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너무나 쉽게 성도들에게 구원을 선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단 한번의 결정으로 “당신은 이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가르침이 밀물처럼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 문턱을 갓 넘어온 사람도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죄를 해결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구원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이런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경험을 식물의 성장에 비유해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 4:28, 29). 성경은 결코 사람이 갑자기 변화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씨를 땅에 묻어야 하는데 씨앗은 그곳에서 썩어서 죽는 경험을 먼저 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싹이 나오는데 그 이후에도 시간과 절차에 따라서 이삭이 나오고 서서히 자라게 되고, 열매가 맺기까지 필요한 양분과 경험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변화와 구원입니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던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변화되어 은사를 받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먼저 진리를 깨달아 마음에 새기는 경험이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깨달은 진리에 순종하는 경험으로 인도하셔야만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변화의 경험을 부인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변화 경험을 설명하셨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1~33). 겨자씨같이 작은 존재가 먼저 나물로 성장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다음에 새들이 날아와 머물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사람이 급진적으로 하루아침에 변화될 수 없음을 증거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변화와 급진적인 열매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참된 변화의 경험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경험도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으로 불타는 심령을 받은 루터의 변화는 단순히 그의 스승 스타우비츠가 전해 준 한마디 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수도원 안에서 홀로 사색과 기도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며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루터의 심령 속에 떨어진 진리의 씨가 자라면서 감사와 충성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로 죄가 사함 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 몇년 동안 베드퍼드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시련의 과정을 통과했습니다. 존 번연의 심령 속에 떨어진 진리의 씨앗은 후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마 9:29).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서 생애가 꼴 지워집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생애 속에 진리를 심어야 변화됩니다. 참된 영적 경험은 진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절규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면서 눈물을 흘려도 그런 경험이 진리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감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부흥회나 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다가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서는 일이 필요합니다. 참된 부흥은 이성과 양심이 진리를 심사숙고한 이후에만 올 수 있습니다. 진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흥회는 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통성 기도, 시끄러운 음악, 가수의 콘서트 같은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예배와 부흥회에서 사람들은 황홀한 무아지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서 얻은 감정적 환희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되어야 할 신앙이 빗나가고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부흥회를 찾는 사람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감정적 기쁨과 행복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예배와 부흥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유
내려가기는 쉽게 생각되고 올라가기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양심의 가책이 있고 후회와 불행이 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결코 쉽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 성경 말씀 속에서 확신을 얻으며, 죄로부터 풀려나는 자유가 있고, 간간히 쉬어 갈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도성으로 가는 길에도 육체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고 세상의 유혹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도 쉽다고 말할 수 없는 길입니다. 두 길 모두 어려운 길이지만,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왜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을 선택할까요? 사탄의 유혹과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육체의 충동과 싸우는 영적 투쟁이 너무나 길고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유혹과 충동을 거절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투쟁이 힘들고 반복되는 패배가 싫기 때문에 투쟁 자체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양심을 책망하는 것이 싫고, 달콤한 유혹에 저항하고 싶지 않으며, 육체의 욕심에 맞서서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쉬운 구원”을 찾아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게 됩니다.
세상이 바쁘고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사람들은 단번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기 보다는 쉽게 구원의 경험을 갖기 원합니다.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가장 잘 만족시켜 주는 곳이 기도원과 부흥회입니다. 죄에 대한 책망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계명도 없고 순종도 없으며 절제와 인내도 없는 집회가 많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구원과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만 그런 곳은 내려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는 넓은 길입니다. 육체와 유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넓은 길입니다. 존 번연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가끔 개와 고양이의 신세를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개나 고양이에게는 사람이 겪어야 할 선과 악의 싸움과 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 존 번연 역시 자아와의 투쟁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구원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유혹과 싸우는 전쟁을 하는 대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평안은 죄와 싸우는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만나면, 우리는 거기서 구원과 평안과 승리를 얻게 됩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3~24)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이유 저런 미혹에 빠져서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도 영생할 수 있다.”고 미혹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선택할 것이며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좁은 길은 감정적인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 위에는 진리가 있고 평안이 있으며 은은한 성령의 인정하심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심령의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주저 없이 좁은 길을 걷기로 선택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21). ■
(성서적이고 순수한 복음을 원하는 분들은 <마지막 사명> 2호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