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사탄의 연설문

사탄의 전략

친애하는 악령 여러분,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하나님과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법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고, 가인을 첫 번째 살인자로 만드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전략에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형식과 의식으로 변질시키기 위하여 애를 썼는데, 그 결과 유대인들의 신앙은 바짝 메마른 율법주의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뱀의 후손들을 양산해 내는 데 크게 성공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한 후, 열두 제자들의 헌신으로 참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잠시 우리가 구석에 몰리는 듯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 제국의 사자 굴과 원형 극장에서 한 사람을 순교시켰을 때에 백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급히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로마황제로 하여금 기독교회를 인정해 주도록 했습니다. 핍박을 중단하는 대신에 교회 안에 돈과 명예를 넣어 주었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교회가 재물과 탐욕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협력자들을 통해서 교회 안의 진리를 제거하고 오류를 퍼트리는 일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중세기에 교회가 타락하자 우리가 원하던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여자의 후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 결과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 수천만 명의 순교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가 기독교회 안에 넣어준 가짜 복음과 거짓 교리들은 지금까지 남아서 현대 기독교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중세기는 우리들의 전성 시대였습니다.

천년 간의 긴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개혁자들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려고 했고, 참된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중세기 동안에 교회 안에 침투시켰던 거짓 복음과 가짜 교리의 실체가 혹시라도 드러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조였는지 모릅니다. 마틴 루터의 개혁 운동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대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세월히 흐르고 개혁자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자,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후예는 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렸고 개혁의 불길도 꺼져갔습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반격을 가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랑과 충성을 성경 말씀 대신에 교단에 바치도록 유도했습니다. 우리가 의도한 대로 교단 제일주의에 빠진 개혁자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대신 교단과 교단 사이에 높은 벽을 세우고 교세를 확장시키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운동은 중단되었고 그 대신에 사람들은 교파와 교회의 성장을 즐겼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과학과 공업이 크게 발전되고 교통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여서 긴장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은 그리스도인들을 돈과 물질의 파도로 휩쓸어 갔습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유사 이래 최고의 풍요로운 삶을 누렸고 그와 함께 교회도 부와 힘을 상징하는 초대형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렇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마귀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과 마지막 전쟁을 벌어야 하는데, 그 전쟁의 승패야말로 우리 모두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을 바치는 여자의 후손들이 생기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와 싸우게 될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을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돈과 세속적 신앙으로 인해서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기도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세속적인 마음과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방향과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물질과 복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요구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귀 여러분,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도록 만드십시요. 그렇게 하면 진리는 사라지고 음악과 예배와 프로그램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의의 원칙들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이며, 교회는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한 프로그램을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 목을 매는 목회자들에게 거짓 성령과 거짓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우리는 설교를 막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흘러나오는 설교로는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여자의 후손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설교가 재미있는 이야기와 정치와 사회 문제로 채워져 있고, 세상과 죄를 철저하게 버리라고 호소하는 촉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순결함과 충성을 강조하지 않는 설교가 아무리 크게 외쳐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의 생애와 마음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켜서 좁은 길을 걷도록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죄는 이길 수 없는 것이고, 순종은 까다로운 율법주의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목사들의 설교에는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관건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비록 그들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기도를 하고 주말마다 교회에 간다고 할지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믿도록 해놓고, 그들의 시간을 우리가 장악하기만 하면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받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마음과 생애는 불신자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을 사소한 일로 바쁘게 만들면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버는 일로 바쁘게 만드십시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좇는 일에 모든 시간을 소비하도록 유도하십시오. 사람들의 지출을 가능한 한 늘리게 만들고, 빚을 갚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일하게 만드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 호기심을 일으킬만한 물건이나 제품을 광고하는 전단물을 정기적으로 배포하고,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여신 한도를 크게 올려 주십시오.

행복은 물질에서 온다는 허상을 믿도록 가르치고, 아내들의 사치심을 부추겨서 남편들로 하여금 적어도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7일을 일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도록 만드십시오. 필요하다면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도록 유도하고, 가정을 지켜야 되는 어머니도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직업 전선으로 내몰아 가십시오. 가족의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돈을 많이 버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도록 설득하십시오. 여인들이 저녁에 피곤에 지쳐서 가정에 돌아오면, 그들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정성 어린 식사와 환한 미소를 제공할 여력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짜증과 신경질과 투정이 새어 나오게 될 것이며,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에는 조그만 일로도 다툼과 투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고, 결국에는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끌려가는 케이스들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극도로 지쳐 있습니다. 낮에는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저녁 시간에는 각종 술자리와 회식을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자극적인 텔레비전 방송과 뉴스와 드라마를 보도록 하면, 성경을 읽을 시간도 없고 말씀을 명상할 여유도 없으며, 양심에 속삭이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만한 귀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가정과 상점과 직장마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음악을 무차별적으로 퍼부으십시오. 어디를 가든지 스마트 폰과 신문과 잡지와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도록 만드십시오. 대형 광고판과 연예 뉴스와 영화를 통해서 더럽고 추한 그림과 말이 계속해서 튀어 나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선정적인 그림과 영화를 다량으로 살포하고, 결혼의 순수성에 대한 가치를 혼돈케 하십시오. 청년들의 도덕과 윤리와 신앙을 완전하게 무너뜨리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각종 토크 쇼에 나오는 말 잘하는 사회자와 출연자를 통하여 이 사회의 가치관과 풍조를 부도덕과 궤변으로 망가뜨리십시오. 선은 실현 불가능한 특별한 것이고, 악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부각시키십시오.

사람들의 마음을 항상 바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이 헛된 것에 소모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가정마다 컴퓨터를 사도록 유도하고, 컴퓨터마다 초고속 통신망을 연결시키십시오. 흥미로운 이 메일을 계속해서 보내고, 각종 정보를 다량으로 퍼부어 그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십시오. 또한 노인과 아이들을 막론하고 휴대폰을 갖고 다니게 해서 마음과 정신이 거룩한 하늘의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십시오. 아이들도 각종 시험 공부와 스포츠와 음악 레슨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만들고, 경쟁에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이기심의 완전한 노예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게 해서 부모가 직접 교육시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부모 대신에 친구들과 길거리와 텔레비전으로부터 교육받도록 만드십시오. 그렇게 되면, 사춘기가 될 때 부모와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우리가 여자의 후손이 나타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는 최고의 전략입니다. ■

 

단순함으로 사탄의 덫을 피하세요!

온 세상 사람들이 사탄이 운전하는 열차에 타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차의 종착역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열차 좌석에 앉아 있습니다. 열차는 너무나 빨리 달리고 있기 때문에 열차에서 뛰어 내리고 싶어도 온 몸을 던지는 위험을 각오하지 않는 한 뛰어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뭔가 불안하지만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는 결정을 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런 결정이나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결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들을 주실 때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것이 선택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은 사탄이 인도하는 열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인생 최후의 날에 마지막 호흡을 하면서 후회의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게 됩니다. 이렇게 끝날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조용하고 소박한 환경 속에서 하루를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를 만나서 대화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와 시간이 허락되는 환경을 찾아야 합니다. 진리와 의와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연구하고 명상할 수 있는 환경과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리는 항상 단순한 것에 있습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속에서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요? 경건하고 단순한 삶을 위해서는 뼈를 깎아내는 듯한 결정과 선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순한 삶을 위해서는 단순한 가정 경제가 필수입니다. 빚과 지출을 줄여야 합니다. 소금에 밥을 찍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빚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의복과 차와 집이 지금보다 더 소박해져야만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탐욕과 욕심을 버려야만 단순한 삶이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창과 검이 핍박하기 때문에 단순한 삶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바쁜 구조는 그리스도인이 성경 중심으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졸아서는 안 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사탄의 함정에 걸릴지 모릅니다. 사탄이 덫에 걸리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 전부를 헛되게 소모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너무나 적은 것이 마음 아픕니다. 여자의 후손이 되기를 소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너무나 적은 것이 마음 아픕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

 

 

4부 – 어떤 신앙을 선택하겠습니까?

성경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계명에 순종하라”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거룩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늑대와 같은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 양처럼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늑대로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양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영적 경험은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내가 믿고 추구하는대로 내 경험이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여자의 후손”이 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복음이 어떤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세 갈래 길이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세 가지 신앙 중에서 어떤 신앙을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주의적 신앙

율법주의적 신앙으로는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는 늑대도 그 겉모습을 잘 바꾸면 양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늑대에게 성형 수술을 해주면 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을 받아들이면, 늑대를 양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늑대의 겉모습을 완벽하게 바꿔 나가려고 애쓰게 됩니다. 늑대의 본성 위에 양의 탈을 씌우고 양처럼 말하는 훈련을 하고 발톱도 부드럽게 깍아주고 털을 하얗게 물들인 다음에 파마를 해주면 언젠가는 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늑대의 본성이 올라오지 않도록 금식하기도 하고, 늑대가 원하는 쾌락과 정욕을 금지시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늑대가 양이 될까요? 늑대는 굶어도 늑대이고, 금욕을 해도 늑대일 뿐입니다. 기회만 오면 늑대의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면, 마음속에는 이기심과 탐욕이 그대로 있어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겉모습과 행위를 양처럼 바꾸어 가게 됩니다. 열심히 바꿔가다 보면 언젠가는 양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헛된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였고,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적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 전체가 종교적 행위로 가득차 있지만, 영혼의 평안과 구원의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내 힘, 내 노력으로 애쓰고 투쟁하다가 결국에는 지치고 좌절하게 됩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분들이 신실하게 살려고 애쓰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지만, 새 언약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문제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너희가 믿음 위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3).

율법적 신앙의 덫에 걸리면 이렇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죄를 범하게 되고,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자꾸 악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4, 15, 18, 19). 이런 경험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서 살고 싶은데, 자꾸 실패하게 됩니다.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 싶은데 자꾸 불순종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살지 못하는 노예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늘 정죄받는 느낌을 갖게 되고,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아 깊은 절망을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선교하고 봉사하지만, 마치 출구가 없는 방에 갖혀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문제를 가진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히 7:16).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려면, 법과 원칙을 쫓아가는 대신 생명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과 원칙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법과 원칙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깊이 살펴보고 명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과 은혜가 성령을 통해서 마음속에 흘러들어가 더러운 양심을 씻어서 새로운 양심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씻어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는 열매가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맺혀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롬 8:12). 바울은 우리가 빚진 자이기 때문에 육체의 욕망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빚을 졌다는 말인가요? 그리스도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늘의 왕께서 하늘을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와 핍박을 피해서 이 동네 저 동네로 피신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럽고 먼지나는 유대 땅에서 목수의 아들로 살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렸는데, 아무도 그분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죽음의 길을 홀로 걸으셨고 십자가에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외로운 삶과 피가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는 소망이 없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하나님께 큰 빛을 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등을 돌릴 수 있냐는 말입니다.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고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율법주의적 신앙 때문에 고민하고 계십니까? 이제 십자가에 가셔서 모든 짐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금욕주의나 허망한 율법주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께 “빚진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생명을 받아서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사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말씀과 계명 안에 거하는 하늘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세속적인 신앙

세속적인 신앙을 가지면, “여자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세속적인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늑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늑대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직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도 없습니다. 그것처럼 깊은 기만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께서 늑대인 자신들을 양으로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세속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세속적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죄와 세상에 대해서 “적개심(emmity)”을 갖지 않게 됩니다. 세속적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양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양이 된 것으로 취급해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너무나 분명한 말씀입니다. 늑대의 말을 하고, 늑대의 생각을 하고, 늑대처럼 살아가면 그것은 늑대라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아니라 나쁜 나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가 아니라 나쁜 열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말씀에는 오해하거나 혼돈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서 이상한 복음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런 복음들은 한결같이 늑대의 모습 그대로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육체의 정욕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복음입니다. 주 안에서 거듭나고 생애를 하나님께 드린 영혼은 사도 바울이 말한 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은 태초 이전에 루스벨의 반역으로 하늘 천사의 1/3을 잃어버리는 뼈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반역의 정신과 불순종의 정신이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 잘 압니다. 만약 늑대같은 사람들이 구원받아서 천국에 들어 온다면, 그들의 변화되지 않은 성품과 반역의 정신 때문에 온 우주가 또 다시 큰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늑대의 정신으로 사는 악인들에게 반드시 형벌이 내려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벧후 2:4~10)

 

성경이 말하는 신앙

성경이 말하는 신앙대로 살아야 “여자의 후손”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아무리 잔인한 늑대라고 할지라도 양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신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지독한 구두쇠며 돈을 사랑하는 늑대 삭개오도 양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8, 9).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일곱귀신 들렸던 창녀 막달라 마리아도 양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 38).

늑대도 양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복음은, 예수께서 니고데모라고 불리우는 늑대에게 직접 주신 복음입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이름을 가진 젊잖은 늑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때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복음이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야 너는 늑대란다. 그러나 네가 진정 양이 되고 싶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늑대는 결코 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늑대가 양으로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늑대의 마음을 다시 창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 전체를 주님께 드려서, 그분께서 직접 집도하시는 수술대 위에 누워야 합니다. 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넣어주실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늑대의 본성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늑대의 본성을 가진 우리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넣어주시는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소원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 앞에 나가 교만과 죄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베데스다의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기다렸던 앉은뱅이와 같은 절박한 심령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혈루병 걸린 여인의 심령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야 합니다.

그들의 간절한 심령은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정죄와 절망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것 저것 다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죄와 세상에 끌려다니고,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지긋지긋한 삶을 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유일한 희망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향해서 손을 뻗게 될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는 간절한 영혼의 절규가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께 나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시면,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는 창조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죄책감과 세속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위로해 해주실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면, 오래 동안 주님을 믿었지만 한번도 하지 못했던 참된 회개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특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런 마음에는 율법주의나 세속적 신앙 같은 것들이 발붙힐 틈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데, 그때 그 말씀은 생명수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읽지만, 그것이 마음속에 들어가 생명수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너무나 교만하고 세속적이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에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죽은 글자와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그들은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 4:2). 그러나 낫고자하는 앉은뱅이의 심령으로 말씀을 읽으면, 낫고자 하는 문둥병자의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서 죽어가던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주고 소생시키는 하늘의 능력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죄와 세상을 사랑하는 늑대의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고 힘들게 생각하던 정신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토록 버릴 수 없었던 죄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늑대의 본성이 지배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육체의 정욕이 마음을 지배하는 대신에 성령께서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참된 거듭남은 물(말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빛과 진리를 거절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거룩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물과 성령의 역사가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았고, 왜 그런 신앙을 가졌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겼던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도 그런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회개가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애굽 왕의 자리를 포기했던 모세의 마음이 내 마음에도 생기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들의 심령이 내 마음에 와 닿게 됩니다. 이것이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었을 때 일어나는 하늘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애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면, 성경은 더 이상 어렵거나 지루한 책이 안 됩니다. 기도는 더 이상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서 창조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시작되면 하나님은 내게 있어서 모든 것이 됩니다. 마음은 행복과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게 됩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주머니를 열게 됩니다. 병든 사람의 귀에 위로를 들려 줄 수 있게 되고,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를 행하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열매맺는 신앙입니다. 늑대의 생애에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추한 죄의 열매들이 맺히지만, 양에게는 아름답고 풍성한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세상에 빛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신앙

성경이 말하는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여자의 후손의 특징인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은 그분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충성으로 이어집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음 말씀의 의미를 명상하시면 성령께서 빛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7~19)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 14:15, 21, 2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 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

 

3부 – 여자의 후손과 늑대의 고민

1부와 2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탄이 지구를 공격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할 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계획을 선포하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두 무리가 존재해 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여자의 후손”과 사탄을 따르는 “뱀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과 진리를 전파하고 보존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셨던 참된 신앙과 진리가 믿음의 조상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져 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대로 아벨과 에녹을 거쳐서 노아에게 이어져 갔으며, 그것이 다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를 거쳐서 여자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성경에서는 여자의 후손이 “남은 자”로도 표현됩니다(여자의 후손=남은 자). 이스라엘이 깊이 타락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를 갖고 계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사 1:9).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사 10:22).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신 28:62). 성경에서 “남은 자”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크게 배도하고 세속적이 되었을 때, 끝까지 참된 신앙을 지키면서 진리에 충성하는 성도들을 뜻합니다.

성경과 초기 그리스도 교회사와 중세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성경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남은 자(여자의 후손)들이 이어져 내려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남은 자(여자의 후손)들이 항상 존재해 왔으며,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여자의 후손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를 3번이나 반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 말씀은 마지막 시대에 어둠 속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①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사도 요한은 여자의 후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탄과 싸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여자의 남은 자손”의 특징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며 사단과 원수가 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②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짐승의 환난 장면에서도 “여자의 후손”의 특징인 “계명을 지키고 사탄과 싸우는” 모습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 12).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 성도들이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투쟁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 12장에 나왔던 여자의 후손이 짐승의 표 환난에서도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이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은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에도 “여자의 후손”이 하늘에 입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은(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한글 성경>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마지막 시대의 주인공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의 특징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계명을 지키는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와 방법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여자의 후손이 갖고 있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요?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늑대 이야기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늑대의 고민

어느 날 한 농부가 산속을 걷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늑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끼 늑대를 집으로 데려와 잘 길렀습니다. 이듬 해 봄이 되었을 때, 농부는 어린 늑대를 양 우리 안에 풀어 주어서 자유롭게 풀밭을 뛰어놀도록 했습니다. 어린 늑대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에게 달려갔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어린 늑대는 자기가 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들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생겼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풀밭에 이리저리 뒹굴고 풀을 함께 먹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풀을 뜯어 먹었지만 정말 맛이 없었습니다. 양들이 노는 것처럼 놀아보았지만 정말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새끼 늑대는 단지 “양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 때문에 양들을 따라다녔습니다. 얼마 후에 늙은 양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린 늑대는 “나는 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늙은 양은 놀라면서 “네가 양이라고? 너는 양이 아니라 늑대란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늑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어린 늑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래서 늙은 양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나는 정말 양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늑대가 되기 싫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양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새끼 늑대와 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늑대의 본성을 갖고 있는데 양이 되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양을 따라다니고 흉내내면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면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주말에 교회가고, 헌금을 잘 드리고, 찬양대 활동을 열심히 하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자주 방문하면,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새끼 늑대는 자신이 양이 아니라 늑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양이 되기 위해서 더 처절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이 먹는 음식을 먹고, 양처럼 소리내고 양처럼 뛰려고 열심히 애를 쓰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늑대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발톱은 여전히 날카로워지고, 이빨은 점점 더 뾰족하게 자라났습니다. 양은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를 보면 마음에 평화와 안전을 느끼는데, 새끼 늑대는 울타리를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습니다. 울타리에 갖혀서 사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늘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양이 되고 싶었지만, 육신의 본능에서 올라오는 늑대의 기질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인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육신의 본능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깊은 좌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싶지만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악을 거부하고 싶지만 악에게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낙담하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4, 15). 모태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도 참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면 늑대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유모차에 실려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어도 양이 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양처럼 보이는 늑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에 다닌 그리스도인도 양의 흉내를 내는 일에만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양의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고 양의 목소리로 기도하고 양처럼 행동하는 기술을 오래동안 터득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돈과 세상을 사랑하고 울타리 밖의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 12, 14).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회개, 자신의 온 생애를 주 앞에 드리는 헌신, 이런 영적 경험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랜 세월 동안 늑대의 본성을 숨긴 채 양의 흉내를 내다보면, 스스로 외식과 위선에 지쳐서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거운 억압과 굴레가 됩니다. 매 주말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늑대의 본성을 만족시켜주는 쾌락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방황하는 동안 신앙은 뜨뜻미지근하게 되고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양은 목자가 쳐놓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양은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계명을 결코 무겁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을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성경이 요구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늑대의 본성에 끌려다니면서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늑대는 자신의 본성을 즐겁게 하는 쾌락과 재미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진리를 위해서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을 굉장한 손해와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

 

2부, 두 교회 –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 세상 종말까지 어떤 양상으로 벌어지게 될지를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사탄의 공격에 응전하실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창세기 3장에서 발표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긴 예언이면서 동시에 구속의 계획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에 참여하는 지구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의의 종과 사탄을 따르는 죄의 종으로 나뉘어집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그것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들의 교회가 있고, 뱀의 후손들의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이 두 교회는 우리 눈에 보이는 교파나 교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향한마음속마음속의 충성과 헌신에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교회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인간의 눈에는 수많은 교파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에는 오직 두 교회만 존재하는데, 하나는 여자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뱀의 후손입니다. 이제부터 창세기 3장에서 발표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살펴보겠습니다.

 

(창 3:15) “내가(하나님) 너로(뱀, 사탄) 여자와 원수(enmity)가 되게 하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탄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순결한 교회를 상징합니다(고후 11:2, 사 52:2, 렘 6:2). 다시 말해서, “여자”란 정결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 벌어져서 시험과 유혹이 올 때, 성령의 음성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정결한 그리스도인(여자)입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소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과 원수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원수’는 ‘enmity’ 입니다. ‘enmity’라는 말은 ‘적개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탄(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넣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합니다. 그런 본성으로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만일 거듭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인간은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그의 명령을 복종하기 위해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상태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거듭남의 역사가 이루어지면 사탄과 죄를 거절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마음과 생애 전체를 주님께 드리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기 때문에 사탄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 속에 예수의 마음을 넣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마음속에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미워하게 되고 악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거듭남을 경험했던 사람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게 되어서 다시 육체의 본성에 지배를 받는 삶을 살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오늘날에도 사탄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이고, 순결한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사탄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강하게 저항하며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다를까요? 눈으로 쉽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의 후손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봉사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뱀의 후손들과 여자의 후손들이 섞여서 예배드리고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뱀의 후손은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온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뱀의 후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 2:19, 20).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떱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뱀의 후손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나타나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서로 원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케이스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입니다. 두 아들은 모두 아담과 하와로부터 동일한 본성, 이기적이고 타락한 본성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뱀의 후손이 되었고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역사 또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들 사이에서 벌어진 투쟁의 이야기입니다.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뱀, 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사탄) 그의(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어떤 사건을 말할까요? 놀랍게도 이 말씀은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순결한 믿음을 가지셨던 예수님을 뜻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뱀, 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골고다”라는 단어의 뜻은 “해골”입니다. 그러므로 골고다에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십자가가 사탄의 해골(머리)을 내리찍음으로써 상하게 했음을 뜻합니다. 창세기 3장의 예언대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께서는 골고다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써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사탄과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너(사탄)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발에 못이 박히는 상처를 받으셨지만, 십자가가 골고다에 세워짐으로서 모든 인류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완전한 준비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까요? 왜 우리가 아직도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받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승리하셨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가 섬길 자를 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 될 것인지, 뱀의 후손이 될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마쳐지는 그날까지 우리 자신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과 천사와 사람 앞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에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에는 중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든지 천사든지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한 편을 분명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도 정확하게 둘로 나뉘어졌던 것입니다.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중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중간에 서있으려고 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말입니다. 바로 그런 어중간한 신앙 태도 때문에 사탄의 기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에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편 아니면 사탄의 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탄의 편에 가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기만과 미혹에 넘어갑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담과 하와는 미혹을 받아서 사탄의 편에 섰습니다. 노아홍수 때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다가 미혹받아서 멸망당했습니다. 롯의 때 대부분의 소돔성 시민들도 세상을 사랑하다가 미혹을 받고 멸망당했습니다. 구약시대 유대교회 지도자들도 세상을 사랑하다가 미혹을 받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예수께서 초림하셨을 때에도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다가 미혹을 받고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도 노아의 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서 멸망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재림)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왜 그렇게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은 길을 걷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은 가파르고 협착해서 싫어합니다. 그래서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가게 되는데, 그것이 넓은 길입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3, 24).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에서 사탄의 미혹을 당하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음 깊숙히 담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장로교와 침례교의 전쟁이 아닙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전쟁도 아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고,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 결정에 따라서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 될 수도 있고, 뱀의 후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람의 구원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구원을 설명할 때 “내가 어떻게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내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지지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않는 바울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런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좁은 길 걷기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됩니다. 사탄이 풀무불과 사자굴을 앞세우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공격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승리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을 바라보는 성도의 마음속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나는 믿고 회개했고 영접기도를 했으므로 내가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라는 식의 믿음은 전혀 발붙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 받고 잘 믿지 않으면 집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식의 기복신앙도 사라지게 됩니다. 냉랭하고 의미 없는 율법주의도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왕좌를 노리는 사탄과 치열한 전쟁을 치루고 계십니다. 인류를 하나님의 편으로 이끌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탄이 주는 유혹에 맞서 저항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내 구원과 내 축복만을 챙기면서 이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산 영혼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손에 다시 못질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사도 바울은 중요한 사상을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지금 우주 세계와 천사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가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이 하나님과 사탄의 치열한 전쟁에서 누구의 편에 서는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때, 여자의 후손들이 어떤 믿음과 신앙을 나타내는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금 두 교회가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택하겠습니까? 여자의 후손이 되겠습니까? 뱀의 후손이 되겠습니까?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고전 15:48). ■

 

1부, 하늘의 전쟁과 땅의 전쟁

지금 지구에서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처음에 전쟁이 시작된 곳은 지구가 아니라 하늘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하늘에 전쟁이 있었는데, 그 전쟁은 용과 미가엘이 싸우는 전쟁입니다. 성경에서 용은 사탄을 가리키고 미가엘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미가엘은 그리스도께서 전쟁에 나설 때 사용하는 특별한 이름입니다(단 12:1).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과 사탄과 그를 지지하는 천사들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온 하늘이 둘로 나뉘어져서 전쟁을 했습니다. 그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8절)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하늘에서 그리스도에게 패배해서 쫓겨난 사탄과 패배자들이 어디로 갔을까요?

(9절)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자라 땅(지구)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한 천사들은 지구로 쫓겨났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탄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는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기만하고 미혹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미혹과 기만이 이루어집니다. 사탄은 땅으로 내려오자 아담과 하와를 기만해서 죄에 빠뜨렸고 죽음과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과 수많은 악한 천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얼마나 많은 악한 천사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이 지구로 내려왔을까요?

(4절) “그(용) 꼬리가 하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니.”

용(사탄)은 간교한 미혹으로 하늘 천사의 1/3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놀라운 기만입니다! 천사들은 수천 년 또는 수만 년 동안 하나님 면전에서 찬양하고 수종을 들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30% 이상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하여 반기를 든 것입니다. 사탄의 기만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왜 하늘에서 전쟁을 벌였을까요? 이사야서는 사탄(루스벨)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킹제임스 영어성경>)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4).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보좌를 빼앗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갖고 온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사탄을 섬기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하늘 천사의 1/3이 사탄의 편에 가담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 천사들의 숫자를 표현할 때, 천천만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으로 봐서 악한 천사들이 얼마나 많이 활동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악령들이 지금 사람들을 유혹하고 시험에 빠뜨리면서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로 옮겨진 전쟁

지구로 내려온 사탄과 악한 천사들이 어디로 갔을까요?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나무로 갔습니다. 왜 그곳으로 갔을까요?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6, 17). 법을 무너뜨리면, 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탄은 집요하게 하나님의 법을 공격합니다.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과 사탄 둘 중, 어느 한 편을 지지하고 섬기기로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둘 중 한 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지구 최초의 전쟁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는데, 그 전쟁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고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의 반역이 지구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생기기 전 에덴동산에는 낙엽도 없었고, 동물들끼리 서로 죽이는 약육강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가시나무와 독초들이 자라나게 되었고, 동물들의 성질이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즉시 자연계에 무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영향은 인간에게도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유전자가 노화되기 시작했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들의 본성에도 치명적인 변화가 생겨 날마다 육체의 본성으로부터 올라오는 정욕과 이기심의 충동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에게 그대로 유전되었습니다.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지만, 그들의 후손은 사람의 형상을 닮은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아담이� 일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창 5:1~3).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은 곧 자연스럽게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타락한 본성에서 올라오는 음성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두 음성을 듣게 되는 이유입니다. 사탄이 시험과 유혹을 통해서 우리를 공격하면, 한쪽에서 타락한 육체에서 올라오는 악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죄를 범하라. 욕심을 채워라. 미워하라. 복수하라.”는 육체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주시는 세미한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죄를 버려라. 양보해라. 용서해라. 욕심을 버려라. 회개하라”는 성령의 호소가 들려옵니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 30: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그 두 음성 중에서 어떤 음성에 순종하는가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성령을 좇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도 두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육체로부터 올라오는 음성을 따라갔고 그 결과 동생을 죽이는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아담의 또 다른 아들 아벨도 가인처럼 부모로부터 악한 본성을 받아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인자가 아니라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비록 우리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거룩한 신앙인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설교, 육체의 정욕과 이기심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설명해 줍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하늘에서 시작된 전쟁이 지구로 옮겨졌습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탄의 공격에 대해서 대응하실까요? 어떻게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까요? 2부에서 그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성령을 좇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 6) ■

 

4호를 시작하며…

이 땅에 교회가 생긴 이후 지금까지 두 교회가 존재해 왔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는 두 교회 <빛의 교회와 어둠의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여러 교파들이 보이고 수많은 교단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오직 두 종류, 즉 빛의 교회와 어둠의 교회만 존재해왔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노아의 교회였고, 다른 교회는 순종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교회는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으며 방주 짓는 일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시작되자, 누가 빛의 교회에 속해 있었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내리자, 다락방에 모여 있던 열두 제자들과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빛의 교회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두 교회가 있습니다. 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이며, 다른 교회는 어린양과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교회입니다. 두 교회가 있고 두 말씀이 있으며 두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어떤 말씀을 따라가고 있으며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속한 교회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번 호 말씀이 독자 여러분의 생애 속에 놀라운 변화와 영적 경험을 가져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채울 때 성령께서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으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