진실된 음성을 거절한다.”(선과 악의 전쟁, 523)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욕망은 작은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때 주 앞에 나가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받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진리가 내 죄와 내 불순종을 곧바르게 지적하는데, 기쁘고 행복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진리가 제시될 때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신앙이 없으면 결국 거짓 스승을 따라다니다 멸망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 시대마다 사탄이 교회 안에 수많은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를 뿌려놓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한 심령으로 따라가는 성도들은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조용한 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너는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었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고 있다”고 말씀하실 때 성령의 음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세주를 향해서 절박한 심령으로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왜 멸망했습니까? 자신이 진리와 구원에 대해서 무지하고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 시대마다 “나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잃어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멸망 당했습니다.

두려운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너무나 쉽게 “당신은 구원받습니다”라고 선언해준다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말씀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구원을 너무나 쉽게 선포해주기 때문에 “주여, 제가 잃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저를 살려주시옵소서.”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참된 회개의 경험이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하고, 교인들은 어떤 말씀을 찾아서 들어야 할까요? 이 시대에 필요한 말씀은,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꺾고 진리 앞에 납작하게 엎드리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갈 것을 두려워해서 환자가 지켜야 할 건강 원칙을 숨기고 환자가 듣기 원하는 말만 해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환자는 심각한 병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면한 채 환자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삯꾼이 되고 맙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가 교인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해서 죄와 의와 심판의 기별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교인들은 자신이 무슨 문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 채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될 때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불평하거나 교회를 떠나지만,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 눈을 열어주셔서 진리가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제 신앙 속에서 막혀 있는 것들을 뚫어주셨습니다. 제 속에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순결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을까요? 교회에서 순수한 거듭남과 복음의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성령과 대적하고,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지 않을 때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서론, 교회를 찾지 못하는 이유

몇해 전부터 인터넷에 ‘가나안성도’라는 표현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성도’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고 결정한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교회를 떠난 ‘가나안성도’들이 지금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서점에 가면 ‘가나안성도’에 대한 여러 책들이 나와있는데 어떤 책에는 다음과 같은 간증이 실려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떠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 남아있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남아있는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남아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관성으로 남아있는 것인가요?”

‘가나안성도’들은 말씀과 생명이 없는 교회에 남아있는 교인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그들은 교파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말씀을 찾아다닙니다. 매주 수많은 ‘가나안성도’들이 유튜브에 모여들어 살아있는 말씀을 찾으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부패와 불의를 보면서 매주 교회 가서 헌금을 내고 예배드려야 합니까? 우리가 지성적이지도 않고 성경과 맞지도 않는 설교를 매주 들어야 합니까? 예배를 교회 건물 속에서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까?”

얼마나 교회에 실망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요? ‘가나안 성도’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동정이 생기고 마음이 참 아픕니다. 마지막사명 <파워북>이 그런 성도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자신이 다녀야 할 교회를 찾고 있는데, 그들은 교회를 정할 때 두 가지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세워져 있는가를 보고, 둘째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이 있는가를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회 안에 이런 교회가 매우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의 숫자가 매년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전체 기독교인의 10% 정도를 ‘가나안 성도’로 추산했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을 천만 명이라 보면 백만 명 정도가 ‘가나안 성도’라는 말입니다. 이 숫자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논란이 있지만, 최근 조사 결과를 보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며, ‘가나안 성도’의 숫자가 최근 몇 년 사이에 2배 이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든지 간에 ‘가나안 성도’가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어떤 교단과도 견줄 수 있는

큰 규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을까요?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생명의 말씀을 찾아보았지만, 가는 곳마다 부패와 세속화를 보게 되었고, 말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자신이 교회 다니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벽돌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벽돌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교회 속에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는 오늘날 교회를 이런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오늘날 교회는 벽돌로 만든 건물에 불과합니다. 교회란 조직도 아니고 건물도 아닙니다. 교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사라져버렸고 부도덕과 세속만이 창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벽돌 교회입니다.”

교회에 실망해서 떠났지만, 성령께서 ‘가나안 성도’의 앞길을 인도해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꼭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만 만족되면,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의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소원과 갈망이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진리를 보여주시고 구원의 경험을 주십니다. 이번 호를 통해서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빛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를 떠나는 5가지 이유

지난 몇 해 동안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목사와 교회에 대한 좌절감을 갖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날까요? 왜냐하면 말씀의 기근이 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선지자 아모스가 말세에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말씀의 기근이 마지막 라오디게아교회를 덮쳤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이 들려서 인터넷을 통해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지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말씀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주 유튜브에 수많은 설교가 올라오지만, 죽은지 오래되어서 마른 뼈가 되어버린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은 정말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말씀의 기근 속에 있는지 어떻게 알수있을까요? 성경을 읽으며 설교를 계속해서 듣고 있는데 내 신앙에 생명이 없고 삶에 변화가 없다면, 말씀의 기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말씀과 듣는 말씀이 나를 하나님께 충성하는 살아있는 신앙 속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말씀의 기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근 속에 있으면, 마음이 냉랭해지고 영혼이 시들어서 죽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살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들이 ‘가나안성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5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5가지 이유>

  1. 가나안 성도 설교가 성령을 대적할 교회를떠난다.
    Do you know? 귀가 가려우면 다른 스승을 찾는다.
  1. 가나안 성도 교회가 마케팅과 성장에 매달릴 교회를 떠난다.
  2. 가나안 성도 교회가 거짓 확신을 강요할 교회를 떠난다.
  3. 가나안 성도 교회가 가라지 중심으로 돌아가면 교회를 떠난다.
  4. 가나안 성도 계시록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다.

31호를 시작하며…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홍수가 나면 온통 물바다가 되지만,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말씀의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동네마다 거리마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말씀이 있는 교회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몇 해 전부터 이상한 현상이 기독교회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교회를 떠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수십만 명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릅니다. 왜 교회를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를까요? ‘가나안’이란 단어를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안나가’는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그들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 방황하듯이, 참된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나안 성도’들이 수십만 명씩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록 아직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수많은 교인들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며 교회의 세속화에 실망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어둠 속을 비추는 분명한 빛을 주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