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어디서 떨어진 것을 되돌아보기를…

<마지막 사명>에서 일곱 교회 예언을 다루었던 의도를 한 성경절로 표현하면 이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일곱 교회 중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교회는 사도들이 세운 에베소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르치셨고 제자들이 전파했던 복음을 가졌던 가졌던 교회가 제 1세기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순수한 복음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버가모 교회가 어떻게 에베소 교회의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두아디라 교회가 중세기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갔는지를 되돌아 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무엇을 개혁하고 어떤 점을 회복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 교회 예언은 중세기 천주교회를 비난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예언이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들 중 천주교회를 다니는 성도들께서는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기분이 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일곱 교회 예언은 예언인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중세기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기독교회가 사탄으로부터 끔찍한 공격을 받았던 사실은 오늘날 여러가지 서적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은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때마다 예수께서 성도들을 어떻게 인도하셨고 보호해 오셨는가를 배우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음성을 듣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호에서도 일곱 교회 예언 2부가 이어집니다. 종교암흑시대가 끝나면서 시작되는 개신교회 시대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교회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호에서도 우리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기 위해서 말씀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계 2:5). 예수께서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과 교훈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회개의 정신을 불러 일으키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

4부, 네 번째 교회, 두아디라 교회, 중세기 종교암흑시대

기간: AD 538~16세기초(중세기 종교암흑시대의 교회, 광야로 피신한 교회)

 

버가모 시대에 로마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부터 기독교회는 정치권력과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기 538년에는 로마 천주교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종교, 정치, 군사력에 관한 막강한 권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거절하는 성도들에 대한 핍박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5천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당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는 서기 538년부터 시작해서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약 천 년 동안의 긴 기간인데 세계역사는 이 기간을 “종교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 동안 로마 천주교회의 권세는 유럽의 국왕들을 지배하고 장악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와 명령을 거절하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핍박하였습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이 시기 동안 가장 많은 진리가 왜곡되고 변질되었습니다.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을 거절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와 깊은 산으로 피신하여 진리를 간직하고 살았으며,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럽의 대도시에 있던 교회가 큰 건물과 장엄하고 화려한 예식 그리고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인 줄 알고 거짓 교리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회 이름의 의미

두아디라의 이름이 가진 의미는 “통탄스러운 희생”인데, 이것은 이 시기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의미입니다.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온 배도로 인하여 믿음의 단순성이 외적인 행함과 고행으로 대치되고 희생되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와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단순한 복음을 외적 행함과 화려하고 엄숙한 예식과 고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가 참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시기였습니다. 교회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회개의 신앙을 저버리고 죽은 행위과 의식을 신앙의 기초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모습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계 2:18)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묘사한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은 여기뿐입니다.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한 중보자의 위치를 이 땅의 교회 사제들에 의해서 빼앗기셨습니다. 마리아라는 인간 중보자가 등장하고 고해성사가 나타남으로써,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나가는 대신에 신부와 사제를 통하도록 가르침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또한 두아디라 교회를 보살피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묘사했을까요? 암흑으로 뒤덮인 시대에 예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당신의 백성을 보살피셨다. 중세기 천 년 동안 예수님은 핍박을 피하여 알프스 산 중에서 피곤한 발을 이끌고 살아가는 성도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과 눈이 묘사된 것입니다.

칭찬의 말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예수께서는 두 가지를 칭찬했는데, 첫째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이고, 둘째는 “나중 행위”였습니다. 먼저 나중 행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는 예언처럼, 두아디라 교회의 후기에 들어가면서 요한 위클리프가 1320년경에 개혁을 시작했고, 후에 후쓰와 제롬이 개혁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화형대에 오르는 순교를 당했습니다(1415년). 틴데일, 쯔빙글리 같은 사람들도 희생적인 개혁자로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 후기에 있었던 이들의 피묻은 개혁사업 때문에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천 년의 핍막을 견딘 사람들

예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칭찬했는데, 종교암흑시대에 누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중세기 천 년 동안 배도한 교회의 핍박을 피하여 광야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 중 우리는 왈덴스인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알프스 깊은 산으로 피신하여 모여 살면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희생 정신으로 많은 사업을 해냈습니다. 두아디라 시대에는 교회 성직자와 사제들만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보급하였습니다.

왈덴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왈덴스의 청년들은 목사가 되거나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2년 동안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들의 선교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을 갖고 다니다가 붙잡히면 처형당했기 때문에 왈덴스 선교사들은 많은 성경절들을 외워야만 했습니다. 진리를 찾는 영혼을 만나면 몰래 그들이 외운 성경절을 종이에 써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왈덴스의 청년들은 2년 동안 유럽의 각 도시로 흩어졌습니다. 아무에게나 말을 붙이고 전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점이나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사람들을 살피고 접촉하여 전도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이렇게 2년이 지난 후에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복귀율이 50%도 되지 않았습니다. 매해 50%의 젊은이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50% 밖에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것은 50% 이상의 청년들이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거나 목이 잘리거나 화형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께 바친 헌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생존해서 돌아올 확률이 50%가 안되는 선교사업에 보낼 수 있을까요? 이것이 알프스 산속에서 진리를 지키던 왈덴스인들의 희생이었습니다. 왈덴스 청년들의 목숨을 건 선교사업은 6백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왈덴스인들은 나중에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 조차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이 죽어서 가문이 끊어지는 가정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왈덴스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헌신은 후에 종교개혁 운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시발점에 되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개신교회가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왈덴스인들의 역사는 오늘날 얄팍하게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을 뜨겁게 만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하늘에는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불리우는 교리는 “세속적으로 살아서 부끄럽지만 하나님이 봐줘서 겨우 구원받게 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교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일곱 교회 예언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왈덴스인들의 피 묻은 생애 앞에서 어떻게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한 번 믿으면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를 버릴 수 없고,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왈덴스인들의 생애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회개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책망의 말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예수께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 가운데 가장 길고 강력한 책망의 말씀이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졌습니다. 세속화되고 이교의 교리를 받아들인 두아디라 교회를 표상하기 위해서 이세벨만큼 적절한 표상은 없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여제사장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바알신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세벨은 결국 국가 권력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전체가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 앞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배도를 책망하면서 3년 반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대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아합 왕과 이세벨의 추종자들은 엘리야의 개혁의 호소를 듣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에 있었던 이런 역사가 두아디라 교회에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네가 영적 간음과 우상숭배에 빠졌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영적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배도에 빠지게 된 것처럼, 두아디라 교회시대에 교회 지도자들은 태양신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간음에 빠졌고, 우상숭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아합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이세벨이 우상숭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요했던 것처럼, 두아디라 교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서 각종 거짓교리와 우상숭배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버가모 교회 시대에 기독교회와 태양신교의 혼합으로 뒤섞여졌던 거짓 교리와 우상숭배가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서는 여러 차례의 종교 회의를 거치면서 교리화되어 천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적 진리가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음과 같은 본 모쉐임의 증언은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감독들은 이전에 희랍과 로마의 이방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종교 의식과 제도를 조금씩 고쳐서 기독교 교회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 개종한 이교도들은 조상 때부터 전래되어 온 의식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고, 예수님과 성자들도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신과 같은 방법으로 숭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이교도들이 좀 더 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자, 곳곳에 태양신전과 유사한 거대한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교회마다 여러 가지 그림들과 조각된 우상들로 단장함으로써, 외관상으로나 내면적으로 이교도들의 신전과 흡사한 것이 되었다.” (J. L. Von Mosheim, Ecclesiastical History, I, 369).

실제로, 8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각종 성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것들에 입맞추고 기도하며, 분향하고, 절하는 일이 극에 달해서, 오히려 우상을 섬기지 않는 회교도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조롱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두아디라 시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서 보내신 종이었을까요? 구약 시대 아합 왕과 이세벨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두아디라 시대에도 엘리야와 같은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당신들이 이세벨과 행음했다.”라고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성서적 진리로 인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칼과 창 앞에서 거짓교리와 우상숭배를 곧바르게 지적했던 사람들이 예수께서 보내신 사자들이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진리를 말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양심의 음성을 죽이고 살았고, 그 결과 교회는 천 년 이상 동안 영적 대기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이세벨 시대에 배도와 우상숭배 때문에 3년 반 동안 기근이 있었던 것처럼, 두아디라 교회에도 천 년 동안 길고 긴 말씀의 기근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과 백성들을 광야와 산으로 피신시켰기 때문에 유럽 대도시의 교회들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도시의 교회에 남아있던 교인들은 심령의 부흥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극심한 영적 기근을 겪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 아합 왕과 이세벨의 추종자들이 엘리야가 전한 회개의 기별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왈덴스인들과 개혁자들을 통해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회개하라는 말씀을 보내주셨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계 2:21).

약속의 말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예수님)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iron rod, 철막대기)을 가지고 저희를(두라디라 교회의 악인들)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예수님)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26~29)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의인으로 묘사된 “이기는 자와 예수님의 일을 지키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이세벨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혁의 정신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왈덴스인들과 개혁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사람들을 통해서 할까요? 사실,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는 구태여 인간의 도움이 없어도 됩니다. 천사들이 성경을 번역하고, 책들을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들 수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인간이 예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실까?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예수님의 일을 해야만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깊은 경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해야만 사탄의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는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이 난무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왈덴스인들이 그 시대의 예수님의 일, 즉 복음과 진리를 지키고 고수하기 위해서 알프스 산속으로 들어가서 고생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대다수는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신앙을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두아디라 교회의 배도에 가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클립이나 허쓰나 제롬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대의 예수님의 일, 즉 개혁사업을 하지 않았으면, 그들 역시 두아디라 교회의 수많은 성직자들 중 하나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계 2:28)

예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들과 예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또 하나의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새벽별”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까요? 새벽별(morning star)은 한밤이 지났지만 아직 어둠이 남아있는 이른 새벽에 보이는 별입니다. 그래서 “새벽별” 이라는 표현에는 곧 어둠이 물러갈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칠흙같이 어두운 배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의인들을 위하여 종교암흑의 밤이 아직 지나가지 않은 이른 새벽에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는 위클립, 후쓰, 제롬 같은 개혁자들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중세기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날 것이지만, 두아디라 교회에서 고통당하는 의인들을 위해서 일찍 개혁자들을 보내어 위로하시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

 

에베소교회부터 두아디라교회

3부, 세 번째 교회, 버가모 교회, 타협의 시대

기간: AD 313~538년, 타협의 시대

 

서기 313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이후, 기독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국면 전환이 생긴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탄은 핍박과 죽음으로 서머나 교인들을 협박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한 사람이 순교한 자리에서 백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기독교회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만듦으로써, 교회 속으로 엄청난 돈과 명예와 인기가 쏟아져 들어오도록 유도했습니다. 극렬한 핍박에도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핍박을 중지하고 자유를 허락하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밀라노 칙령, 서기 313년).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AD 313년, 태양신을 섬겼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사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개종하자 그를 따라서 수많은 태양신도들이 기독교회 속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밀려 들어오는 태양신 교도들과 로마 황제의 요구에 따라서 진리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황제는 태양신교 지도자와 기독교회의 지도자를 불러서 태양신교와 기독교회를 적당하게 혼합시킨 종교를 만들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로서 열두 제자들이 세워놓은 교회가 태양신의 이교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상한 종교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이름의 의미

버가모라는 이름의 뜻은 “높은 성, 높이 들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핍박의 시대 동안에도 굳건하게 지켜왔던 신앙이 번영의 시대로 들어서자 믿음의 성채는 무너지고 그 순결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회를 국교로 선포한 이래 교회는 높이 들려졌고 인기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버가모 교회는 세속과 타협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계 2:12)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내셨습니다. 버가모 시대에는 예수님을 왜 그렇게 묘사했을까요? 버가모 교회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좌우에 날 선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세워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신의 우상숭배와 오류가 하나님의 교회로 밀려 들어 올 때, 좌우에 날 선 검처럼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의 방어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

“네(버가모 교회)가 내(예수님)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버가모 교회 시대에 예수께서는 안디바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칭찬했습니다. 안디바는 버가모에서 순교당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안디바(Antipas)라는 이름에는 “Anti-대항하는, Papas-교부”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당시 “교부”라고 불리우던 교회 지도자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안디바(Antipas)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회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인정을 얻고 권력자들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서 타협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안디바”라고 불리우던 소수의 그리스도인 그룹은 타락한 교회의 지도층에 대항해서 일어났습니다. 타협과 세속의 길을 걷던 버가모 교회에 있어서, 안디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높은 성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타협과 배도의 길을 걷던 버가모 교회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 이야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세속화되고, 타락시키는 주역이 되는 시대에는 예수께서 순결한 믿음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는 음성을 내면서 일어섰던 성도들을 칭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버가모 시대에는 부흥과 개혁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나 외치는 종들이 예수께서 그 교회를 위해서 보내신 종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책망

“네게(버가모 교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교리, doctrine)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교리, doctrine)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 15)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에게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인 버가모 교회의 타협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모압왕 발락이 주는 뇌물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모압왕 발락의 청탁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교한 거짓 선지자 발람은 모압왕에게 이스라엘을 타락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발람은 모압왕에게 아름다운 모압 여인들을 모아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보내 유혹한 다음에 이스라엘 남자들이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도하라고 했습니다. 발람이 그런 계략을 제시한 이유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실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압 왕이 이스라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발람의 계략은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고 음란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염병이 돌아서 24,000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발람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하고 이교도들의 신앙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교회가 치명적인 영적 죽음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그런 배도가 생겼던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교리, doctrine)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

기독교회가 3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핍박에 지쳐 있을 때, 이교도인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태양신을 믿다가 갑자기 기독교회로 개종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AD 313년, 기독교회에게 자유와 포교를 허락하는 밀라노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불법 종교로 핍박받던 기독교회가 로마제국의 공식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 황제의 뒤를 따라서 수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엉터리 교인들의 숫자가 급속하게 늘어남에 따라서 기독교회의 부패와 타협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핍박하에서는 순결함을 유지하던 교회가 자유와 물질과 번영이 찾아오면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는 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태양신교를 믿던 로마 황제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기독교회로 개종하자, 그때까지 로마제국를 떠받들고 있던 태양신 교도들은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최고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태양신 교도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그들이 기독교인들과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태양신교의 지도자, 율리우스 피르마쿠스와 기독교회의 감독 유세비우스를 불러서 협상을 했는데, 그것은 태양신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종교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AD 321년).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태양을 숭배하는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보고 그의 영민함에 감탄하고 있다. 이교도의 상징과 날짜, 여러 종교의식들을 기독교 전통에 섞어버렸다. 태양신교와 기독교 양쪽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혼합 종교를 만들어냈다.”(다빈치코드 1권, 351~353).
“교회 감독인 유세비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신학을 태양신의 이교적인 이념과 로마 황제 이념으로 짜맞추어 기독교적으로 변형시켰다.”(Hans F. von Campenhausen, 희랍교부 연구, 대한기독교 출판사, 1977, 93).

이렇게 해서 기독교회 안에 깊은 영적 어둠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오늘날 천주교회의 주요 교리와 가르침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첫 번째 교황을 베드로라고 주장하지만, 태양신과 기독교회의 혼합 형태로 기초를 놓은 천주교회를 열두 제자들과 사도들의 피묻은 진리로 세운 초대 기독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 개종한 태양신 교도들의 요구들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또한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많은 진리를 타협하거나 변경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태양신을 섬기던 우상숭배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자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베드로상, 바울상, 마리아상 그리고 죽은 순교자들의 석상이나 그림으로 대체해서 섬기기 시작했고, 그들의 종교 행습에 따라서 십계명이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이교도들의 영향을 받아서 지옥과 죽음과 영혼에 대한 가르침이 크게 흔들렸으며, 천사와 죽은 성자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태앙신을 섬기던 우상숭배자들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와서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권유와 압박으로 인해서 기독교회 안으로 이교도들의 행습과 가르침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교회 지도자들은 그것들을 허용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서 그런 교회지도자들을 향해서 저항의 음성을 냈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가 모압왕과 공모해서 이스라엘 안으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를 들여왔던 것처럼, 버가모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은 로마 황제와 공모하여 우상숭배와 거짓 가르침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고, 그것이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입니다. “네게 발람의 교훈(교리, doctrine)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

버가모 교회의 신학이 된 나골라당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제1세기의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니골라당의 행위”가 버가모 교회에 와서는 “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으로 발전되고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한 번 빠지면 벗어나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을 포기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태양신교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혼합시킨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니골라당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타협한 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는 순종과 행위에 얽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그런 철학적 주장은 매우 고상하게 들렸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초대 교회부터 3백 년 동안 걸어온 가난과 좁은 길 신앙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골라당 교리는 크게 환영 받는 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태양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니골라당의 교리는 그들의 입지를 지켜주는 강력한 신학이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수많은 성경의 진리가 변질되었고 태양신교의 행습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의 핵심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해방시켰다.”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사탄은 이런 니골라당의 교리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까지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거짓 구원론은 그 원조를 니골라당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뜻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6~18, 22).

버가모 교회에서 발람의 죄에 빠진 지도자들은 돈과 세속과 권력을 탐하였고, 그런 모습을 본 사탄은 버가모 교회 속으로 니골라당의 교리를 깊숙이 밀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영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두려운 사실은, 현대 기독교회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 물결과 안일함과 권력이 현대 기독교회에 깊숙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의 의미를 곡해시키는 니골라당의 주장이 마치 진리처럼 포장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교인들이 불순종과 세속적인 삶 속에서도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호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예수님) 네게(버가모 교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예수께서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인 버가모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셨습니다.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검(칼-말씀)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이 보살피고 인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싸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가 얼마나 악한 것이면 예수께서 직접 검을 들고 싸우겠다고 하셨을까요? 소수의 충성된 안디바는 목숨을 걸고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를 전했습니다. 버가모 시대에는 안디바가 예수께서 직접 붙잡으시고 사용하신 종들이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발람의 죄에 빠진 교회 지도층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약속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the hidden manna)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에게도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의 약속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버가모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는데, 하나는 “감추어진 만나”이고, 다른 하나는 “흰 돌”과 그 위에 새겨진 “새 이름”입니다. 감추어진 만나는 무엇이고, 흰 돌과 새 이름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만나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놀라운 양식을 준비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라!” 이른 아침에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 밖에 나가면, 지면에 내린 만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만나라는 단어의 뜻은 영어로 “What’s this?(이게 무엇이지?)”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왔는데, 그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경이로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내가 곧 명의 떡이로라,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만나)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48~51).

만나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버가모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은 감추어진 만나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 만나는 감추어졌습니다. 왜 만나가 감추어졌을까요? 버가모 교회가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감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사랑한 발람과 같은 교회지도자들이 이교도의 우상숭배와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니골라당 교리를 받아들여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넓은 길을 따라갔기 때문에 버가모 교회에서 만나, 즉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를 먹었는데, 버가모 교인들도 날마다 그렇게 하늘의 신령한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이 발람의 교리를 받아들였고, 니골라당의 교리가 버가모 교회 안에 높이 세워졌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만나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교회에서 올바른 복음과 가르침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교인들은 말씀의 기근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거절한 사람들은 날마나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이 그들에게는 감추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나가 사라진 버가모 교회에서 날마다 예수께로부터 만나를 공급받은 성도들은 이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흰 돌

서머나 시대에는 법정에서 재판을 할 경우, 흰 돌과 검정돌을 사용해서 재판 결과를 나타내었습니다. 흰 돌은 무죄 석방을 나타냈고, 검정돌은 유죄를 나타냈습니다. 또한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을 때에도 흰 돌을 주었는데, 때때로 자유인이 된 사람의 새로운 이름을 흰 돌 위에 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흰 돌은 싸움에서 15번 이상 승리한 투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버가모 시대에 흰 돌은 무죄와 자유와 승리와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거절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흰 돌, 즉 죄를 사해주시고 진리 안에서의 자유와 승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흰 돌을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받아 먹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생애의 주인이 되어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영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세속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말씀이 생애를 인도하여 변화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흰 돌을 받는 경험이고,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새기는 경험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흰 돌 위에 새겨진 이름은 그 사람 자신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

 

2부, 두 번째 교회, 서머나 교회, 핍박과 순교 시대

기간: AD 100~313년(핍박과 순교의 시대, 사도 시대 이후~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회로 개종하기 전까지)

 

서머나 교회는 사도들이 모두 죽고 난 후부터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기 전까지의 교회입니다. 이 시대는 핍박과 순교의 시대였습니다. 제자들과 사도들이 모두 죽으면서 에베소 교회 시대가 끝나자, 그리스도인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외롭고 힘겨운 신앙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탄은 그런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강력한 핍박을 가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뿌리째 뽑아 없애려고 했습니다.

 

교회 이름의 의미

“서머나”라는 이름은 향수의 일종인 “몰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몰약은 그 원재료가 되는 나무를 쳐서 으깰 때에 진한 향기가 납니다. 몰약은 으깨고 칠수록 향기가 짙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로마제국이 가하는 극렬한 핍박을 통과했지만, 그 핍박은 교회를 파괴시키는 대신에 복음이 온 세상에 향수(몰약)처럼 번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머나 교회 시대는 핍박의 시대였지만,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신앙이 승화되고 복음이 온 천하로 전파되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습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 2:8)

예수께서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설명했습니다. 서머나 교회 시대에 예수께서는 왜 당신 자신을 그렇게 묘사했을까요? 로마제국의 원형극장에서 맹수의 먹이로 사라지는 서머나 교인들의 마음속에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께서 나도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부활 신앙이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서머나 교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

서머나 교인들은 큰 환난과 가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눈에는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평생 동안 핍박에 쫓기면서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고난을 위한 부르심에 응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재물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서머나 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난과 핍박은 서머나 교회를 순결하게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습니다. 가난과 핍박은 가라지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지만, 알곡들에게는 거룩함과 충성의 열매가 더욱 풍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가난에 시달리고 핍박 받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탄도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을 퍼뜨리기 어려웠습니다. 예수께서는 궁핍했던 서머나 교회를 가리켜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오직 두 교회만 예수께서 책망하지 않았는데, 그중 한 교회가 서머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굶주린 엘리야를 먹였던 까마귀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던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 시대에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았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때, 가난이 내 인생을 따라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가난을 기대하고 진리를 선택하면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적을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것이 서머나 교인들이 신앙이었습니다.

“네가 장차 당할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 2:9~10)

서머나 교회시대에는 “십 일 동안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 일 동안의 환난”은 얼마나 긴 기간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기간 예언에서 1일은 1년으로 환산하는 것이 예언 해석의 원칙입니다.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민 14:34).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일 일이 일 년이니라”(겔 4:6). 그러므로 “십 일 동안의 환난은” 10년 동안의 환난을 뜻합니다. 서머나 교회 시대에 사탄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통해서 그리스도 교회를 뿌리채 뽑아버리기 위해서 극렬하게 핍박했습니다. 로마제국 황제와 정치인들은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 사이에 인기있는 종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태양신을 섬기는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회를 위험한 정치적 경쟁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디오클레시안 황제 치하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10년간의 핍박, 즉 차기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해서 기독교회에게 자유를 주기 전까지 10년간의 핍박이 가장 극심했었던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AD 303~313년).

그 당시 로마제국의 핍박과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에 대해서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땅에서 없어졌고, 성경은 시장 마당에서 불탔으며 설교자들은 붙잡혀 고문을 받고 원형극장에서 사자들에게 갈기갈기 찢어졌다. 순교자를 죽이는 피 묻은 칼은 무디어지고 부서지기까지 했다. 사형집행자들은 피곤해져서 교대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능력의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로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의 호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

죽음을 위하여 사자굴이나 원형극장에 끌려가는 서머나 교인들에게 예수께서 주신 말씀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였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죽도록 충성해야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설교를 듣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인들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죽도록 충성해야 구원을 지킬 수 있었는데, 21세기에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값싸고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평생 동안 가난과 환난 속에서 충성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믿었는데,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구원받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살아도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 죽도록 충성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그렇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머나 교인들은 운이 없어서 어려운 시절에 태어났으니 힘들게 구원을 받아야 하고, 현대인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났으니 쉽게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원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동일합니다. 일곱 교회 시대 중 어떤 시대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든지 간에 성경 말씀에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들만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일곱 교회 예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을 공부하면, 오늘날 기독교회에 난무하는 거짓 복음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핍박과 가난이라는 시험을 받았지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풍요로움과 이기심이라는 시험을 받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평화롭고 모든 것이 풍족할 때, 오히려 교회가 신앙을 잃어버리고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크게 배도하는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서머나 교인들보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이 사탄의 더 큰 유혹과 기만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순교보다 더 어려운 것은 돈과 세속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돈과 세속에 지배당하지 않고 순결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서머나 교회 시대에도 오직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자들만 사탄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충성된 마음으로 순교와 가난의 길을 걸어간 성도들을 “이기는 자”라고 부르셨고, 그들에게 결코 둘째 사망(지옥불의 멸망)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

 

1부, 첫 번째 교회, 에베소 교회 사도 시대, 초대 기독교회

1세기 교회, The First Century Church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그 시대에 전파되어야 할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홍수가 오니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는 기별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고,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은 멸망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을 보내주셨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사탄의 기만과 세속으로부터 빠져나와 구원받았는데, 이것이 일곱 교회 예언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도시대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도 그 시대에 반드시 순종해야 할 말씀을 전하는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에베소 교회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예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시대 사람들은 사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받거나 거절하는 태도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 교회 예언을 살펴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구원의 도가 실제적으로 어떤 경험인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예언 속에 나타나 있는 성도들의 승리와 패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인지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는 과거의 교회가 있고, 현재의 교회가 있으며, 미래의 교회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있는 구원의 복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 이름의 의미

일곱 교회의 이름 속에는 각 시대의 교회가 갖게 될 특징과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에베소”라는 이름은 “바람직한, 흠모할 만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세운 서기 1세기의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이 퍼부어진 교회이고 신약성경을 기록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제자들과 사도들로부터 직접 말씀을 전수받았고, 그들이 가진 신앙을 실제로 목격했던 교회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았을 뿐 아니라 진리를 가진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실제로 보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온갖 오류와 거짓 복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순결했고, 진리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진정 “바람직하고 흠모할 만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칭찬

칭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계 2:2)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는 로마제국 황제의 핍박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열심과 수고로 일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성경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생애를 바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이 점에서 큰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편안하고 너무나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없는 신앙입니다. 너무나 편하게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강조하면 율법주의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신앙은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강조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칭찬을 살펴봅시다.

칭찬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계 2:2)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행위와 수고와 인내”의 신앙을 무시하고 교회의 표준을 떨어뜨리며 세속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오는 자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악한 자를 용납치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악한 자를 용납치 않기 위해서 말을 하고 설교를 하면, 인기를 잃어버리고 사랑이 부족하고 까다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용납지 않는 일은 성령으로 감동된 거룩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신에 대한 평판과 인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를 용납치 않는 일은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과 영혼을 사랑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칭찬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거짓 사도의 정체를 드러낸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서 “자칭 사도라고 하지만 아닌 자들”이 누구인가요?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사도를 보내지 않으셨는데, 에베소 교회에서 자기 스스로 사도 행세를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보내지 않았는데, 이 땅에서 자기 스스로 하늘로부터 보낸 자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 자들을 시험해서 그 정체를 드러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시험했을까요? 성경 말씀으로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가르침을 시험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삶의 열매가 거룩한가를 시험했습니다. 이것이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고 판단하는 방법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이런 점에 있어서 매우 철저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이 말씀이 어떤 장면입니까? 어느 날 사도 바울이 베뢰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그 당시 그들이 갖고 있던 구약 성경과 비교하면서 검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칭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던 성경 중심의 신앙이었고, 예수께서는 그런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

칭찬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3)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열심히 일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 행복과 내 축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예를 높이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신앙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미워하는 니골라당

앞에서 살펴보았던 요한계시록 2장 2절에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이라고 했는데, 사탄이 에베소 교회에 들여보냈던 “그 거짓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네가(에베소 교회)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예수님)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 니골라당의 행위가 무엇인데, 초대 교회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것을 미워했으며, 예수께서도 그것을 미워했을까요? 성경 낱말사전은 니골라당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번 믿은 뒤에는 무슨 행동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니골라당은 그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를 믿고 받아들인 무리들입니다. 영지주의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도덕적 삶을 살기 살기 위해서 구태여 육체의 정욕과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물질과 육체는 악할지라도, 영은 항상 선하기 때문에 방탕하고 죄된 삶을 살아도, 영의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들이 기독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성결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순종과 거룩함의 열매가 그 생애에 맺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현대 기독교회에 들어온 니골라당의 교리입니다. 현대판 니골라당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도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일어선 에베소 교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절).

예수님의 책망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5)

순결했던 에베소 교회도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전해 준 진리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했는데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언제, 어떻게 버리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조직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나자 한 사람 한 사람 연로한 기수들이 그들의 자리에 쓰러져 갔다. 초대 교회를 세운 열두 제자들과 사도들의 짐을 넘겨받아야 할 젊은 사역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반복된 진리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옛 신앙을 싫어하게 되었고 신기하고 놀라운 어떤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켰지만, 복음의 근본 원칙에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교리를 도입하고자 하였다”(The act of the apostles, chapter 1stcentry church).

초대 기독교회를 세운 제자들과 사도들이 하나씩 죽어갔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던 베드로도 죽어서 흙이 되었고,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당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남기셨던 말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재림의 약속이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세운 나이 든 장로들이 순교하면서 젊은 세대가 올라왔는데, 그들은 더 이상 핍박 받으며 가난하게 살기르ㄹ 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좁은 길을 걸으라고 호소하는 설교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롭고 신기하고 놀라운” 복음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옛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 교회를 불타게 만들었던 “처음 사랑”이 식어지면서 좁은 길을 떠나게 된 과정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교파나 교단에서 이러한 역사는 반복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 교회를 세운 선조들의 정신과 신앙을 잃어버리고 세속화 되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그 당시에 이미 “불법의 비밀”이 역사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만일 너희가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두려운 경고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을까요? 교회에는 진리가 있어야 하고 그 진리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불타오름으로서, 교회라는 촛대가 환하게 빛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이 식어지면서 진리가 흔들리고 성령의 은혜가 사라졌습니다. “처음 사랑”이 식어지면서 예수께서 칭찬하셨던 신앙의 특징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에 선한 행위가 없어졌고, 참고 인내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으며, 악한 자들이 교회 안으로 세속과 죄를 끌어들일 때 그것을 용납하는 교회가 되었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이 나타나도 그들을 시험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나 개인이 영적으로 몰락하게 될 때 이런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셨던 특징들이 사라지자, 에베소 교회에서 분명한 빛이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빛이 나오지 않는 촛대가 되어버리고만 것입니다. 빛이 나오지 않는 교회는 그냥 건물이고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께서는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진 지 반세기가 지나면서 “처음 사랑”이 식어갔는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보내신 종들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책망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 시대에서는 그런 설교자들이 예수께서 직접 붙잡고 계시는 종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새로운 복음과 교리를 받아들이려는 젊은 세대를 책망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설교하는 사람이 예수께서 보내신 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보낸 사자들은 “우리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라고 설교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각 시대마다 성도들은 말씀을 분별하는 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주께서 보내신 종인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분별치 못하면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일곱 교회 예언을 통해서 각 시대의 교회에게 책망의 말씀을 주셨는데 누가 그 책망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신실하게 전했는가를 살펴보면, 그 시대에 하나님의 종이 누구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종들이 누구인지를 분별하는 중요한 원칙이고, 그런 원칙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에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처음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값싼 감정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자신 전체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설명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신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랑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가 지키라고 명한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에베소 교회에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행함을 만들어 내고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4:15).

예수께서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성도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언제부터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말씀을 읽되, 눈으로만 읽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한 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애통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와 부족을 변명하고 합리화시키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고집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생애의 수치스런 곳들을 보여주시며 무엇인가를 고치라고 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받아들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 치유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첫사랑의 순수함과 열정을 회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귀 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귀 있는 자들만 양심을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순종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귀 있는 자들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통해서 유대교회에게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요한은 유대교회를 향하여 귀 있는 자들만 들을 수 있는 설교를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7~10).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누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회개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 교회에게 하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유대교회 지도자들은 침례 요한을 교회를 비난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들이 핍박당하고, 매를 맞고 목이 잘려 죽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평판이나 외모나 지위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그를 인정하는가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 사람의 말하는 바가 진실되고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을 살펴보면, 각 시대마다 성령이 교회에게 전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곱 교회에게 보낸 기별을 보면, 각 시대마다 이기는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도 오직 이기는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이긴다는 말인가요? 죄와 세속과 거짓 가르침의 미혹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분별하고, 진리를 분별한 사람들은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신앙과 삶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

 

서론, 일곱 교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나침반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사명>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씩 공개해 나갈 것입니다. 이번 달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 번째 예언, 일곱 교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는 우리의 마음이 잠시 이 땅을 떠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붙잡혀 있는 마음으로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전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 나타나 있는 하늘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땅의 세속과 욕심과 이기심으로부터 몸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마음속에 하늘의 계시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빛의 교회와 어둠의 교회

<마지막 사명> 4호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 땅에 교회가 생긴 이후 지금까지 두 교회가 존재해 왔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는 빛의 교회와 어둠의 교회, 두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여러 교파들이 보이고, 수많은 교단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는 오직 두 종류, 즉 빛의 교회와 어둠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 번째 계시인 일곱 교회 예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부터 재림 때까지 각 시대마다 두 종류의 교회가 존재했으며, 그 두 교회 사이에 어떤 투쟁이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각 시대마다 사탄이 어떻게 교회를 공격했으며, 그때마다 어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일곱 교회 예언이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는 어떤 믿음과 신앙을 가져야만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빛의 교회에 속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기 직전의 마지막 시대 교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예언을 연구할 때, 우리의 마음은 이 땅을 떠나서 요한계시록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곱 교회 예언을 통하여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곳저곳을 다닐 것인데, 가는 곳마다 우리의 식어버린 믿음을 깨우는 사건들을 볼 것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 속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들과 사도들이 세운 초대 교회의 신앙을 볼 것이고,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사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께서 어떤 믿음을 칭찬하고, 어떤 신앙을 책망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이 일곱 교회 예언입니다.

일곱 금촛대와 일곱 별

요한계시록 1장 11절 이하부터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의 서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로되 너는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11~20).

일곱 교회 예언에서 예수께서는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그러므로 이 장면은 예수께서 각 시대마다 교회를 돌보시기 위해서 봉사하시는 모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예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계 1:20).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각 시대마다 당신의 오른손으로 붙잡고 사용하시는 종들을 교회에게 보내주십니다. 교회가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사탄의 미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신실한 종들을 보내주시는 장면이 일곱 교회 예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종들을 보내실 때, 교회가 어둠의 세력에 의해서 주도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핍박과 순교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빛의 세력이 교회를 주도하면, 예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보내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세속과 거짓 복음이 물리쳐지고 부흥과 개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모습입니다.

빛과 어둠의 세력이 투쟁하는 교회역사에서, 빛에 속한 교회가 세상에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각 시대마다 당신의 증인들을 통해서 진리와 참된 신앙을 보존해 오셨습니다. 과거 2천년 동안 그들을 통하여 진리의 횃불은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 시대에도 진리의 횃불을 신실하게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 예언은 누가 하나님의 종이고, 누가 사탄에게 기만당했는지를 구별하는 영적 안목을 우리에게 줍니다.

빛과 어두움의 전쟁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그 투쟁이 극심해질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심으로써, 교회를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 교회 예언에 대한 기사들을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예언 연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곱 교회 예언을 공부하고 나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곱 교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우리의 마음을 채울 때 우리에게 계시의 눈이 생기고 영적 통찰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일곱 교회 에언에 대한 성경 학자들의 견해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을 주시면서, “네가 본 것(과거)과 이제 있는 일(현재)과 장차 될 일(미래)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19).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즉, 사도 시대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사탄의 끊임없는 도전과 공격 속에서 걸어나가는 과정을 그 시대적 특성에 따라서 일곱으로 나눈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게 보낸 사도 요한의 서신을 그 당시 즉, 1세기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에게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편지들은 예언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은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일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아울러 일곱으로 나누어진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게 될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윌리엄 멕카렐, 교회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일곱 서신).

“일곱 교회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대표한다.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각 시대마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도덕적 수준이 어떻게 변천하여 나갈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캠브리지 바이블).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가장 적절한 분석은, 일곱 교회는 연속적으로 전개되어온 그리스도 교회 역사에 대한 예언적 묘사라는 것이다. 즉,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타락과 회복 그리고 실패와 회개의 연속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A.J. 골든, The Sprit of Ministry 132페이지). ■

5호를 시작하며…

마틴 프로비셔는 탐험가인 동시에 해적이었습니다. 1576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마틴프로 비셔에게 캐나다 북쪽에 있는 바핀섬에서 금을 가지고 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마틴 프로비셔가 바핀섬에 도착하자 이곳 저곳에 널려 있는 황금색의 광석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습니다. 그는 약 200톤이나 되는 광석을 배에 가득 싣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즉시 그는 광석을 시험하고 제련했는데, 그 결과 그가 가지고 온 광석은 모두 값싸고 쓸모없는 황철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마틴 프로비셔는 색깔이 노랗다는 이유 하나로 아무 쓸모 없는 광석을 금광석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사명>은 이번 호에서 황철광이 아닌 진짜 금광석 예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 번째 예언인 일곱 교회 예언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장면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일곱 교회 속에서 투쟁해 온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세우면 사탄이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거짓 교리를 들여보내고, 그렇게 되면 다시 예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교회를 경고하고 말씀을 세우시는 모습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시대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시대까지 누가 하나님의 종이고, 그들이 어떤 말씀을 전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곱 교회 예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영적 통찰력을 가져다 줍니다.

많은 분들이 요한계시록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 예언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예언이고, 지금 이 시대를 위한 중요한 말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사명>에서는 이번 달과 다음 달에 걸쳐서 일곱 교회에 대한 특별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일곱 교회 예언을 그리스도인들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디서 떨어져는가를 살펴보고 원래의 신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