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영혼불멸설과 최후의 기만

모든 거짓말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사탄은 왜 “몸은 죽어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설을 퍼트렸을까요? 왜냐하면 사탄과 악령들이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가장하여 나타나서 사람들을 속이고 온갖 미신으로 사로잡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영혼불멸설을 토대로 귀신이나 죽은 자의 영혼과 교통하는 강신술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영혼불멸설과 강신술을 통하여 굿을 하는 무속신앙으로부터 시작해서 뉴에이지와 심령과학에 이르기까지 가면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에게 나타난 죽은 사무엘은 누구인가?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사탄이 강신술을 통해서 사울 왕을 미혹하는 데 성공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자 그는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사울 왕은 신접한 여인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삼상 28:11). 신접한 여인은 사울 왕의 요구에 따라 죽은 사무엘을 불러냈습니다.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삼상 28:13,14)

 

영혼불멸설을 믿는 사람들은 여기에 나타난 사무엘은 당연히 죽은 사무엘의 영혼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십시오. 죽은 사무엘이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연기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이 영혼불멸설인데, 죽은 사무엘의 혼백은 어떻게 “겉옷을 입”고 있을까요? 참 이상하지요? 또한 영혼불멸설에 의하면,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있던 사무엘 선지자의 혼은 하늘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여기서는 “한 노인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삼상 28:13).  왜 하늘에 가 있던 사무엘의 혼이 땅에서 올라왔을까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접한 여인의 부름에 응해서 나타난 사무엘은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천국에 있는 사무엘의 영혼을 신접한 여인의 요구대로 지구로 내려가도록 보내주었을까요?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0-12)

 

성도 여러분, 신접한 자의 강신술을 금지하신 하나님께서 신접한 자의 요구에 응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 왕 앞에 나타난 것은 죽은 사무엘 선지자가 아니라 사무엘의 혼백으로 위장한 악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얼마든지 그런 이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불멸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앞세우고 나타나는 사탄의 강신술에 무방비 상태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링턴 부인과 돌아온 남편

1960년대에 버지니아 주에 두 자녀를 가진 해링턴 부인에게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해링턴 부인의 남편인 브라이언이 월남전에 참전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미 육군성으로부터 남편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날아오게 된 것입니다. 큰 슬픔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는 해링턴 부인에게 하루는 이웃에 살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링턴 부인! 남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당황한 해링턴 부인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친구는 자기가 강신술을 하는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강신술사에게 부탁하면 죽은 영혼을 불러내어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때 해링턴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부활의 아침까지 잠자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완강하게 부인하는 해링턴 부인의 반응을 보면서, 친구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한 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남편이 너무나 보고 싶어진 해링턴 부인은 남편의 혼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면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해링턴 부인은 남편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서 강신술 교회에 가기로 했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초청하는 강신술사와 만나서 부인은 남편에 대한 인상착의와 형편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강신술사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남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벽에서부터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스며 나오는 것 같더니, 해링턴 부인 앞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남편이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놀란 해링턴 부인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남편을 만났다는 기쁨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로 해링턴 부인은 남편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강신술사를 찾아가서 죽은 남편을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몇 달이 지나고 해링턴 부인집에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빠가 돌아왔다!”고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란 부인은 기절할 뻔했습니다. 남편이 바로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니, 여보! 당신 이제 이렇게 돌아다닐 수가 있게 됐어요? 내일 내가 강신술 교회에서 당신을 만나러 갈 참이었는데…” 그때 남편은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여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내가 돌아왔소! 당신의 남편, 브라이언이 살아서 돌아왔단 말이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실종되었는데, 국방성에서는 내가 죽은 줄로 알고 사망 처리를 한 것이오. 여보, 나는 지금 막 월남에서 돌아오는 참이오!” 두 자녀를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남편을 보고 해링턴 부인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부인으로부터 지난 몇 달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은 남편도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해링턴 부인이 강신술 교회에 가서 만났고 집까지 찾아왔던 남편의 영혼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그것은 남편의 영혼을 가장해서 나타난 악령입니다. 악령의 정체는 말씀으로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는 결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죽은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라”(욥 7:9,10)

 

만일 독자 여러분 앞에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가족 중 누가 갑자기 나타났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앞에 나타난 죽은 자의 혼이 하늘에서부터 전해줄 기별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신뢰하겠습니까? 영혼은 죽지 않고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믿으면 사탄을 향하여 미혹의 문을 크게 열어놓는 것입니다. 영혼불멸설은 사탄의 무서운 무기입니다.

 

죽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존재는 누구인가?

태초 이전에 하늘에 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 사탄과 악한 천사들이 지구로 쫓겨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사탄)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 12:7-9)

 

성경에는 악의 영들이 여러 가지 이름, 즉 귀신, 악령, 미혹하는 영 등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들은 모두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과 악한 천사들입니다. 사탄과 악한 천사들은 죽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 살아 있다는 영혼불멸사상을 믿으면, 사탄과 악령이 죽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도 악령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신학적 바탕을 갖게 됩니다. 사탄과 악한 천사들이 죽은 자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 얼굴과 말씨와 음성이 죽은 가족이나 친구를 너무나 닮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앞에 나타난 사탄의 천사를 죽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의 혼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경은 귀신의 정체를 사탄과 악한 천사라고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나 사귀를 죽은 사람의 혼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귀신, 즉 악한 천사에 의해서 사로잡혔을 경우에 악한 천사를 내어 쫓아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죽은 자의 귀신을 쫓아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가끔씩 그런 기도가 응답되어서 기적적인 치유의 은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행하는 이적입니다. 사탄은 어떤 사람에게 질병을 주었다가 질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갑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진리의 말씀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 기독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월간지인 투게덜(Together)에서 낼 박사(Dr. Nall)는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영원한 우정의 연합을 이루게 한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킨다.”

 

오래전에 영국의 교회에서도 죽음과 영혼에 대한 문제를 조사했는데, 그들도 죽은 자와 접촉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어떤 교리나 신조도 죽은 자의 영들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과 상반되지 않는다.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나면, 세상을 떠난 친구들과 접촉해온 사람들의 경험을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영혼불멸 사상은 강신술과 반드시 연결됩니다. 영혼불멸 사상에서 강신술로 옮겨가면 그때부터는 사탄과 악령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부터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강신술을 그토록 엄하게 금하신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과 죽은 자의 영들

사탄은 중세기 종교암흑기에 “영혼불멸설”을 천주교회에 깊이 심어놓았고, 그것을 개신교회 전체에 뿌려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성경을 제외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몸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불멸한다”는 사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영혼불멸설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이루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사탄의 목적은, 마지막 때 죽은 자의 혼으로 나타나서 온 세상을 이적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짐승의 표 환난은 “큰 이적”과 함께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3,15)

 

만일 사탄이 약 5천 년 전에 죽은 노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기독교회가 어떻게 반응할까요? 만일 사탄이 약 2천 년 전에 죽은 사도 바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기독교회가 어떻게 반응할까요? 영혼불멸설에 깊이 빠져 있는 기독교회는 “죽은 사도 바울이 살아났다!”고 소리치면서 환호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짐승의 표 환난은 엄청난 이적과 함께 시작될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하늘의 이적처럼 보이는 증거가 나타나기 때문에 온 세상이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의 종교들 사이에 있는 사상과 교리의 벽이 무너지면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과 죽은 자의 영들

죽은 자의 영들이 하는 활동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더러운 영들이 온 세상 임금들을 거짓 이적으로 미혹해서 하나로 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온 세상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3,14)

 

귀신의 영들이 온 천하 임금들 앞에서 “이적을 행하여” 미혹하는 일들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요? 최후의 미혹이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더러운 영을 가진 영매들이 대통령과 국가 원수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정치인들 속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점성가 조앤 퀴글리 여인은 자신의 점성술을 통하여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인 낸시 여사에게 여러 가지 정책들을 결정해주었으며 그러한 자신의 점성학적 결정이 세계 역사의 흐름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 심지어 그녀는 대통령의 일정표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분초까지 표시된 세밀한 일정 계획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1990년 3월 16일 자, The Morning News Tribune)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사는 “영혼불멸설과 강신술”의 위험을 아는 성도들만 그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기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오래전에 미국 국회의원의 ¼ 이상이 정기적으로 죽은 자의 혼과 접촉하는 영매들에게 의견을 듣고 있다는 보도가 뉴스로 발표되었습니다.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민주당 의원이며, 미래문제연구위원회의 의장인 챨리 로즈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낸시 레이건 여사에게는 영매 친구들이 많이 있다. … 워싱턴 정가는 영매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미국 하원의원의 약 25%는 영매와 강신술에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챨리 로즈 의원이 운영하는 미래문제연구위원회를 통하여 영매들이 국회에 진입하여 의원들과 접촉하고 있다.’ … 소식통에 따르면, 많은 국회의원들이 정기적으로 점성술사나 영매들을 만나서 상담하고 있다고 한다.”(1988년 12월 5일 자, U.S. News & World Report)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강신술사와 영매들이 미국 국회 건물까지 들어와서 정기적으로 상담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죽은 자의 영으로 가장해서 미국 국회와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신교국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기독교회가 영혼불멸설을 받아들임으로써 악령들이 죽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강신술에 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강신술과 영매는 정치뿐 아니라 국방부와 정보부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미국의 군부와 CIA는 소련의 무기와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의 움직임을 살피는 첩보 활동에 가끔씩 영매들의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 … 어떤 국회의원과 그들의 비서진들 그리고 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영매들과 상담하였다.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인 클레이본 펠 의원은 죽은 친척과 대화를 나누었던 사실을 시인하였다.”(1988년 12월 5일 자, U.S. News & World Report)

 

귀신의 영들이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영혼불멸설을 통해서 온 세상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신 신접한 자들이 세계 정치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호소

성도 여러분, 이제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고 있는 사탄의 전략이 보이십니까? 사탄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영혼불멸 사상을 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놓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은 사람들 모두 죽은 사람의 혼백이 살아서 나타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미혹당할 것입니다. 사탄과 악령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보아야만 최후의 미혹에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악령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사탄과 악령들은 죽은 자의 혼과 접촉하는 강신술을 통해서 교회와 정치를 하나로 묶어가고 있습니다. 짐승의 표 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면 죽은 자의 영들에 미혹된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을 위한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을 깊이 살펴볼 때입니다. 교파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만이 여러분을 하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진리를 구하는 성도만이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사탄의 미혹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미혹과 속임수를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혼불멸 사상에 너무나 깊이 젖어 있기 때문에 영혼과 죽음에 대한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영혼불멸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어보거나 의논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덮어두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기도하면서 말씀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사명 22호와 23호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시면 진리를 분명하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확신을 주실 것입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말씀을 보다 깊이 있게 공부하기 원하는 분들은 마지막 사명 사무실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책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

질문12, 개신교를 세운 종교개혁자들은 어떻게 믿었습니까?

틴데일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인 틴데일은 헬라어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함으로 화형을 당하여 순교했습니다. 그는 중세기의 천주교회가 가르쳐온 영혼불멸과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서 천국이나 지옥 또는 연옥에 간다”는 가르침을 부인하였고 재림 시에 있을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소망으로 제시했습니다. 틴데일은 목숨을 걸고 교황과 천주교회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논박했습니다.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순간마다 바라보도록 강조하고 있다. 이교의 철학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영혼은 언제나 살아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가르침을 섞어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조화될 수가 없다. … 내게 말해보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과는 달리 새삼스럽게 부활을 받아야 하는가?”(D. Neal, History of the Puritans, Vol. 1, 269)

 

틴데일은 영혼불멸 사상과 부활신앙은 논리적으로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천주교회를 향해서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들이 천국이나 지옥 또는 연옥에 가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부활은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틴 루터

마틴 루터는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조 신조에서 “영혼불멸이라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 천주교회의 교리집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라고 논박하였습니다(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6 by Petavel). 종교개혁 운동의 선봉장인 마틴 루터는 교황의 면제부 판매를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죽은 자의 죄를 면제해준다는 천주교 교리는 영혼불멸 사상을 근거로 해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연옥과 죽은 성자 숭배를 부인하였고, 죽음을 무의식의 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죽는 순간까지 영혼과 죽음에 대한 진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단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자, 그들의 스승인 루터가 마치 영혼불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마틴 루터가 생명을 걸고서 사수한 진리의 빛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18세기 성공회 학자이며 사제인 블랙번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자신들이 이단이 될 것에 대한 어리석은 염려 때문에 스승(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대신, 자신들의 스승은 결코 그런 교리를 고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증명하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A Treatise in Millennium, Vol. 2, 328)

 

그러나 다음과 같은 글은 마틴 루터가 생전에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 아들의 고귀한 피를 통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그것을 깊고 달콤한 잠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을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기보다는 무덤 속에서 무의식 상태로 잠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나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진리로 판명될 수 있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도다 …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는 죽었느니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11-24). ‘가라사대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마 9:24).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완전히 거부하였다. 땅속에서 부패된 육체가 다시는 부패되지 않을 몸으로 영광스럽게 일어나게 될 것이며, 연약한 육체가 강력한 힘을 지닌 몸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Christian Song Latin and German, for Use at Funeral, 287)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마틴 루터여,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서 무덤의 문을 두드리실 때까지 나는 잠자고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즉시로 일어나서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이다.”(The Christin Hope, p.37)

 

존 밀톤

“실락원”의 저자인 밀톤은, 영혼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방 종교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 자체가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합성시키거나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두 개의 다른 존재, 즉 영혼과 몸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사람 자체가 살아있는 영혼이기 때문에, 영혼은 몸, 이성, 감각, 활동력, 개성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에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는데, 인간의 몸에 생명의 호흡이 불어넣어지는 순간, 인간은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되었다.”(The Prose Works of John Milton, Vol. 4, p.188)

 

“죽음이란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하는 견해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사람이 죽을 때, 어떤 부분이 분리된다는 말인가? 영혼이 분리되는가? 만일 그렇다면, 몸은 어떻게 되는가? 영혼은 살아있고, 몸은 죽어 있는 상태를 어떻게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죽어 있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있는 상태를 어떻게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상동, p.279)

 

양심과 성경으로 지켜온 부활신앙

틴데일의 제자인 프리드는 영혼불멸을 반대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1575년 7월, 종교개혁자인 테르우르트와 피터스가 동일한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1611년 4월, 레가트와 위트만 역시 동일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죽기 직전에 엘리자벳 여왕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들의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26:19, 요한복음 11:25, 다니엘 12:2, 요한복음 5:25, 고린도전서 15:22,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기록된 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무덤에서 성도의 몸이 일어날 것이며, 그때에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7세기 초에는 재침례파의 교리와 회중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인 침례교회가 영국과 화란에서 형성되었는데, 일반침례교(General Baptist)로 알려진 그들은 영혼불멸설을 부인하고 부활 때까지 무덤 속에서 무의식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660년 약 2만 명 이상의 침례교인들이 서명한 25개조의 신조에는 이러한 그들의 신앙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실락원의 저자이며, 학자이며 시인이며 정치가인 밀톤에 의해서 퍼져나갔습니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헬라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스테그만에 의해서 영혼에 관한 진리가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 성직자들이 교권과 교파에 얽매여서 교단 간에 높은 담을 쌓는 동안, 각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 지식인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진리를 회복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산소를 발견한 과학자인 프리스틀리,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 경,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자인 휘스톤 등은 과학자요, 신학자로서 영혼불멸설을 공개적으로 부인했으며,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요, 신학자인 아이삭 왓츠는 초기에 받아들였던 영혼불멸 사상을 버리고 성경의 진리로 돌아섰습니다. 오늘날까지 성경주석학자로 손꼽히는 루터교회의 히브리 학자인 프렌츠 델리취는 자신의 구약성경 주석에서 “성경 전체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은 죽음에 이를 수 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오스카 쿨만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스위스의 오스카 쿨만은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정복하심으로써 다시는 죽지 않을 불멸의 영혼을 쟁취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죽음을 정복하기 원한다면, 먼저 죽어야 하는데, 즉 몸과 영혼이 함께 죽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명력 자체를 잃어버려야만 한다.”(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8)

 

“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오스카 쿨만의 저서는 한국에서도 장로교회의 원로 신약성서 학자요, 목사인 전경연 씨에 의해서 번역되어 1965년 복음주의 신학총서 5권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 책에서 오스카 쿨만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회의 소망과 영혼불멸에 대한 헬라 사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 영혼불멸을 믿는 헬라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부활 설교를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웠다. … 신약에는 ‘영혼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은 결코 신약의 가르침과 조화될 수 없다.”(전경연 편, 8)

 

오스카 쿨만은 영혼불멸과 부활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상반된 사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신앙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회가 영혼불멸과 부활신앙을 연결지어 놓음으로써 빚어진 신학적 착오와 일반 성도들의 혼돈은 나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영혼불멸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리스도교회의 핵심인 부활신앙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플라톤의 철학으로 희생시켰는데, 본인은 이 사실을 도저히 덮어둘 수 없습니다.”(상동, 9)

 

이제 다시, 독자들이 베뢰아 사람의 신앙으로 대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개신교를 세운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플라톤과 천주교회의 신학을 받아들이겠습니까?” ■

질문11, 영혼불멸의 사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몸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영혼불멸 사상의 근원은 어디이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요? 동양의 불교나 유교는 물론이고 로마 천주교회, 희랍정교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회와 심령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강신술 그리고 무당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영혼불멸 신앙의 근원은 어디일까요?

 

영혼불멸 사상의 시작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시조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영혼불멸설로 미혹했습니다(창 3:4). 불순종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탄의 영혼불멸설 사이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영혼불멸설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부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죽어도 우리 몸 안에 있는 어떤 존재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에 속아서 영혼불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혼불멸”이라는 인간의 착각은 인류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힌두교, 불교, 자연신교, 무속신앙 등 거의 모든 종교인들이 불멸과 환생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세운 “영혼불멸설”이 진리를 무너뜨리고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지만, 성경은 여전히 영혼은 죽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4)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롬 6:23)

 

기원전: 헬라 문화에서 철학으로 발전한 영혼불멸설

사탄이 시작한 영혼불멸 사상은 헬라 문화와 접목되면서부터 새로운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몸을 떠나 존재하는 영혼과 윤회와 환생의 사상이 수많은 종교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명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영혼불멸 사상에 기초하여 윤회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이렇게 “철학”이라는 옷을 입은 영혼불멸 사상은 기원전 5세기에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는데, 그는 죽음을 통하여 영혼이 해방되어 감옥과 같은 육신에서 벗어나서 불멸의 존재가 되어, 영원한 “이데아”(idea)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실증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사탄의 교리에 속아서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불멸 사상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으며, 그의 논집인 파에돈(Paedon)은 영혼불멸 사상의 교과서로 자리 잡게 되어서 중세기까지 서방 정신 문화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영혼불멸 사상은 고대 헬라의 신비주의에 기초를 둔 이교 사상이라는 사실을 “유대 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영혼불멸의 신앙은 헬라 사상, 특별히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상을 이상하게 혼합한 신비 종교를 받아들인 플라톤의 철학과 접촉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유입되었다.”

 

3세기: 영혼불멸 사상, 기독교회로 들어오다

로마제국의 헬라 문화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당대에 있어서 최대 규모의 신학교가 있었는데, 3세기 초에 신학교의 교장을 지낸 오리겐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불멸 사상을 기독교회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불멸이다”라고 선언하고 자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진정한 플라톤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오리겐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북아프리카 칼다고 출신의 라틴 교부 터툴리안도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을 지옥으로까지 적용시켰습니다. 그는 의인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처럼 악인의 영혼도 지옥불에서 영원히 탄다는 영원지옥설을 기독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죄의 결과인 “사망”을 “영원한 불행과 고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터툴리안, 오리겐, 어거스틴 등과 같은 영혼불멸의 신봉자들이 모두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의 본거지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지역의 교부들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5세기: 영혼불멸설을 근거로 연옥설의 문을 열다

터툴리안과 같은 라틴 교부이며, 북아프리카의 히포 출신인 당대 최고의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중세 천주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는 33세 때 그리스도교회로 개종했는데, 그전까지 영혼불멸을 믿는 마니교의 신자였으며 플라톤주의를 열렬히 신봉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회로 개종한 이후에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리하게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각 개인 영혼의 운명은 죽는 즉시 결정되며 내세에는 정결케 하는 고통이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연옥의 개념을 천주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연옥설이란, 천국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떨어진 사람이 그곳에서 일정 기간 동안 죄를 정결케 하고 영혼을 정화시키는 고통을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원에 대한 두 번째 기회가 생기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연옥의 개념은 플라톤의 “그치지 않는 고통의 처소 개념”에서 받아온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기초가 놓여진 연옥설은 서기 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에 의해서 교리로 인정되었습니다.

 

13세기~16세기: 이단이 된 정통, 정통이 된 이단

영혼불멸 사상과 그것에 기초해서 생긴 연옥설은 13세기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확고한 신학으로 집대성되었으며, 그로부터 50년 후에는 단테의 <신곡>이라는 소설에 의하여 영혼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이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혼불멸설이 천주교회 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불길이 일어나기 직전에 열린 제5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영혼의 속성은 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거룩한 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영혼은 … 불멸이라고 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교시에 따라 영혼은 죽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며 그와 같은 그릇된 주장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들을 멀리할 것과 이단으로 징벌하여야 할 것임을 명하는 바이다.”

 

이때부터 영혼불멸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공식적으로 이단이 되었으며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 이후: 칼빈을 통해서 개신교회로 들어 온 영혼불멸설

젊은 천주교 신자였던 요한 칼빈은 개신교회로 개종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인 1534년(25세)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최초의 신학논문인 “혼수론”을 저술했습니다. “혼수론”은 오늘날 개신교회가 영혼불멸 신앙을 따르도록 만드는 불행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혼수론”은 칼빈이 개신교회로 개종한 지 불과 2년만에 나온 논문이고, 그것을 저술한 때의 그의 나이가 25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을 생각할 때, 그가 저지른 신학적 과오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가 남긴 결과와 영향은 참으로 상처가 크고 깊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을 주도했던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교수인 위클립과 틴데일 그리고 독일의 마틴 루터는 중세 천주교회의 영혼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하게 지적했지만, 칼빈이 선배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혼수론”을 통해서 이교적이고 비성서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이 받아들인 영혼불멸 신앙은 도대체 어디에 기초를 둔 것일까요? 칼빈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이교도 철학자들로부터 영혼의 정의를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플라톤은 ‘영혼은 불멸의 본질’이라고 바르게 정의하였다.”

 

칼빈이 저술한 “그리스도교 강요” 제1권 15장 6항의 “영혼과 그 기능” 이라는 항목에는 자신의 가르침이 플라톤의 사상에 근거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과 플라톤은 영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매우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에 관한 칼빈의 정의:  “사람의 신(spirit) 혹은 영혼(soul)은 몸과 구분되는 본질이다. … 몸이 죽은 후 영혼은 감각과 지성을 갖춘 채 살아있다. 여기에서 나는 영혼의 불멸 이외에 어떤 다른 사상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단언하는 바이다.”(기독교 대백과사전 8, 1246. Mead, 86,87)

 

“죽음의 온 밤을 통하여 영혼은 행복을 누리기에 필요한 모든 의식과 감각을 가지고 깨어 있다.”(Thomsen, 40,41)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 “죽음이란 몸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고,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우리가 몸에 의해서 방해를 받고 있는 한,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그토록 큰 악에 의해서 더럽혀져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없다. … 만약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 도달해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몸에서 분리되어야 한다.”(Paedo, Mead 197,202)

 

어떤 학자들은 칼빈의 “혼수론”에 대해서 “기록은 칼빈의 손으로 했지만, 목소리는 플라톤의 목소리이다”라고 개탄했는데, 그 이유는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은 영혼불멸과 연옥 신앙을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중세기 천주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고 개혁하려고 했지만, 플라톤 사상을 이어받은 천주교회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칼빈을 통해서 영혼불멸설이 오늘날 개신교회의 전반에 걸쳐서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칼빈만 종교개혁자들과 협력하였더라면, 영혼불멸 사상, 연옥 사상, 영혼이 죽은 순간에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간다는 사상은 종교개혁 운동에 밀려서 개신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독자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사탄의 영혼불멸설이 헬라 철학을 통해서 천주교회로, 그리고 개신교회까지 들어왔습니다. 영혼불멸설을 그대로 따라가겠습니까?”

질문10, 천국에 다녀왔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라이프 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죽음 저편 세계(Near death experiences)”라는 제목하에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레이스가 응급실로 실려왔을 때, 그녀는 고열과 극심한 고통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간호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으며 “혈압이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그레이스는 자기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더 이상 몸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새털처럼 가쁜하게 공중에 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의 모습을 천장으로부터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런 후에 그레이스는 안개와 같은 구름에 싸여 있는 반투명의 터널을 통과했다. 그레이스는 후에 이 경험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멋지고 따뜻하며 행복한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빛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빛 가운데는 천사와 같은 어떤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나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했던 일과 느꼈던 모든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그 빛 가운데서 영원토록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와 같은 존재는 내게 나의 가족들과 아이들을 보여주면서 ‘그레이스, 너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너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나중에 하늘이 너를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라고 말했습니다. 행복한 그곳을 떠나서 슬픔과 고통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순간, 나는 자신이 몸속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느끼게 되었고, 다시 신체에 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음을 경험했다는 “임사 체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Life after Death)”이라는 제목의 책은 700만 부나 팔리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수많은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2004년, 이와 상반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당시 6살이었던 알렉스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고 2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알렉스는 천사들이 자기를 천국으로 데려갔으며, 거기서 천국의 음악을 듣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스와 그의 아버지 케빈 말라키가 함께 쓴 책,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은 2010년 3월 틴데일하우스 출판사에서 출간된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다큐멘터리 DVD와 한국어, 스페인어 판을 비롯한 여러 언어로 된 번역판도 잇달아 출간됐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5년, 충격적인 일이 생겼습니다. 알렉스는 책의 내용을 철회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알렉스는 자신을 “천국에 다녀오지 않은 소년”이라고 적은 공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말해서 죄송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었습니다. 나는 천국에 갔다 오지 않았습니다.” 이 웃지 못할 사건으로 인해서 온 세상이 기독교회의 경험을 조롱했습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은 단순한 환각 상태인가요? 아니면, 몸에서 빠져나간 혼백이 실제적으로 하늘 가는 여행을 한 것입니까? 우리는 건전한 상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공감할 수 있는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첫째, 가장 확실한 사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의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심장이 멈추거나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서 “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의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이란, 뇌세포들 대부분이 죽었기 때문에 뇌기능이 정지되어서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회생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죽음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이 단계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둘째, 두뇌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경우 다양한 환각 상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환각 상태에서 뇌는 사람을 환상적인 장소로 여행시킬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나 대상을 만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정신 심리학자들은 죽음 저편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정신적 혼돈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착각으로 결론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셋째, 죽음 저편의 세계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간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지옥과 천국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간증 사이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저마다 하늘과 지옥을 갔다 왔다고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과 천국을 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3,8)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하늘 예루살렘)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우리는 사후 세계를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경험을 정직한 마음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마치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불문하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상관없이, 심지어는 성경 진리를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불신자들까지도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국에 다녀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 그 영혼이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서 순종하는 생애를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구원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실감나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증거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는 순간에 몸을 떠나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느끼는 불멸의 영혼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죽음을 의식이 없는 잠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죽음의 잠”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무덤에서 불러일으켜야만 깨워질 수 있는 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저편 세계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밤, 나는 외딴 곳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동차가 눈 위에서 미끌어지면서 나무를 들이받았다. 그 순간 죽음이 나를 엄습해왔다. 나는 촉촉하고 안개 같은 회색빛깔의 물질에 쌓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긴 터널을 통과했는데, 그 터널은 밝은 빛을 투과시키는 방울들로 휩싸여 있었다. 그 터널의 끝에서 나는 죽음의 저편 세계를 보았다.”

 

오늘날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왔다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개 같은 긴 터널을 통과하여 죽음 저편 세계인 천국을 보고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믿음

다윗 왕은 아들의 죽음을 앞두고 며칠 밤낮을 금식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들이 죽은 것을 알자, 얼굴을 씻고 울음을 그치고 음식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상히 여긴 시종들이 이유를 묻자 다윗 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2-23)

 

성경은 한 번 죽은 사람은 결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모습

하늘에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커다란 모순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보았던 하늘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터널을 통과하여 하늘에 갔다 왔다고 하는데, 요한은 터널 같은 모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해서 본 천국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요한이 보았던 천국은 터널 같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을 결혼식에서 신부가 환하게 빛나는 것으로 묘사했으며, 그 거대한 성이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늘 예루살렘 성의 거리는 순금으로 되었으며, 문은 진주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영광이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어두움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거할 수 있는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거하게 될 실제적인 처소가 준비되면,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성도들은 예수께서 준비하신 처소를 재림의 날에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영원불멸의 몸을 받은 성도들이 실제적인 생활을 하면서 사는 곳입니다. 하늘에서 성도들은 예수께서 각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처소에 들어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삶은 꿈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며, 몸에서 빠져나간 혼백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상태도 아닙니다. 하늘은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장차 우리는 온몸을 가지고 하늘에 가서 그곳을 실제적으로 보고 느끼고 만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 너머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심판이나 지옥은 없다. 인간은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간다.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선과 악의 실체는 없으며 죽음 이후에는 연옥 같은 곳에서 다시 한번 천국에 갈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런 이야기들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어야 할 절박감을 상실케 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며, 복음을 무력화시키려는 사탄의 미혹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과 사람들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천국에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으시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믿으시겠습니까?” ■

질문9, 언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기

 

빌립보서 1: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어떤 사람들은 영혼불멸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순간 즉시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을 기대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5-17)

 

바울은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때가 언제라고 말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재림하셔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죽거나 살아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골로새서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때가 나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재림)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그리스도를 만나는 3단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3단계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1)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2) 내가 다시 와서 3)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단계를 설명하시면서, 첫째 단계로, 예수께서 “처소를 예비”해야 하고, 둘째 단계로 예수께서 “다시 와”야 하며(재림), 셋째 단계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는 것(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니”(빌 3:10,11)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7,18)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죽는 순간에 즉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도 남기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약성경에 나오는 “육신을 떠나서”라는 표현은 죽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라는 표현은 재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부활의 날까지 무덤 속에서 쉬고 싶다는 말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6-8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 말씀에도 “주와 함께 거”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성경절을 이용하여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곧바로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수 있다”는 교리를 주장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언제부터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고린도후서 5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관을 버리고, 이 성경절의 앞에 나오는 1~4절까지를 읽어보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한다”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바울이 하늘을 사모하면서 죽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어서 썩어져 없어질 자신의 몸을 “장막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란 말씀의 의미는 죽음을 뜻합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면서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벧후 1:14) 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는 무엇일까요? 4절에 대답이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때, 즉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받게 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신령한 몸을 받기 원하는 마음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신령한 몸)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말에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더욱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얼마나 분명합니까? 바울은 육체를 벗어나기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마지막 부활의 날에 새로운 몸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영혼과 죽음과 부활의 사상이 크게 왜곡됩니다. ■

질문8,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됩니까?

벧전 3:18-20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영으로 연옥이나 지옥에 내려가셔서 노아 당시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일까요? 

만일 예수께서 노아 홍수 때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연옥 같은 곳이 있어서 죽은 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죽음 이후에 구원받을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다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성경은 사람이 죽는 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도 끝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16:27; 롬 2:6; 겔 18:24; 계 22:12).

 

“이는 우리가 다(모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죽음 이후에 구원을 위한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상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잠자고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상반됩니다.

만약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왜 노아 홍수 당시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져야 합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노아 홍수에서 멸망당한 사람들에게 전도하셨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매우 불공평하고 일관성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3장에서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이 말씀을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에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살아났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만일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교리가 정말 진리라면, 영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성령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한글성경에는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잘못 번역되었지만, 영어성경에는 “made alive by the Spirit”(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성경 중에서 쉬운성경은 “육체는 죽었지만 성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셔서”라고 번역함으로써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의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자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성령)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3,4)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비록 육체는 죽을지라도 우리도 성령을 통해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영으로 옥(prison, 감옥)에 있는 영들(프뉴마)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앞에서 “(예수께서)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씀에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것은 “성령으로 부활하셨”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는 말씀에서 “영”은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왜냐하면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님을 부활시킨 “영”이 성령이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영”도 당연히 성령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영(성령)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

 

그렇다면 “옥에 있는 영들”에서 “옥”은 어디이고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일까요? 여기에 나오는 “옥”은 감옥(prison)을 뜻합니다. 또한 “영들”은 헬라어 원어로  “프뉴마”인데, 이것은 앞 기사에서 배운 것처럼 “생명, 사람”이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옥에 있는 영들”이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옥(감옥)”은 어디를 말할까요? 감옥은 “지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운 이 세상을 뜻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옥”을 “어두운 세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7). 시편에서도 “옥”을 영적인 어둠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 “내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시 142:7).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영(성령)으로 옥(감옥, 영적인 어둠)에 있는 영들(원어-프뉴마, 사람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부활한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죄에 속박되어 영적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뜻입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영적 어두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 3:20)

 

여기에 “옥에 있는 영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베드로는 그들의 정체를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노아 홍수 당시에 멸망당해서 지옥에 간 혼백들에게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노아 홍수 시대에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불순종하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베드로전서 4:6에 나오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도 풀려집니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씀의 뜻은, 과거에 죽은 자들 역시 그들이 살아있을 당시에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에 유대국가에서 잠시 복음을 전파하고 승천하셨지만, 성령께서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양심에 호소하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지라도,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들었으며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고도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준엄한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어떤 태도를 나타내며 살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죽은 사람에게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습니다. 한 번 죽은 다음에는 구원을 위한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7, 예수님은 3일 동안 하늘에 올라가 계셨나요?

오늘날 그리스도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강도 사이에 오갔던 마지막 대화를 지적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즉시로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

 

이 말씀을 읽으면, 마치 예수님과 강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그날에 함께 하늘나라에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이 두 가지 상반되는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항상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을 증거합니다.

이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직접 밝히신 3일 동안의 소재지

예수께서는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3일 후인 일요일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 말씀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을 빠져나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이상한 수수께끼를 남겨놓았습니다. 만일 부활하신 일요일 아침까지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3일 전에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낙원”과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는 동일한 장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는데(계 2:7),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낙원이 동일한 장소임을 뜻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3일 후까지 하늘에 올라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잘못 번역된 헬라어 원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도 헬라어 원어를 잘못 번역함으로써 생긴 문제입니다. 성경의 헬라어 두루마리 사본에는 성경 말씀이 한 줄로 길게 쓰여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침표나 쉼표 같은 부호가 없으며 성경절과 장을 나눠놓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사상에 따라 쉼표를 붙이고 성경절과 성경장을 나눠놓았습니다. 불행하게도 구두점이 없는 헬라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오늘”이라는 부사 앞에 쉼표(,)를 잘못 찍어 넣음으로써, 예수께서 마치 오늘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처럼 번역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아멘)  네게(소이)  내가 말하노니(레고)  오늘(세메론)  나와 함께(메트에무) 네가 있을 것이다(에세)  그 낙원 안에(엔 토 파라이데이소)

 

헬라어의 단어별 의미를 살펴보더라도,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혼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쉼표를 “오늘”이라는 낱말 앞에 붙임으로써, 말씀의 의미가 크게 왜곡되었습니다. 영어 표현으로 비교해보면 문제의 원인이 훨씬 더 분명해집니다.

 

올바른 번역 –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장차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Verily I say un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KJV))

 

잘못된 번역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Verily I say un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헬라어 원문을 올바로 해석해야만, 예수께서 강도에게 하셨던 말씀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했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라는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그날(“오늘”)에 하늘에 강도와 함께 올라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쉽게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확신을 주노라 내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내 제자들은 모두 나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나는 중죄인의 취급을 받아 죽어가고 있는 지금, 나는 네가 장차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노라.”

 

강도가 부탁했던 말의 의미

문제를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는, 강도가 어떤 부탁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Remember me, Jesus, when you come as King”(TEV)

 

강도는 “오늘” 당장 보상을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왕으로 임하실 때에(재림의 때에)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날에 의의 면류관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바울도 자신의 믿음과 봉사에 대한 보상을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사도 바울이 영원한 보상에 대한 소망을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 두었던 것처럼, 회개한 강도 역시 자신의 소망을 마지막 날에 두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이런 강도의 부탁에 대해서 예수께서 즉시 마지막 날의 구원을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제 독자들이 답변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일 동안 하늘에 올라가 계셨나요?” ■

질문6,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마 9:24)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무활동의 상태이다: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

 

 

질문5, 죽은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한번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젊은 목사가 치명적인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 교회에서 나이 많은 장로님들이 문병을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려고 하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 좋은 장로님들이 먼저 천국에 가야 하는데 젊은 제가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합니다. 몸은 죽지만, 제 영혼은 곧바로 하늘에 가서 주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믿음이 정말 성서적인 믿음일까요? 만일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와서 의인들은 하늘에 가고 악인들은 지옥에 간다면,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나 의인들의 영혼은 지금 하늘에 있어야 하며, 악인들의 영혼은 지옥에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성경에서 죽은 자의 현주소를 찾아봅시다.

 

1. 죽은 의인들이 있는 곳, 무덤 속인가? 천국인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죽은 지 900년 이상이나 되는 다윗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행 2:34)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윗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 의인의 영혼은 즉시로 몸을 빠져나와서 천국에 간다면, 왜 베드로는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라고 말했을까요? 다윗이 죽고 난 후 9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윗은 천국에 올라가서 영생의 복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다윗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행 2:29,34)

 

얼마나 분명합니까? 베드로는 다윗이 지금 무덤 속에 있으며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위대한 의인도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는데, 누가 다윗보다 먼저 천국에 간단 말입니까? 요즘 신문에 나오는 부고 광고를 보면, “000님의 영혼이 소천하셨습니다”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성서적인 부고 광고가 아닙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깊은 오해를 갖고 있는 분들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사도 베드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다윗도 죽은 지 700년이 지났지만 무덤 속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의인들은 어디 있을까요? 다윗처럼 그들도 무덤 속에서 쉬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의인들의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되”(히 11:13)

 

히브리서 11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조상인 아벨,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열거하면서, 그런 믿음의 조상들도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다가 죽었지만 아직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구약 시대 믿음의 조상들도 다윗처럼 무덤 속에 누워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 받게 될 부활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의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과 영생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4)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성도 여러분, 이 말씀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의인들을 부활시킬 때까지 아무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아무도 하늘이나 지옥에 먼저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재림의 날까지 죽은 의인들은 어디에 있게 될까요? 무덤 속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무덤 속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몸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생명의 호흡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무덤 속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보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3,24)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계 22:12)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보상을 받게 될까요?

사도 바울의 말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예수님의 말씀: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 나오리라”(요 5:28,29)

 

죽은 의인들은 예수 재림 때까지 무덤 속에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 죽은 악인들이 있는 곳, 무덤 속인가? 지옥불 속인가?

악인들이 죽었을 때 영혼이 즉시로 몸을 빠져나가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가서 형벌을 받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악인의 혼이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두 손”을 가진 몸이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도, 예수께서는 “온몸”이 지옥불에 던지운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악인의 혼이 아니라 몸이 유황불 속에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그러므로 악인이 죽을 때 영혼이 소리 없이 몸을 빠져나가서 지옥불에서 형벌받는 것이 아니라 몸이 형벌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의인들이 부활해서 몸으로 천국에 가는 것처럼, 악인들도 부활해서 몸으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악인들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행 24:15)

 

의인에게 부활이 있는 것처럼 악인에게도 부활이 있는데, 예수께서는 악인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의인들은 예수 재림 때까지 무덤 속에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며, 악인들 역시 무덤 속에서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부활해서 형벌을 받게 될까요?” 이 문제는 마지막 사명 22호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으므로 원하는 분들은 마지막 사명 웹사이트에서 살펴보시거나 주문해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살짝 빠져나가서 의인은 천국에 가고 악인은 지옥에 간다면,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천국과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다시 지구로 불러 내려서 무덤 속에 들어가게 해서 부활시킨 다음에 공중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처럼 영접하고 다시 천국과 지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입니까?

 

이제 독자들이 판단해서 대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죽은 의인과 악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덤 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천국이나 지옥에 있습니까?” ■

 

데리고 오는 것인가? 데리고 가는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회는 의인이 죽으면 영혼이 연기처럼 빠져나가 천국에 간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 해서 궁여지책으로 다음과 같은 성경절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

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천국에서 자는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오시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국에서 자는 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도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아야만 올바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리고 온 다”는 말은 헬라어로 “악세이”인데, 그 의미를 찾아보면 “데리고 가다” 또는 “데리고 오다”입니다. “악세이”는 “간다”는 의미 와 “온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 “데리고 온다”로 번역했을까요? 왜냐하면 성경 의 번역자가 “의인이 죽으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천국에 간다”는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 을 “데리고 온다”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어성경에서는 이 문제를 수정해서 올바로 번역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살전 4:14)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늘에서 자고 있는 의인들의 영혼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자는 의인들을 부활시켜서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악세이”를 “데리고 간다”로 번역해야만 15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도 문맥이 정 확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 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 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질문4,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2

  1. 성경의 원어가 말하는 “영혼”의 의미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피쉬)이 된지라”(창 2:7)

 

성경은 완성된 인간 창조물을 가리켜 “생령”(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로 “네페쉬”(nephesh)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프쉬케”(psuche)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 두 원어는 모두 “숨 쉬며 살아있는 존재” 또는 “생명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네페쉬=프쉬케=살아있는 영혼=생명체=사람).

그래서 새번역성경에서는 혼이나 영이라는 표현 대신 “생명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원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개정)

 

“호흡”이라는 뜻을 가진 “루아흐”와 “프뉴마”를 잘못 번역함으로써 생긴 오해가, “생명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못 번역함으로써 똑같이 반복된 것입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번역하면서 왜 이런 문제가 계속해서 반복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영혼”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서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1. “영혼”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생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종종 “영혼”으로 번역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의미를 크게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잘못 번역된 말씀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영혼”을 불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혼이나 연기 같은 존재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말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단 한 번도 영혼을 불멸이나 죽지 않는 연기 같은 존재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원어인 “네페쉬”는, 구약에 기록된 총 754회 중에서 22번은 “새, 물고기, 짐승” 등을 가리켰으며 7번은 사람과 짐승을 동시에 가리켰고 절반 이상은 “영혼”(soul)으로 오역되었습니다. “네페쉬”의 참뜻인 “생명”(life)으로는 119번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네페쉬”와 동의어인 신약성경의 “프쉬케”는 총 105번 사용되었는데, 번역하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생명”으로 40번, “마음”으로 3번 번역되었고, “영혼”이란 말로 58번이나 오역되었습니다.

이러한 번역상의 심각한 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서 불멸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절들을 가리키면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프쉬케)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영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지적하면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에 결코 죽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는 이어지는 성경절을 읽을 때 쉽게 풀리게 됩니다.

 

“자기 목숨(프쉬케)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절)

 

28절에서는 “영혼”으로 잘못 번역되었던 “프쉬케”가 39절에서는 “목숨”, 즉 “생명”(life)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왜 계속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죽음과 영혼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서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0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프쉬케)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이 장면은 일곱인 예언의 다섯째 인에 나오는 장면인데, 중세기에 죽임을 당했던 순교자들의 영혼이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중세기 천주교회는 종교재판소라는 것을 만들어서 수많은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고갔습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5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핍박의 시대가 끝나면서 중세기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장면을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실제로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 외치는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연기처럼 그 혼이 빠져나가서 천국에 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서 불멸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영혼들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인데, 그들의 영혼은 하늘에서 자신들의 원통함을 부르짖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면, 중세기에 죽은 순교자가 5천만 이상이나 되는데 그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조그만 제단 아래 모여서 탄원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연기처럼 존재하는 영혼들이라면, 어떻게 영혼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을까요?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계 6:10,11).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이 실제 장면인지 상징적인 표현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섯째 인에 나오는 영혼들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들일까요? 아니면 중세기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제단은 어떤 제단일까요? 성소에는 두 가지 제단이 있습니다.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이 있고, 성소 안에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희생제물로 드려진 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를 쏟는 곳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는 말씀은 중세기 성도들의 순교를 번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고 희생의 피를 흘린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실제로 번제단 아래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순교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은유와 상징적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을 책망할 때도 하나님께서 은유와 상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아벨)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느니라”(창 4:10). 이 말씀도 실제로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상징과 은유로 해석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죽은 순교자들이 탄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전 9:5)

“사망 중에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시 6:5)

“그 호흡이 끊어지면(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죽는 그날에) 그 도모(계획, plan)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성경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억도 못하고, 계획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호소한다는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의 주석가인 아담 클락 박사도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상징적인 계시 가운데 제단을 보았다.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를 당한 성도들로서 우상숭배와 미신적인 거짓 가르침들 때문에 희생당한 자들을 표상한다. 왜냐하면 이 제단은 이 땅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편집인 주, 아담 클락 박사도 성도들의 순교를 이 땅의 제단에서 희생당하는 것으로 해석했음).”(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 p.433)

 

같은 장 11절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흰 두루마기, 흰옷, 흰 세마포는 모두 순결과 승리와 구원을 상징하는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순교당한 성도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잠시 동안 쉬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승리와 구원을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받았는데 왜 잠시 동안 쉬어야 할까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죽은 성도를 부활시키고 영생의 보상을 주실 때까지 잠시 무덤에서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부활신앙입니다.

죽은 의인들은 구원의 증거인 “흰 두루마기”를 받고 무덤 속에서 쉬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나팔 같은 소리로 죽은 의인들을 부르시면, 그때 무덤이 열리면서 부활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 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 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하늘로좇아강림하시리니그리스도안에서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부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끌어올려공중에서주를영접하게하시리니그 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5-17)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죽은사람의상태에대해서이야기하면꼭나오는것이누가복음16장의부자와거지나 사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비유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장면일까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실제로 해석하면, 지옥에 있는 부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이 서로 대 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천국에 간 나사로가 손끝으로 물을 찍어서 지옥에 있는 부자의 혀 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시원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천국에 간 의인과 지옥 불구덩이에서

지글지글 타는 악인이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며 물을 찍어서 혀에 묻혀주면서 살아야 한다면, 그런 장소가 천국이 될 수 있 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녀와 남편이나 아내를 보면서 영원토록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정말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실화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기독교 신앙 자체가 이상하게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월간이슈 22호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마지막사명 웹사이트에서 읽거나 월간이슈를 신청해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질문3,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1

우리는 앞에서 사람이 죽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호흡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호흡”이 “영”으로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구약성경) 또는 헬라어(신약성경)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만약 이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루아흐”

한글성경에는 사람이 죽을 때 마치 영혼이나 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ruach)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루아흐”의 뜻은 “성령, 호흡, 바람, 기운”이며 구약성경 전체에 총 389회나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루아흐”는 “성령”이라는 의미로는 94회 사용되었으며 그 이외에는 번역하는 사람이 죽음과 영혼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에 따라서 “신, 영혼, 영, 호흡, 생기, 기운, 정신, 마음” 등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의 경우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됩니다.

“루아흐”가 “성령”으로 번역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음과 생명을 묘사하는 성경절에 나오는 “루아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불어넣어 주셨던 “생명의 호흡” 또는 “생기”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구약성경에서 히브리 원어 “루아흐”가 어떻게 번역되었으며 또한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전도서 12:7 “영(루아흐)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이 말씀에서 “루아흐”는 “영”으로 번역되었지만, “루아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불어넣어 주셨던 “생명의 호흡”을 뜻합니다. 죽을 때 “생명의 호흡(루아흐)이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마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빠져나가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처럼 번역함으로써 큰 혼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이 모든 사람의 죽음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본다면, 악인의 영혼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 됩니다.

 

시편 146:4 “그 호흡(루아흐)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계획)가 소멸하리라”

 

이 말씀은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사람이 세워놓은 계획은 사라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죽음을 설명하는 이 성경절에서는 “루아흐”가 “호흡”이라는 단어로 올바르게 번역됨으로써, 창세기 2:7의 창조 공식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7:5 “내가 생기(루아흐)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는 모습을 상징하는 이 말씀에서는 “루아흐”가 “생기”로 올바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어성경에는 “루아흐”를 “생명의 호흡”으로 번역했습니다. “내가 너희 속에 생명의 숨(루아흐)을 불어넣겠다”(겔 37:5).

 

욥기 27:3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니라”

 

만일 이 말씀에서 루아흐를 “영혼”으로 번역했다면 “영혼이 내 코에 있느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우습게 되겠습니까?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코에 불어넣으셨던 그 “생명의 호흡”을 뜻합니다.

 

전도서 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루아흐)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짐승도 사람처럼 죽을 때 호흡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짐승에게 어떤 형태의 혼이나 정신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으므로, 죽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의 호흡”이지 영혼이나 혼백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다른 것이지 죽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짐승과 사람은 “동일한 호흡(루아흐)”이 있고 같은 모습으로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루아흐”를 “영혼”으로 번역한다면, 짐승과 사람에게 모두 영혼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루아흐”를 모두 “영혼”으로 번역하면 이런 문제들이 수없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전도서 12:7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루아흐)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솔로몬의 말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몸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루아흐”를 어떤 의식을 가진 “혼이나 귀신”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히브리 원어에 대한 지식의 부족과 “영”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빚어진 오해입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해서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 당시 사용했던 “흙과 생명의 호흡” 이외에 어떤 것도 가감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12:7에서 “영(루아흐)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죽음을 묘사했을 때, 그는 생명의 호흡이 그것을 주신 분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호흡”만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신약성경의 “프뉴마”

구약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호흡, 바람, 생기, 성령”을 뜻하는 “루아흐”가 신약성경에서는 “프뉴마”(pneuma)라는 단어로 385회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프뉴마”는 성령이나 악한 영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하는 사람의 사상과 주관에 따라서 “영, 마음, 심령, 정신, 바람”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심지어는 “영혼”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는데,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고보 2:26 “영혼(프뉴마)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영혼”이라는 말을 성경의 난외주에서 찾아보면, “호흡(breath)을 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12:7에서 “영”이라는 표현이 “생명의 호흡”을 뜻했던 것처럼, 이 말씀에서도 “영혼”이라는 표현이 “호흡”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호흡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0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영혼(프뉴마)이 떠나시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프뉴마”가 “영혼”으로 잘못 번역되었기 때문에, 마치 예수께서 죽는 순간에 그분의 혼이 몸을 빠져나간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성경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59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프뉴마)을 받으시옵소서”

 

이 말씀은 스데반의 생명이 끊어질 때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치 스데반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389회 쓰여진 “루아흐” 그리고 신약에서 385회 쓰여진 “프뉴마”가 한글성경에서 “신, 영, 영혼”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어 의미를 살펴보면, 그것이 “성령”을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경우에는 단 한 번도 불멸하거나 죽은 시체에서 연기처럼 몸을 빠져나가는 “영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실을 정말 알기 원하는 분들은 “신, 영, 영혼”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적 의미와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합니다. 누구든지 죽음에 대하여 오해할 수 없으며 죽는 순간에 사람의 혼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 허공을 떠돌아다니게 된다는 미신에 빠질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 “영”이나 “영혼”으로 번역된 원어가 “호흡”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

질문2, 하나님의 창조 공식을 아십니까?

만일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죽음 이후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성경 속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죽음에 대한 정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전도서에 나옵니다.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spirit)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개정)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모든 사람은 그가 악인이든지 의인이든지 간에 죽었을 때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표현된 “영”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알아보기 전에, 사람이 태초에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창조의 역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살펴보면, 인간이 죽을 때 어떤 상태로 되돌아가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사람의 창조 공식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life of breath, 생명의 호흡)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soul, 살아있는 영혼)이 된지라”(창 2:7)

 

성경의 창조 공식:
흙 + 생기(생명의 호흡) = 생령
= 살아있는 영혼(living soul) = 인간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생명을 가진 인간을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용하신 재료는 오직 두 가지, “흙”과 “생명의 호흡”입니다. 흙으로 몸을 만드신 후 하나님께서 직접 아담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니까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공식은, 흙(몸)+생명의 호흡=생명체(살아있는 영혼)=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람”이나 “인격체”를 “영혼”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삿 5:2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1),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 1:46). 이런 성경절에 나오는 “영혼”이라는 단어는 사람 속에 들어있는 “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체(인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몸속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자,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생령)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속에 영혼을 집어넣었다는 거짓말을 기독교회 전체에 퍼트렸습니다. 

 

사탄의 거짓 공식:
흙(몸) + 영혼(사람 몸속에 있는 연기 같은 존재) = 사람

 

오늘날 기독교회가 사탄의 공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빠져나가서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혼돈하게 된 것입니다. 죽을 때 영혼이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호흡이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인간의 몸속에는 영혼이 있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하늘로 간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몸 안에 “영혼”이 들어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런 미신적 가르침이 기독교회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두 가지 재료

  1. 몸 :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몸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죽은 시체가 부패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몸을 구성하는 화학적 성분이 흙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시체가 땅에 묻히면, 몸은 태초에 창조주께서 땅에서 취하셨던 그 화학적 요소들을 다시 땅으로 되돌려주게 됩니다.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1. 생명의 호흡 :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눈과 귀와 코와 모든 내장과 심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서 움직이고 활동하려면 생명력이 주입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포에 생명력을 제공하고, 심장을 박동케 하고, 호흡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생명의 호흡”을 코에 불어넣으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life of breath, 생명의 호흡)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soul, 살아있는 영혼)이 된지라”(창 2:7).

 

“생기”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느샤마”(neshamah)인데, 그 의미는 “생명의 호흡”(life of breath)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느샤마”는 “호흡”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neshamah)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 33:4)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neshamah)은 코에 있나니”(사 2:22)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neshamah)이 끊어진지라”(왕상 17:17)

 

  1. 사람의 죽음: 두 가지로 만들었으니, 두 가지가 원래대로 돌아간다

죽음은 창조의 역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두 가지 재료(흙과 생명의 호흡)를 사용하셨으므로, 인간이 죽어서 땅속으로 들어갈 때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용하셨던 두 가지 재료(흙과 생명의 호흡)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하셨던 두 가지 재료 이외의 어떤 것도 인간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의 반대 과정인 죽음
창조 :   흙 + 생명의 호흡 = 사람
죽음 :  사람 – 생명의 호흡 = 흙

 

그렇다면, 전도서 12:7의 후반부에 나오는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죽는 순간,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했던 두 가지 재료 중에서 “몸”은 부패돼서 원래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명의 호흡”도 처음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2:7에서는 “생명의 호흡”이라고 표현되었던 것이 전도서 12:7에서는 “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호흡”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호흡)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사람이 죽을 때 “호흡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뜻이지 “호흡”이 하나님께 돌아가서 어딘가에 보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음: 사람 – 생명의 호흡(하나님께로 돌아감)

= 몸(흙으로 돌아감)

 

창세기 2:7과 전도서 12:7을 비교하면 도표와 같이 말씀의 평행 구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도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은 “생명의 호흡”(life of breath)과 사람이 죽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spirit)이 성경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오직 하나, “생명의 호흡”입니다. 어떤 영혼이나 혼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다시 독자들이 대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죽는 순간에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갈까요?” 영혼이 몸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갑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의 호흡”입니까? ■

 

전구 + 전류 = 빛

죽음에 대한 진리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구에 전류가 흐르면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의 몸에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가면 생명이 있는 사람(살아있는 영혼)이 됩니다.

사람의 몸을 전구라고 가정하고(전구=몸), 그 속에 흐르는 전류는 하나님께서 몸속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으로 생각하면(전류=생명의 호흡), 전구에서 비쳐 나오는 빛은 몸과 호흡이 합쳐졌을 때에 사람이 된 영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전구(몸) + 전류(생명의 호흡) = 빛(영혼 또는 사람) 의 공식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반짝거리는 빛을 볼 때, 우리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를 연상케 하는 매우 좋은 표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스위치를 내려서 빛이 꺼졌다고 합시다. 스위치를 내리는 순간에 빛은 어디로 갔습니까? 빛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전류가 전구에 흐르지 않기 때문에, 스위치를 내림과 동시에 빛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전구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다음 질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몸에서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빛=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있는 영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죽었던 자들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전류)을 넣어주실 때까지 영혼(빛=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스위치를 올림으로써 다시 생명이 흐를 때까지 영혼(빛=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위치를 올리셔서 다시 영혼(빛=사람)을 회복시키는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을 때 오장육부가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고 뇌가 있었지만 생각과 개성과 감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에 생명의 호흡을 주시자, 즉시로 사람은 “살아있는 영혼(생령)”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생명의 호흡)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살아있는 영혼)이 된지라”(창 2:7)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영혼(생령=사람)은 몸과 생명의 호흡이 결합함으로써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사라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몸과 호흡의 결합 상태가 깨질 때입니다. 죽음이란, 몸과 호흡의 결합 상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즉시로 사라져 버립니다. 스위치를 내리면, 전구를 흐르던 전류가 중단되어 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이 죽어서 생명의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사람)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어떤 곳에도 영혼이 몸 없이 떠돌아다닌다거나, 몸 없이 계속 존재한다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호흡(생명력)이 끊어져 몸과 호흡의 결합 관계가 깨어지면 단 한순간도 영혼(생명체)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때 몸도 호흡과 결합되기 이전의 상태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질문1, 사람이 죽으면 불멸의 존재가 되나요?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의 중심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속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존재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나님께서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이 유지되지만, 불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영원불멸의 조건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사탄은 뱀을 매체로 이용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여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결국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사람의 운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죄가 지구에 들어오기 전에는 에덴동산에 낙엽도 없었고 동물끼리 서로 죽이는 약육강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가시나무와 독초들이 자라나게 되었고 동물들의 성질이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즉시 자연계에 무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영향은 인간에게도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유전자가 노화되기 시작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혼이 연기처럼 몸을 빠져나가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죽지만 영혼은 영원히 살아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도 하나님처럼 영원불멸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영원불멸의 속성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영원불멸의 속성을 받는 날

성경은 인간이 죽지 않을 영원불멸의 본성을 가질 수 있는 소망의 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날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들이 영원불멸의 생명을 받는 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재림의)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몇 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지에 어떤 목사가 “죽음은 없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기고했는데, 그는 거기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죽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며, 이전에 알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죽음 이후에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영혼은 영원토록 불멸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불멸의 속성은 사람이 죽을 때 받는 속성이 아니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한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선물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 무덤에서 부활한 의인들은 “순식간에 다 홀연히 다 변화”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불멸의 속성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부활신앙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의인이 죽은 후 영혼이 곧바로 하늘로 올라간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무덤에서 환호하면서 일어나는 의인들은 누구입니까? 하늘에 가 있던 의인의 영혼들이 다시 죽은 시체 속으로 들어가서 무덤 속에 누워 있다가 부활하는 척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되면 성경이 말하는 부활신앙이 코미디가 돼버립니다. 온 우주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도록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을 바친 의인의 부활과 영생을 그렇게 계획하셨다고 믿으십니까? 편견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을 온전히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영원불멸의 속성을 받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까?” ■

서론, 죽은 자의 영들을 불러내는 교리가 있다

어떤 말기 암환자가 있었는데 의사로부터 3개월 선고를 받았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 환자는 너무나 두려워서 한 목사를 찾아가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살려주세요. 저는 젊었을 때부터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이제 죽으면 제 영혼이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날, 기독교회에 이런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1분이 지나면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을까요? 영혼이 몸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와서 천국이나 지옥, 또는 허공에서 끝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말은 사실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불신자와 무신론자들까지도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죽은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인간은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는 것일까요? 참으로 엄숙한 질문들입니다. 죽음의 정체를 모르고 사는 것은 종착지를 모르고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만이 죽음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답변을 찾아야 합니다.

 

죽은 자의 혼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미라 상태로 피라미드에 보관된 죽은 왕들의 혼이 국가를 인도하고 보호한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죽은 자들의 혼을 위로하고 기념하는 날을 정해서 그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형벌에 처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죽은 자의 혼을 섬기는 종교와 문화가 모든 나라에 깊이 뿌리내려 왔습니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미신과 민간 신앙에 머물던 죽은 자의 혼에 대한 관심이 이제는 인기있는 영화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이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시켜 주는 영매를 통해서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혼이 실제로 살아서 활동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혼들에 대한 기사가 뉴스와 신문에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죽었다가 회생한 영들이 말해주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미국의 서북부에 있는 태평양 연안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인간 영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죽은 자 영의 예언에 의하면, 이 지역이 장차 지진과 해일, 대기 오염과 토양과 식수 오염의 피해가 가장 적고 안전할 것이라고 한다.”(1986년 11월 16일 자, The Denver Post)

이 기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세상 종말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의 영들과 대화하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영과 교통하는 것을 강신술이라고 하는데, 이 강신술이 점점 더 우리 속으로 깊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강신술과 신접한 자들과의 접촉을 강력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0:6,7)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사람)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1,12)

 

하나님께서 왜 신접한 자와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초혼자를 끊어내라고 명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서 살아있는 사람과 연결시켜주는 영매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죽은 자가 현세에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죽은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라”(욥 7:9,10)

 

죽은 자는 결코 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나타나지 못할까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기까지는 아무도 산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베드로, 마리아와 같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결코 현세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의 영혼이 현세에 나타난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문으로 들어가는 길

수천 년 전부터 사탄은 하나님께서 금지시킨 영역, 즉 죽은 자를 불러내서 접촉하는 영역 속에서 일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와 염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만나서 도움을 구하기를 갈망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혼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그것이 사탄의 악령인지 모른 채 미혹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치밀한 기만자입니다. 오래전부터 사탄은 놀라운 사상을 온 세상에 퍼트려 놓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빠져나간다”는 영혼불멸 사상입니다.

 

“<미지의 신비>라는 책에는 몸을 떠난 정신 세계와 윤회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 또한 <영매를 통한 여행>이라는 책에는 영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육체로부터 분리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 온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이와 같은 보고 내용은 놀랍게도 그 내용이 서로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1989년 3월 20일 자, Time)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고 믿으면 그때부터 사탄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온갖 “장난”을 칠 수 있게 됩니다.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죽은 자의 혼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입니다.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상을 믿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불교와 유교와 힌두교 같은 거의 모든 이방 종교들은 죽은 조상의 신을 섬기기 위해서 제사를 드려왔고, 천주교회에서도 천 년 전부터 죽은 성자를 숭배하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사람들과 이방 종교뿐 아니라 성경을 절대진리로 믿고 있는 개신교회까지 “몸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기에 천주교회를 통해서 들어온 이교 사상이 개신교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죽은 자의 몸을 빠져나간 혼이 장례식장에서 살아있는 가족과 친구가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까요? 죽은 자의 영혼들이 제사 때마다 집에 찾아와서 제사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 만족한 미소를 띄울까요? 사탄은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사상을 통해서 온 세상을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뉴에이지도 영혼불멸설 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한창 증가 일로에 있는 윤회 사상 이외에도, 죽은 자의 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하는 현상,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경험 그리고 사람의 내부에 있는 영혼을 통하여 무한한 힘을 발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그 골격을 이루고 있다.”(1987년 7월 13일 자, The News Tribune)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뉴에이지 종교에서는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자신의 의견을 주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들은 죽은 조상의 혼이 말해주는 대로 점을 치고 사람들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미신과 토속신앙은 죽은 자의 혼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께 질문을 하겠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죽은 자의 영혼은 누구일까요? 천주교회의 마리아 석상에서 피눈물이 나오는 이적이 생기고 있는데, 이적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죽은 자들의 영혼은 누구일까요? 무당에게 나타나서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게 하는 죽은 조상의 혼은 누구일까요?” 사탄과 악령들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의 혼을 사탄과 악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성경은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끼어들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무의식 상태)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자기 이름도 모름)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감정도 없음)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 9:5,6)

 

이 말씀은 사탄이 죽은 자의 혼으로 나타나는 강신술을 완전히 부서뜨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죽은 자의 분복이 다시는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새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쉬운 말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다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에도 죽은 자가 끼어들 부분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성경은 무덤 속에 들어간 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얼마나 분명합니까? 무덤 속에 들어가면, 그곳에는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나타나서 의견을 말하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탄의 악령이 죽은 자의 모습으로 위장해서 미혹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회에서는 죽은 자의 혼이 살아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천국에 갈 수 있고 산 자들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중세기에 천주교회를 통해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영혼불멸설을 기초로 해서 연옥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연옥에 가 있는 영혼들을 천국으로 옮겨주는 대가로 면죄부를 팔아서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그것이 중세기 천주교회의 역사이고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원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영혼불멸설이 개신교 전체에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불멸설을 교회 안에 침투시킨 사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영혼불멸설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기독교와 세상을 하나로 묶어서 미혹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호에서 우리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와 세상을 덮고 있는 가장 강력한 미혹의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정말 살아있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실제로 혼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존에 갖고 있던 사상과 다를지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읽으면,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눈에 안약을 발라주셔서 사탄의 미혹을 분명하게 보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23호를 시작하며…

마지막 사명 22호에서는 “지옥에서 악인들이 정말 영원히 불타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뜨거운 관심과 반응을 보내왔습니다. 이번 23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무당이 되었다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간증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들은 신내림을 받아서 점을 보고 굿을 할 때 죽은 사람의 혼이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의 혼이 떠돌아다니면서 귀신으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속삭이는 소리로 무당을 도와주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말 죽은 조상의 혼일까요? 아니면 사탄의 악령일까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항상 죽은 자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미신과 우상숭배 종교들은 죽은 자의 혼을 숭배하는 신앙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과학자와 유령을 연구하는 단체들이 죽은 자의 혼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진실일까요? 왜 귀신과 유령에 대한 관심이 점점 크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죽은 자의 혼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죽은 자의 혼과 접촉하는 자들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죽은 자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셨을까요?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사람이 죽으면 정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서 활동하는 것일까요?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번 호에서 죽은 자의 영혼과 사후 세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오해하면, 마지막 시대 사탄의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번 특집 기사를 통해서 일생일대의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편견과 인간적 의견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죽은 영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경 연구는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사탄의 기만으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해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성경의 올바른 진리를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대해서 두고 두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