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기

 

빌립보서 1: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어떤 사람들은 영혼불멸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순간 즉시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을 기대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5-17)

 

바울은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때가 언제라고 말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재림하셔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죽거나 살아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골로새서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때가 나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재림)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그리스도를 만나는 3단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3단계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1)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2) 내가 다시 와서 3)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단계를 설명하시면서, 첫째 단계로, 예수께서 “처소를 예비”해야 하고, 둘째 단계로 예수께서 “다시 와”야 하며(재림), 셋째 단계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는 것(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니”(빌 3:10,11)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7,18)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죽는 순간에 즉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도 남기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약성경에 나오는 “육신을 떠나서”라는 표현은 죽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라는 표현은 재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부활의 날까지 무덤 속에서 쉬고 싶다는 말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6-8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 말씀에도 “주와 함께 거”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성경절을 이용하여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곧바로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수 있다”는 교리를 주장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언제부터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고린도후서 5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관을 버리고, 이 성경절의 앞에 나오는 1~4절까지를 읽어보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한다”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바울이 하늘을 사모하면서 죽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어서 썩어져 없어질 자신의 몸을 “장막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란 말씀의 의미는 죽음을 뜻합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면서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벧후 1:14) 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는 무엇일까요? 4절에 대답이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때, 즉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받게 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신령한 몸을 받기 원하는 마음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신령한 몸)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말에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더욱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얼마나 분명합니까? 바울은 육체를 벗어나기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마지막 부활의 날에 새로운 몸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영혼과 죽음과 부활의 사상이 크게 왜곡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