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미국 애틀랜타에서 중년 부부가 교통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마 전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이 32살의 젊은 여의사가 폐암에 걸려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 후쿠오카 원자력 발전소에서 흘러나오는 방사능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그늘 아래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신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번 호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편집실>
몇 해 전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 대규모의 허리케인이 불어닥쳤습니다. 큰 재산 피해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허리케인에 가족을 잃고 전 재산을 잃은 어떤 사람이 너무나 원통해서, 플로리다 주 지방 법원에 하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 사람은 고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번 허리케인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모든 피해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플로리다 주 지방 법원에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법정에 피고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재판 날짜가 되자, 법원 앞에는 여러 언론들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법원 앞에 모여서 “과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피고석에 앉으실까? 누가 어떻게 변론할까? 검사는 하나님을 상대로 어떤 논고를 내릴까?”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판 시간이 되자, 법정 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공고가 붙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셨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재난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재난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재난이 전혀 없는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재난도 없었고 불행과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땅에서는 가시나무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독초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생겼고, 질병과 고통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재난과 고통은 마귀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고통과 재난의 책임은 마귀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재난과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그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상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재난이 생기고, 사고가 나고, 병에 걸리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암에 걸려야 하나요?”라고 말하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재난과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재난과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연히 실로암을 지나가고 있는데 망대가 무너져서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죽은 사람들이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숙덕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숙덕거림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눅 13:4, 5).
예수님의 답변은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 교회의 본부와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보다 더 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망대에 깔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악하고 죄가 많아서 교통사고가 나고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악하고 죄가 많아서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사탄이 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없는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지구를 사탄의 손으로부터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때까지 재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재난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시 118:5).
우리가 고통 중에 여호와를 찾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정말 내 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두려움, 억울함, 좌절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통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내 편이 아니라, 남편이 내 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어떤 역경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우리의 마음에 가장 분명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서 위로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고난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전체 숲을 보지 못하고 몇 그루의 나무를 보고서 쉽게 실망하고 원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하늘에 간 다음에야 비로서 우리가 받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시종일관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통의 문제를 한 장의 자수로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자수의 뒷면을 볼 때, 거기에는 여러 색깔의 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수의 그림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수의 앞면을 보면 거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고통의 문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고통을 볼 때 비로소 그곳에 아름다운 질서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번 <마지막 사명>에서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는 이유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마다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하늘이 주는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