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하나님께서 남은 무리를 모이시는 방법

아프리카 코끼리의 무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코끼리의 마른 뼈들이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곳을 코끼리의 무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 사이에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그 골짜기를 향해서 간다고 믿는 전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조사해 보니 코끼리들은 죽을 때가 되어서 모여든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었습니다. 심한 가뭄이 들면서 호수에 녹아 있던 공해물질 농도가 높아지면서 그 물을 마신 코끼리들이 떼 죽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물이 마른 호수에 코끼리의 마른 뼈가 산처럼 쌓이게 된 이유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말세에 교회 안에 이런 참혹함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말씀의 기근 속에서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의 독을 마신 성도들이 떼죽음당한 상황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5~17).

이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영적으로 가난하고 곤고한데, “나는 부자라 부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적 눈이 멀어서 자신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교회의 참상도 보지 못하는데 “나는 눈을 떠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의의 옷을 입지 못해서 벌거벗었는데 “나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구원을 잃어버린 상태인데,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기독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깊은 영적 죽음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운 사실은, 뜨뜻미지근한 교회, 예수께서 토해 내치고 싶은 교회, 그런데 그런 교회 속에서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방언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 18:2).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 속에서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성도들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죽은 교회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의인들을 준비시킬까요? 어떻게 하면 죽어 있는 교회 속에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남은 무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가 가득 쌓여 있는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서 에스겔에서 뼈가 가득히 쌓여 있는 골짜기를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뼈가 아주 말랐다고 했습니다.

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에스겔의 눈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죽은 지 오래되어서 뼈가 바짝 말라 있기 때문에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뼈가 너무나 마르고 깨어져서 이 뼈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뼈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형편을 보면, 정말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이 교회가 정말 부흥해서 살아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이런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위해서 준비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생깁니다. 에스겔이 바짝 말라 있는 뼈들의 골짜기를 보면서 느꼈던 절망을 우리도 교회를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 참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뼈를 향해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뼈가 바짝 말라서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뼈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뼈는 실제 뼈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영적으로 죽은 교인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마른 뼈가 살아나는 첫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죽은 뼈가 부활하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죽은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뼈들이 가득한 죽은 교회를 살리는 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대언한다”는 것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말씀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말씀 그대로를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와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도 에스겔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른 뼈들에게 대언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줄 하나님의 기별자가 필요합니다.

잠재우는 말씀이 있고, 깨우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면 짜증을 내고 싫어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 듣기 싫어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듣기 싫어하고 양심이 불편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귀있는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다.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는 뼈는 “아주 마른 뼈”라고 했습니다. 뼈가 아주 말랐다는 것은 죽은 지 오래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래전에는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죽은지 오래 되어서 마른 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마른 뼈는 한때 영적으로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죽은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한때는 주님께 마음을 바쳐서 거듭났던 적이 있지만, 오래전에 영적으로 죽어버린 사람들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 번 구원받았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가르침은 거짓 복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한때는 거듭났지만, 오랜 세월 형식적인 예배와 무의미한 신앙생활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경험을 잃어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한때 회개하고 뜨거웠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아서 뜨뜻미지근하게 된 분들이 계십니까? 오래전에는 날마다 기도하고 뜨거움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서서히 말라 죽어 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오래전에는 말씀을 펴놓고 연구하면 성령께서 가슴 깊숙한 곳에 진리를 새겨 주셨는데, 언제부턴가 진리에 대한 충성이 사라졌고 영혼이 메말랐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분들은 지금 마른 뼈가 된 것입니다.

오래전에는 시험과 유혹이 올 때, 투쟁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려고 애를 썼는데 언젠부터인지 투쟁을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고 계십니까? 한때는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가졌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험이 오면 힘없이 쓰러지는 라오디게아 교인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 싶지만, 자꾸 넘어지고 쓰러지십니까? 그런 분들은 영적인 영양 공급이 되지 않아서 근육이 사라지고 핏줄이 말라서 앙상하게 마른 뼈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속에 수북히 쌓여 있는 죽은 뼈들을 살리실 수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5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께서 뼈들을 살리시는데, 어떻게 살리신다고 했습니까? “너희 속에 생기를 넣어서 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생기”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생기”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억지로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격정적으로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며 울부짖는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성령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부리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씀은 마른 뼈가 소생하는 순서와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힘줄이 생기고, 살과 가죽이 생기게 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른 뼈가 살아나는 첫 번째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을 버리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말씀이 생명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일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말씀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씨앗을 심어야 진리의 열매가 열립니니다. 팥을 심어 놓고서 콩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를 마음에 심어 놓고 구원의 열매가 맺히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복음, 계명을 지키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복음, 알고 있는 죄를 버리지 않고 알고 있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거룩함의 열매가 마음과 생애 속에 맺힐 수 없습니다. 거짓 복음은 결코 변화와 열매를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이에 내가(에스겔)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shaking, 흔들림)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겔 37:7)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마른 뼈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흔들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성경에서 흔들림은 가짜를 진짜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 흔드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알곡을 골라내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체질이고 다른 하나는 흔들림입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기 때문에 심하게 흔들어서 쭉정이를 알곡들로부터 분리시켜 떨어내는 것이 흔들림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 죽은 뼈들을 어떻게 흔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격을 주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마른 뼈들도 흔들리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왜 흔들림이 생기게 될까요? 마른 뼈들 사이에 흔들림이 생기는 이유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주는 흔들림을 통해서 각 사람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한 죽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교회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충성스런 백성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죽어서 마른 뼈가 된 지 오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심하게 소리가 나면서 흔들림이 생긴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와 말씀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가면, 흔들림이 생기면서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좁은 길을 걸을 것인지 넓은 길로 가든지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흔들림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보지 않고 사람의 눈을 보면서 말씀을 전하면 흔들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말씀에 의한 흔들림이 없기 때문에 영혼들이 마른 뼈로 잠을 자는 참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변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뼈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부흥이 생기고 삶 속에 개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들이 생긴다고 했습니까?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말씀에 붙잡힌 뼈와 뼈들이 서로 짝을 맞추면서 세워지게 됩니다. 함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말씀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게 됩니다. 같은 말씀을 붙잡은 뼈는 같은 마음과 뜻을 가진 뼈를 만나서 짝을 맞추게 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끼리 연합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교회 안에 흔들림이 생기면,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데 알곡은 알곡대로 연합하고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연합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같은 속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연결되고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끼리 모이기를 좋아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흔들림의 결과로 생기는 분리와 연합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8절.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면서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럴듯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생기(성령의 임재)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죽었다는 것입니다. 눈, 코, 입이 있어서 말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가 그 속에 없습니다. 골짜기에 있는 수많은 뼈들이 살아나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 안에 아직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성경이 있고 말씀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예의도 있고 상식도 있어 보입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아직 죽어 있는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살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곤고하지 않고 가련하지 않습니다. 눈멀지도 않았고 벌거벗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많이 들어서 지식이 있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조금 안다고 해서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심령 속에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죽은 자들에게 성령이 바람처럼 불어와서 살아나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죽은 자, 즉 사망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뼈가 맞추어지고 그 위에 살과 힘줄과 가죽이 붙어 있는 사람입니다. 오장육부가 있고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망당한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죽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성령의 바람이 그들에게 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기가 그들 속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해서 간절하게 성령을 초청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성령이여, 부디 이 교회 속에 들어오셔서 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이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지만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성령의 바람을 불어주시옵소서. 저들을 살려 주시옵소서.” 에스겔의 호소에 성령께서 응답하실까요?

10절.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골짜기에 산더미처럼 쌓여서 죽어 있던 뼈들은 원래 군대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바람처럼 불자, 다시 생명을 얻고 일어났는데, 그들이 다시 큰 군대가 된 것업니다. 이어지는 11절부터 죽은 이스라엘 교회의 참담한 상태가 다시 묘사됩니다.

11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지금은 성령을 받고 살아났지만, 전에는 소망도 없고 멸절되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푸념처념 들립니다. 주변 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쟎습니까?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뜨뜻미지근한 것이 당연하죠.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 나오는 마지막 교회처럼 우린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게 살고 있습니다. 우린 다 마른 뼈입니다. 우리에겐 소망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멸망당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린 그저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12절.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무덤을 여는 모습이 나옵니다. 왜 무덤을 열어야 할까요?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 무덤을 여시는 것입니다. 뼈에 살이 붙고 가죽으로 덮혀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 해결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죽은 송장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무덤 문을 여시고 꺼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에 별을 다시고 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살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까? 왜 계속해서 죽어 있으려고 합니까? 왜 살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뭔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 말씀이 우주의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린 이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우린 무덤 속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을 간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나를 살려 내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신앙은 매달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의지가 강해야 신앙이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의지와 매달림은 다른 것입니다. 칠흙같이 캄캄한 밤에 바다에 홀로 떨어진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수영할 줄 모르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면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무엇인가 붙잡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잡을 수 있는 것을 찾고 또 찾을 것입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지 의지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승리하는 생애를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13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살려 달라고 외치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무덤을 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를 세속에서 건져 주시고,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구해 주시고, 돈을 사랑하는 정신과 돈에 의존하는 정신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구해 주시고, 이기심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을 때 생기는 변화입니다.

남들이 인정하는 큰 교회, 정통 교회에 다닐지라도 무덤 속에서 마른 뼈로 누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라서 죽은 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순종과 헌신과 희생을 이야기할 때 귀를 막고 돌아서면 죽은 뼈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거절하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에는 귀가 솔깃해지면 마른 뼈입니다.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 나오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설교가 마음을 기쁘게 하면 마른 뼈입니다. 성령께서 더 밝은 빛과 진리를 주시는데, 그것을 외면하면 마른 뼈입니다. 마른 뼈들은 왜 그런 반응을 하게 될까요? 생기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아직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 말씀과 계명이 무거운 멍에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성령을 받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진리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유혹에 저항하고 죄를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을 죽은 자들을 위한 선교에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소

구약 시대에 에스겔에게 하셨던 질문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지금 기독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마른 뼈들이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에스겔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주여, 제 눈에는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에스겔에게 하셨던 명령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금 너희 눈에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주어라. 비록 그들이 죽은 뼈처럼 보이지만 들을 귀는 가지고 있단다. 그들이 아직 하나님의 군대처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있으니 말씀을 전해 다오. 기회가 되는 대로 진리를 전해 다오. 그렇게 하면 그중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말씀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 것이고, 그 흔들림을 통해서 알곡들이 가라지와 쭉정이로 분리될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마른 뼈에 살이 붙고 근육과 피부가 생기고 사람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아직 생기는 없지만, 사람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성령의 바람을 그들에게 불어 갈 것이다. 성령으로 그들 속에 들어가서 호소하고 교육시킬 것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그들은 온 마음과 생애를 나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열매가 맺히게 될 때 내가 그들을 추수하여 하늘 창고로 거두어들일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알곡들을 추수하는 방법이다. 이 세상의 복음 전파는 성령으로 마쳐지게 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교파에 속해 있습니까? 모든 진리를 갖고 있는 교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우신 초대 교회의 말씀과 계명이 여러 교파 속으로 흩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을지라도 주께서 주고자 하시는 온전한 진리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교리만 갖고는 안됩니다. 하늘로부터 살아 있는 생명과 온전한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동기가 순수해지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과 합해져서 의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더 밝은 빛을 향해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검은 말 시대부터 훼손되어 온 하나님의 계명을 회복시키고 지킬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군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2편,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남은 교회

기독교회는 예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은 제자들과 사도들의 교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와 신앙의 기준은 처음 교회가 시작된 초대 교회이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갖고 있던 복음과 교리와 계명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만일 검은 말과 청황색 말 시대의 교회가 거짓 교리와 거짓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도 오직 하나의 교파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검은 말과 청황색 말 시대를 지나면서 천년 이상 동안 이교의 교리와 거짓 계명이 교회로 들어왔고 교리화 되었습니다. 구원의 도가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가 면죄부를 팔 정도로 깊은 나락에 떨어져 있었을 때 1517년, 하나님께서 마르틴 루터를 일으키셔서 종교 개혁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유럽의 이곳저곳에서 일어나 가톨릭교회가 기록된 말씀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버렸다고 외쳤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지만, 개혁자들의 입에서는 “기록된 말씀, 오직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라는 구호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을 것을 호소”하는 것이 종교 개혁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숨겨진 역사

카톨릭교회는 불길처럼 일어나는 종교 개혁 운동을 핍박으로만 억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이 너무나 성서적이었고 강력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과 가르침이 밀물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지지자들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교황의 교리와 가르침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이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까지 개신교회에서 금기시하는 숨겨진 사건이 일어났는데, 독자 여러분은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창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교황청이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하는 “오직 성경”의 신앙에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교황청은 1545년에 시작된 트렌트 공의회에서 그들이 발견한 개신교도들의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교황청은 그들의 대변인으로 로히오의 대주교를 정하고 성경만을 주장하는 종교 개혁파와 프로테스탄트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변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황청의 주장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카톨릭교회의 이 주장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파와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기록된 말씀에만 의존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성경만을 믿음의 표준으로 고백합니다. 그들은 카톨릭교회가 기록된 말씀을 떠나 전통을 따름으로 배도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카톨릭교회를 떠난 반역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이 성경만을 따른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성경만을 신앙의 표준으로 받든다는 그들의 신앙 고백은 거짓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합니다.

증거: 성경 말씀은 분명하게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배척합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성경을 표준으로 받든다면 그들은 성경이 일관성 있게 명령하는 제칠일을 예배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록된 말씀이 명하는 안식일 준수를 거부할 뿐 아니라, 카톨릭교회가 세운 전통 외에는 근거가 없는 일요일을 채택해서 그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만을 표준으로 삼는다’는 그들의 주장은 부당합니다. 그러므로 카톨릭교회가 갖고 있는 ‘성경과 전통’을 함께 받드는 교리는 필수적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들도 카톨릭의 기준을 따라오고 있습니다.”(대영백과사전, “Augsburg Confession”, “Trent, Council of.” and “the proceeding of the Council”) 교황의 교리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개신교도들은 교황청의 이러한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트랜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종교 개혁 운동을 카톨릭교회의 거룩함과 권위를 대적하는 불법 저항 운동으로 규정했습니다. 지난 5백년 동안 개신교회는 트랜트공의회에서 개신교 신앙이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역사를 숨기고 있지만, 모든 것이 문서로 남아 있으며 카톨릭교회는 지금도 동일한 논리로 개신교회를 비판하면서 다시 어머니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개신교회는 교황의 교리에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이어 갈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중세기에 무너진 진리와 계명을 회복하고자 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은 사라져 버렸고 각 교파마다 교단주의로 울타리를 높이 쳐 놓은 채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검은 말 시대와 청황색 말 시대에 들어온 수많은 거짓 교리와 거짓 계명이 개신교회의 각 교파로 흩어져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남은 무리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어떤 교회를 인도하실까요? 현실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교회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타락하였고 교파가 분열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더 밝은 빛으로 나가기 위해서 온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성도들을 인도해 오고 계십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서는 그들을 이기는 자들이라고 부르며, 성경은 그들을 남은 무리라고 부릅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남은 무리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남은 무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사 10:22)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다 모래같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따르는 남은 자들만 구원받게 됩니다. 사탄이 교회를 공격해서 교회가 크게 흔들렸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검은 말 시대에는 “감람유와 포도주”의 신앙을 갖고 있던 성도들이 남은 자였고, 버가모 교회에는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거절한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남은 무리였습니다. 청황색 말 시대와 두아디라 시대에는 깊은 산과 계곡에서 광야 교회를 세워서 진리를 지켰던 성도들이 남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학개는 오래전에 남은 무리의 특성을 이렇게 기록했던 것입니다.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학 1:12). 여호와의 말씀과 선지자의 예언을 청종하는 것, 이것이 선지자 학개가 말한 남은 무리의 특징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남은 무리

검은 말 시대에 무너진 십계명은 중세기 천년 동안 짓밟혀 오다가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상을 만들거나 섬지기 말라”는 둘째 계명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넷째 계명은 마지막 시대까지 짓밟혀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성도들, 즉“남은 자손”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계명을 회복시키는 “남은 자손”이 나타나면 사탄이 분노해서 그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왜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공격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검은 말 시대에 무너뜨린 계명을 다시 회복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계명을 무너뜨려야 니골라당의 교리를 교회 안에 세워서 성도들을 미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짐승의 표 환난 때에도 계속될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손”이 승리할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에서 승리: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마지막 남은 자손의 승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킹제임스 성경)

 

마지막 때 다시 부활한 니골라당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남은 무리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너무나 많은 성직자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해졌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의 신앙이고 율법주의이다”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검은 말 시대와 청황색 말 시대에 있었던 말씀의 기근이 말세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왜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일어났을까요? 검은 말과 청황색 말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무너뜨렸던 니골라당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당이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신앙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중세기 종교암흑기 동안 광야에서 옛 신앙을 지켰던 성도들의 믿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시대의 투쟁은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현대판 니골라당의 투쟁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어떤 신앙을 받아들이가에 따라서 여러분의 구원과 영생이 결정될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핵심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십자가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순종할 때 얻게 되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영혼의 평안을 뜻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6~18, 22).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의 의미를 곡해시키는 니골라당의 주장이 마치 진리처럼 포장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누가 참된 예배자인가?

예수께서는 당신께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남기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예수님)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렇다면 예수 이름으로 예배드리기만 하면 예수께서 항상 함께하실까요? 아닙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with Spirit and Truth,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성령과 진리)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말씀을 따라가는 충성된 남은 무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성도들을 찾고 계신다. 성령과 진리, 둘 모두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있는데 성령이 없으면 신앙이 메마른 형식과 위선이 되고, 진리가 없는데 성령에만 몰입하면 신앙이 기초가 없이 흔들리는 의미 없는 감정으로 갑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헛되게 경배하는 것을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doctrine-교리)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 헛된 경배란 어떤 것입니까? 입술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돈과 세속을 사랑하면서 사람이 만든 계명과 거짓 교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헛된 경배입니다.

네 말 탄 자 예언을 보면, 검은 말 시대부터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끄는 대로 거짓 교리와 거짓 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안에 우상들을 세우고 계명을 바꾸는 성직자들의 배도에 동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에는 그들이 교회의 주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의 교회 건물이 화려하고 숫자가 많을지라도 초대 교회부터 순교자의 피로 지켜 온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교단의 조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파나 교단에 속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앞서 진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하신 진리 위에 온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것이 구원과 영생의 길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에 대한 분명한 이해없이 수많은 교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등불없이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

 

4부, 넷째 인, 청황색 말 시대

청황색 말 시대의 교회: 종교암흑시대, 영적 죽음의 시대, 일곱 교회 예언의 두라디라 교회 시대(AD 538 ~ AD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무덤)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계 6:7~8)

사도 요한은 네 말 탄 자 예언에서 마지막으로 청황색 말이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는 검정색이 되다가 시체가 오래되면 청황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청황색은 오랫동안 죽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청황색 말 시대에 교회는 천 년 이상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었는데, 역사가들은 그 시대를 중세기 종교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사도 요한은 “말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인데 “음부(무덤)가 그 뒤를 따르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말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는 것은 청황색 말 시대의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영적 죽음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성직자의 뒤를 따라가는 성도들도 “음부” ,곧 영적 죽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흰말로 상징되었던 순결한 초대 교회가 중세기 천 년 동안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린 청황색 교회가 된 것입니다.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계 6:8)

성경에서 “사분의 일” 또는 “삼분의 일”은 정확한 수학적 의미라기보다는 거대한 규모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종교암흑시대 동안 카톨릭교회는 유럽의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8절에서 “(말 탄 자가)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말 탄 자가 성도들을 칼로서 죽이고, 말씀의 흉년으로 죽이고, 영적으로 죽였다는 뜻입니다. 검은 말 시대에 시작된 말씀의 흉년이 청황색 말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특별히, “(말 탄 자가)…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붉은 말 시대에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이 성도들을 물어 죽였던 것처럼, 청황색 말 시대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땅의 짐승이 되어 말씀에 충성하는 성도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중세기 종교암흑시대 동안 카톨릭교회가 5천만 명 이상의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모습을 “(말 탄 자가)…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청황색 말 시대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말씀과 교리가 무너지고 짓밟혔습니다. 이교의 가르침이 교회 안으로 들어옴에 따라서 연옥설과 마리아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연기와 같은 상태로 살아 있다는 믿음이 세워졌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 교리를 근거로 돈을 받고 연옥에 간 죽은 영혼을 천국으로 옮겨 준다는 면죄부를 판매했던 것입니다. 침례 대신에 세례가 시작했고, 로사리라는 묵주 기도가 시작되었으며, 화체설이 나타났고, 신부와 사제가 인간 중보자로 나서는 고해 성사가 시작되었으며, 각종 성상과 유물과 해골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의 미혹에 기만당했습니다. 청황색 말 시대에 이르러 교회는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청황색 말 시대에 새로운 교회가 나타난 이유

청황색 말 시대에 카톨릭교회의 배도가 깊어지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회가 가르치는 거짓 교리를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은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분명한 기준을 남겨 주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중세기에 하나님과 진리를 정말 사랑하는 성도들,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온 말씀을 지키기 원하는 성도들은 깊은 산과 계곡으로 들어가서 광야 교회를 시작했는데, 사도 요한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청황색 말 시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광야로 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교회에 속하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결국, 청황색 말 시대에는 기독교회가 카톨릭교단이 지배하는 교회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 교회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일곱 교회 예언과 일곱 인 예언을 보면, 일반 성도들이 타락하고 세속화되서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는 없었습니다. 항상 사탄은 먼저 교회 지도자를 공격했고, 지도자가 거짓 교리와 거짓 계명을 받아들이고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말씀과 진리를 전해 주심으로 말씀에 충성하는 성도들을 분리시켰습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나눠질 때마다 대대수의 사람들은 사탄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장 깊이 배도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진리로 양육하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3, 27).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아보고 반응하는 성도들이 각 시대마다 구원과 영생을 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새로운 교회가 나타난 이유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일곱 인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

청황색 말 시대는 일곱 교회 예언에서는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해당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말씀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분열된 이유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서기 538년에는 로마 천주교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종교, 정치, 군사력에 관한 막강한 권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거절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는 서기 538년부터 시작해서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약 천 년 동안의 긴 기간인데, 이 시대 동안 로마 천주교회의 권세는 유럽의 국왕들을 지배하고 장악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와 명령을 거절하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핍박했는데, 핍박이 생기자 새로운 교회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와 깊은 산으로 피신하여 진리를 간직하고 살았으며,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카톨릭교회와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진리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럽의 대도시에 있던 교회가 큰 건물과 장엄하고 화려한 예식 그리고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인 줄 알고 거짓 교리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청황색 말 시대에 말 탄 자가 말씀의 흉년으로 사람들을 죽였던 것처럼, 두아디라 교회에도 천 년 동안의 말씀의 기근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과 백성들을 광야와 산으로 피신시켰기 때문에 유럽 대도시의 교회들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도시의 교회에 남아 있던 교인들은 심령의 부흥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극심한 영적 기근 속에서 죽어 갔습니다.

16세기에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청황색 말 시대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개신교회가 지난 5백 년 동안 숨겨 온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3부, 셋째 인, 검은 말 시대

검은 말 시대의 교회: 세속화와 타협의 시대, 일곱 교회예언의 버가모 교회 시대(AD 313 ~ AD 538년) 

 

흰말 시대에 초대 교회가 순결을 유지하자, 붉은 말 시대에 사탄은 극렬한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를 붙잡고 있자, 사탄은 셋째 인이 떼어질 때 새로운 전략으로 교회를 공격해서 타락시켰고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계 6:5~6)

셋째 인이 떼어지면서 셋째 생물이 “오라”고 명령하자, 세 번째 말이 달려 나왔는데 그 말의 색깔은 검은색이었습니다. 그리고 검은 말 탄 자의 손에는 저울이 들려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검은색과 저울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흰색이 순결과 승리를 상징하므로 정반대의 색깔인 검정색은 타락과 패배를 상징합니다. 얼마나 교회가 깊이 타락했으면 하나님께서 말의 색깔을 검정색으로 표현했을까요? 검은 말 시대는 교회가 악의 세력에게 처참하게 굴복했던 시대입니다.

 

저울을 들고 있는 말 탄 자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계 6:5)

검정 말 탄 자의 손에 저울이 있다는 것은 검정말 시대에 교회를 지도하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올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고대 바벨론이 멸망당하는 장면에서도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져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단 5:27). 또한 저울은 검은 말 시대에 교회를 채우고 있던 세속적인 상인의 정신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 탄 자가 장사꾼의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주의와 돈을 사랑하는 장사꾼의 정신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뜻합니다.

 

검은 말 시대에 교회가 둘로 갈라진 과정

사도 요한이 말 탄 자의 손에 저울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네 생물 사이에서 들려온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은 검은 말 시대의 교회가 둘로 갈라지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계 6:6)

밀과 보리는 그 당시 서민들이 먹는 양식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로마 시대에 노동자가 하루 일하고 받는 품삯이었습니다. 그 당시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으로는 밀 다섯 되 또는 보리 24되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생물 사이에서 나온 음성은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원래 한 데나리온으로 밀 다섯 되를 살 수 있어야 하는데, 밀 한 되밖에 사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한 데나리온으로 보리 24되를 살 수 있어야 하는데, 보리 석 되밖에 못 사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검은 말 시대에 들어오면서 기근이 들어서 양식을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검은 말 시대의 교회에 극심한 영적 기근이 생겨서 말씀의 양식을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적 기근이 온 이유

검정말 시대의 교회에 왜 영적 기근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붉은 말 시대에 피를 뿌리는 핍박을 가해도 교회가 순결을 유지하자, 사탄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검은 말 시대에 들어오면서 사탄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통해서 기독교회에게 자유와 돈과 명예를 던져 주었습니다. 사탄의 새로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회는 돈과 세속으로 깊이 타락하게 되었고, 온갖 거짓 교리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이 사라져서 말씀의 기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으로 밀 한 되와 보리 석 되밖에 못 사는 영적 양식의 기근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상태가 되자, 기독교회는 배도를 따라가는 교회와 거부하는 교회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검은 말 시대의 교회에 말씀의 기근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회가 3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핍박에 지쳐 있을 때, 태양신을 믿던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갑자기 기독교회로 개종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회에게 자유와 포교를 허락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불법 종교로 핍박받던 기독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로마 황제의 뒤를 따라서 수많은 태양신교도들이 기독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엉터리 교인들의 숫자가 급속하게 늘어남에 따라서 기독교회의 부패와 타협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핍박 하에서는 순결함을 유지하던 교회에 자유와 물질과 번영이 찾아오면서 교회는 세속화되고 타락했습니다.

태양신교를 믿던 로마 황제가 하루 아침에 기독교회로 개종하자, 그때까지 로마 제국를 떠받들고 있던 태양신교도들은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최고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태양신교도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그들이 기독교인들과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태양신교의 지도자, 율리우스 피르마쿠스와 기독교회의 감독 유세비우스를 불러서 협상을 했는데, 그것은 태양신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종교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AD 321년).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태양을 숭배하는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보고 그의 영민함에 감탄하고 있다. 이교도의 상징과 날짜, 여러 종교 의식들을 기독교 전통에 섞어 버렸다. 태양신교와 기독교 양쪽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혼합 종교를 만들어 냈다”(다빈치코드 1권, 351~353).

“교회 감독인 유세비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신학을 태양신의 이교적인 이념과 로마 황제 이념으로 짜 맞추어 기독교적으로 변형시켰다.”(Hans F. von Campenhausen, 희랍교부 연구, 대한기독교 출판사, 1977, 93).

 

최초의 빗나간 교파

성도 여러분, 300년의 핍박 속에서도 견디었던 교회가 검은 말 시대부터 길고 긴 배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검은 말 시대에 교회가 세속화되고 이교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교파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기독교회와 태양신교가 혼합시킴으로 생긴 카톨릭교회입니다. 물론, 카톨릭교회에서는 첫 번째 교황을 베드로라고 주장하면서 카톨릭교회가 초대 교회의 족보를 이어 가는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지만, 태양신과 기독교회의 혼합 형태로 기초를 놓은 카톨릭교회를 열두 제자들과 사도들의 피 묻은 진리로 세운 초대 기독교회와 같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검은 말 시대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 개종한 태양신교도들의 요구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수많은 진리를 타협하거나 변경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검은 말 시대부터 교회 지도자들은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또한 이교도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이교적인 행습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에 금지되어 있는 우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교회는 성도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 우상의 모습과 이름을 기독교적인 분위기로 바꾸었습니다. 우상에 마리아, 베드로, 요한, 바울과 같은 이름을 붙혀서 교회 안으로 들여왔습니다. 또한 태양신교도들의 예배일인 태양의 날(Sunday-일요일)을 “주의 날”로 부르면서 제칠일 안식일을 일요일로 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말들이 많지만, 카톨릭교회가 안식일 계명을 변경시킨 역사는 매우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카톨릭교회 자신이 안식일 계명을 변경시킨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는 개신교회가 존재하기 일천 년 전에 교회의 거룩한 사명에 의하여 예배의 날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시켰다. …그러므로 이날이 그리스도의 안식일이 되었는데, 개신교회가 예배일에 대한 아무런 항의 없이 천주교회로부터 떠나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정한 셈이다”(1983년 9월 23일, The Catholic Mirror).

 

말씀의 기근 속에서 진리를 붙잡고 있던 성도들

검은 말 시대의 교회에서 엄청난 배도가 일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리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충성스런 성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계 6:6)

밀과 보리가 그 시대에 일반 사람들이 먹던 식품이었던 것처럼, 감람유와 포도주도 로마 시대에 일반대중들이 먹던 식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검정말 시대에 교회 지도자들이 거짓 교리와 거짓 계명을 받아들이고 타락한 결과 교회 안에 영적 양식의 기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배도에 동참하지 않은 성도들은 “감람유와 포도주” 같은 말씀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감람유는 성소의 촛대를 밝혀 주는 기름으로서 성령을 뜻합니다. 또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피를 상징합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그러므로 검은 말 시대에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을 따라가지 않은 성도들은 성령(감람유)을 통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피(포도주)를 마시는 경험을 함으로써 영적 기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검은 말 시대에 교회는 두 무리로 나눠지게 되었는데, 첫째 무리는 “한 데나리온으로 밀 한 되와 보리 석 되”밖에 구하지 못해서 영적 기근에 시달리는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교회 지도자가 나눠 주는 거짓 교리와 거짓 계명을 받아들이고 말씀의 기근 속에서 죽어 갔습니다. 둘째 무리는 “감람유와 포도주”를 통해서 영적 기근을 피하고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버가모 교회 시대에 교회가 분열된 이유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일곱 인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

검은 말 시대는 일곱 교회 예언에서는 버가모 교회 시대에 해당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말씀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분열된 이유를 교리적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doctrine, 교리)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

버가모 교회가 분열된 첫 번째 이유는 교회가 “발람의 교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란 무엇일까요? 구약 시대 발람이라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이방국가의 모압왕과 공모해서 이스라엘 안으로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를 들여왔던 것처럼, 버가모 교회의 거짓 선지자들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공모하여 우상 숭배와 거짓 계명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여왔는데, 그것이 버가모 교회가 받아들인 “발람의 교리”입니다. 교회가 우상 숭배와 거짓 계명을 받아들이자, 배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복음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

일곱 교회 예언은 버가모 교회를 분열시킨 두 번째 이유를 “니골라당 교리”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태양신교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혼합시킨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니골라당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타협한 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순종과 행위에 얽매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성경 말씀에 무지한 사람들의 귀에 그런 주장은 매우 철학적이고 고상하게 들렸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초대 교회부터 3백 년 동안 걸어온 가난과 좁은 길 신앙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골라당 교리는 버가모 교회에서 크게 환영받는 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태양신교의 예배일과 우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버가모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니골라당의 교리는 그들의 입지를 지켜 주는 강력한 신학이 되었습니다. 니골라당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수많은 성경의 진리가 변질되었고 태양신교의 행습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영적 암흑 속으로 들아가자 기독교회는 타락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카톨릭교회와 카톨릭교회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교회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네(버가모 교회)가 내(예수님)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사탄이 거하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버가모 교회 시대부터 교회가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 시대에 교회에 의해서 순교당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안디바(Antipas)라는 이름에는 “Anti-대항하는, Papas-교부”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당시 “교부”라고 불리우던 교회 지도자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안디바(Antipas)”라고 불렀습니다. “안디바”라고 불리우던 소수의 그리스도인 그룹은 타락한 교부들과 교회의 지도층에 대항해서 일어났습니다. 타협과 세속의 길을 걷던 버가모 교회에 있어서, 안디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호하는 거룩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을 따르는 카톨릭교회와 초대 교회 신앙을 지키는 안디바의 교회로 나뉘어졌는데, 이것이 일곱 교회 예언이 말하는 첫 번째 교회의 분열입니다. 기독교회가 두 교회로 나뉘어졌는데 한 교회는 말씀의 기근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다른 교회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the hidden manna)를 주고”(계 2:17)

검은 말 시대에서는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고 표현된 말씀의 기근이 버가모 교회에서는 “감추어진 만나”로 표현되었습니다. 왜 버가모 시대에 만나가 감추어졌을까요? 버가모 교회가 발람의 교리와 니골라당의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감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과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니골라당 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버가모 교회에서 만나, 즉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만나)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48~51).

예수께서 버가모 시대에 말씀에 충성하는 성도들에게 “감추어진 만나”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검은 말 시대에도 예수께서는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에게 “감람유와 포도주”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비록 교회 지도자들이 타락했지만, 성령께서 안디바와 같은 충성스런 성도들에게 “감람유와 포도주”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에서는 버가모 교회가 타락한 교회와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교회로 분열되었는데, 네 말 탄 자 예언에서는 검은 말 시대의 기독교회가 말씀의 기근이 생긴 교회와 감람유와 포도주와 같은 하늘의 양식이 풍성하게 공급되는 교회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성도들은 두 교회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안타까운 사실은 대다수의 교인들은 타락한 교회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만일 그 시대에 있었다면, 어떤 교회를 선택했을까요? 그 시대는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어떤 지도자를 따르느냐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갈라졌습니다. 희생과 외로움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2부, 둘째 인, 붉은 말 시대

붉은 말 시대: 핍박과 순교의 시대, 일곱 교회예언의 서머나 교회 시대(AD 100 ~ AD 313)

 

붉은 말 시대는 로마 황제의 핍박이 극심했던 시대인데, 서기 313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회를 인정해 주기 전까지 붉은 말 시대가 지속되었습니다. 흰말로 시작된 초대 교회가 2백여 년 동안 순교자의 피로 물들면서 붉은 말 교회가 되었습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계 6:3~4)

예수께서 두루마리의 두 번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사탄이 교회를 무섭게 공격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달려오는 말의 색깔은 붉은 색이었습니다. 붉은 말은 성도들의 피를 뿌리는 핍박과 순교 시대를 상징합니다. 말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성도들을 죽이며 큰 칼을 받아 쥐고 있는 모습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콜로세움의 원형 극장에서 맹수의 먹이로 또는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무자비한 핍박과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로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온 우주는 죄인의 마음에 충성과 믿음을 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붉은 말 시대에 사탄은 패배자였습니다. 붉은 말 시대의 성도들은 사도들이 전해 준 원래의 복음과 원래의 계명을 그대로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붉은 말 시대에는 새로운 교파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극렬한 핍박 가운데 진리를 붙잡고 있는 교회에서는 새로운 교파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 시대에 교파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일곱 인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

붉은 말 시대는 일곱 교회 예언에서 서머나 교회 시대에 해당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한 말씀은 새로운 교파가 생기지 않은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네(서머나 교회)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

서머나 교인들은 큰 환난과 가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눈에는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평생 동안 핍박에 쫓기면서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고난을 위한 부르심에 응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재물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서머나 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난과 핍박은 서머나 교회를 순결하게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습니다. 가난과 핍박은 가라지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지만, 알곡들에게는 거룩함과 충성의 열매가 더욱 풍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가난에 시달리고 핍박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탄도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을 퍼뜨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 시대에도 새로운 교파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1부, 첫째 인, 흰말 시대

흰말 시대: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 제1세기의 교회, 일곱 교회, 예언의 에베소 교회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

예수께서 첫째 인을 떼시자 흰말이 달려 나왔습니다. 흰말이 달려 나왔는데, 흰말을 타고 있는 자는 활을 가졌으며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흰말과 말 탄 자가 갖고 있는 활과 면류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에서 흰색은 순결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흰말은 순결한 복음을 갖고 있었던 초대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면류관을 쓰고 흰말을 탄 자는 누구일까요? 말을 탄 자는 말을 주관하고 말이 가는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흰말을 탄 자는 초대 교회를 주관하고 이끄는 지도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면류관을 쓰고 흰말을 탄 자는 초대 교회를 직접 세우시고 주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흰말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지도하시고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흰말 탄 자는 활을 쏜다

흰말 탄 자는 활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 말 탄 자가 활을 가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이 장면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전쟁용 마차를 모시는 모습임)…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합 3:8~9).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병거를 몰고 활을 쏘면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흰말을 탄 그리스도께서 활을 쏘는 것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왜 활을 쏠까요? 누구에게 쏘는 것일까요? 사탄이 성도들을 유혹할 때 예수께서 성도의 마음에 말씀의 화살을 쏴서 박히게 하심으로써 죄인을 회개케 하십니다. 흰말 교회는 말씀으로 승리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며 그 활을 이어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 7:11~12). 이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칼을 갈고 활을 쏘셔서 사람을 회개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흰말 시대의 말 탄 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심령에 말씀의 화살을 쏴서 깊숙이 박히게 함으로써 회개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말씀의 화살이 초대 교회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께서 쏘시는 말씀의 화살이 가슴에 박힌 성도들은 회개하고 승리하게 됩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은 경건과 충성의 신앙을 갖게 됩니다.

 

흰말 시대에 새로운 교파가 생기지 않은 이유

흰말 시대는 역사적으로 로마 시대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돌아올 때 흰말을 타고 오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흰말 시대에 예수께서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심으로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제1세기의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고 복음으로 악을 정복하고 이기는 능력의 교회였습니다. 순결한 복음을 갖고 있는 교회에서는 새로운 교파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결한 복음을 갖고 있는 교회에는 사탄이 발을 붙일 수 없으며,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흰말 시대에는 사도들이 세운 초대 교회 외에 다른 교파나 교단이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시대에 새로운 교파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일곱 인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

흰말 시대는 일곱 교회 예언에서는 에베소 교회(초대 교회) 시대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에 새로운 교파가 생기지 않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

에베소 교회는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사도의 정체를 정확히 드러냈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칭 사도라고 하지만 아닌 자들”이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보내지 않으셨는데, 자기 스스로 사도 행세를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보내지 않았는데, 이 땅에서 자기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 자들을 시험해서 그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어떻게 시험했을까요? 성경 말씀으로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가르침을 시험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삶의 열매가 거룩한가를 시험했습니다. 이렇게 사탄이 교회 속으로 들여보내는 거짓 사도의 정체를 밝히고 드러내는 교회에서는 새로운 교파가 생길 수 없습니다.

“네가(에베소 교회)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예수님)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

니골라당은 독이 들어간 복음입니다. 일곱 교회 예언을 보면, 니골라당 교리를 먹고 마시는 교회마다 분열되고 새로운 분파가 생기게 됩니다. 초대 교회는 니골라당을 거절했기 때문에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고, 새로운 교파가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니골라당이 무엇인데, 초대 교회가 그것을 미워했으며, 예수께서도 그것을 미워한다고 하셨을까요? 니골라당은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믿으면, 어떻게 산다고 할지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니골라당은 그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하는데, 영지주의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도덕적 삶을 살기 살기 위해서 구태여 육체의 정욕과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물질과 육체는 악할지라도, 영은 항상 선하기 때문에 방탕하고 죄된 삶을 살아도, 영의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에베소 교회(초대 교회)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만들고자 했던 새로운 교파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6절)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들이 기독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성결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 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대판 니골라당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순종과 거룩함의 열매가 마음과 생애에 맺히지 않게 됩니다. 현대판 니골라당은 “육체의 본성에 끌려다니는 그리스도인”도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진리가 인도하는 좁은 길 대신에 넓은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교회 속에 뿌려 놓은 니골라당의 교리를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니골라당의 교리를 미워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절). 성도 여러분, 이 말씀 속에 교회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교회가 니골라당의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예수께서 미워하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런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1편, 교파가 많아지게 된 이유과 과정

<마지막 사명> 5호와 6호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예언은 열두 제자들이 세운 초대 교회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고, 종교 개혁 운동에 의해서 진리의 빛이 밝아지다가 마지막 때가 되면서 교회가 다시 힘을 잃어버리고 깊은 혼돈 속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일곱 교회 예언에 대한 모든 기사가 changesoul.com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일곱 인을 통해서 교파가 많아지게 된 이유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일곱 인은 일곱 교회와 매우 유사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비슷한 예언들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비슷한 예언을 반복해서 보여 주실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알려주고자 하는 예언이 중요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이곳저곳에 동일한 예언을 반복해서 주십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도들이 예언의 전체 장면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반복하십니다.

히말라야 산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히말라야 산의 전체 모습을 보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말라야 산을 여러 방향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머리 속에 히말라야의 웅장한 모습이 입체적으로 연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여러 각도에서 본 예언을 반복해서 보여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장래 일어날 일들을 정확하게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교회 예언과 동일한 기간 동안 비슷한 내용으로 진행되는 또 하나의 예언을 주셨는데 그것이 일곱 인 예언입니다. 특별히 일곱 인 예언의 전반부는 오늘날 기독교회 교파들이 많아지게 된 이유와 배경을 보여 줍니다. 이번 호에서 살펴볼 일곱 인 예언의 전반부에 나오는 네 말 탄 자 예언은 정말 놀라운 예언입니다. 계시록 6장에 기록된 일곱 인 예언의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는 인이 떼질 때마다 말이 한 마리씩 달려 나오는데, 이 예언은 일곱 교회 예언과 나란히 가는 병행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일곱 교회 예언 네 말 탄 자 예언 기간
에베소 교회 (사도 시대, 초대 교회) 흰말 교회(첫째 인) 서기 1세기
서머나 교회 (핍박과 순교 시대) 붉은 말 교회(둘째 인) AD 100~313년
버가모 교회 (타협의 시대) 검은 말 교회(셋째 인) AD 313~538년
두아디라 교회 (종교암흑시대) 청황색 말 교회(넷째 인) AD 538~1517년

우리는 네 말 탄 자 예언에서 말의 색깔과 말 탄 자의 모습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의 색깔은 교회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고, 말을 탄 자는 교회를 지배하는 세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 나오는 말 탄 자의 예언을 살펴보면, 각 시대마다 어떤 지도자들이 교회를 주관하게 되고, 그들에 의해서 교회가 어떻게 변하게 되며, 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곱 인에 나오는 네 말 탄 자 예언은 기독교회에 교파들이 생기게 된 이유를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이제부터 계시록 6장의 네 말 탄 자 예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네 말 탄 자 예언을 설명하고, 그것을 일곱 교회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계 6:1)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두루마기의 인을 하나씩 떼실 때마다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오라”하고 소리치는데, 그때마다 말이 한 마리씩 달려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첫 번째 인을 떼실 때 달려 나온 말은 흰말이었습니다.

네 생물은 누구일까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계 4:6)

네 생물이 있는 위치는 하나님의 보좌 주변입니다. 생물이라는 말의 원어는 “조아(zoa)”인데, 그 뜻은 “살아있는 존재들”(living beings)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생물들과 매우 비슷한데, 에스겔서에서는 네 생물을 그룹 천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래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그룹 천사들인 줄) 내가 아니라”(겔 10:20). 그러므로 네 생물은 네 그룹 천사를 뜻하며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성소의 둘째 칸인 지성소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속죄소(시은좌)가 있었는데 그곳에도 그룹 천사가 조각상으로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

서론, 처음에는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몇 해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모태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손에 끌려서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앞마당에서 놀면서 어른이 되었지만, 요즘은 제가 참신앙을 배우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제가 왜 이 교회를 다녀야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살펴본 다음에 교회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과 형식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한 번도 내가 다니는 교회 울타리 저편에 있는 교회들의 가르침을 접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친구와 성경 말씀에 대해서 대화하던 중 그 친구가 나와 전혀 다르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서로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복음과 교리를 비교해 보니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3대째 기독교 신앙을 이어받아서 제가 믿는 것이 당연히 성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친구와 성경 말씀을 나누다 보니 제가 믿어 온 것들이 너무나 허술하고 성경에 기초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진짜 신앙과 믿음이 어떤 것인지 꼭 찾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돌이켜 보니 저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는 일을 배워 온 것 같습니다. 경건한 모습으로 찬송하고 엄숙한 음성으로 기도하고 그리스도인처럼 말하는 기술을 배웠지만, 정작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이 다 비슷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이 다 비슷한 믿음과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얕은 지식과 메마른 신앙 고백 그리고 정기적인 교회 출석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듯한 분위기에 저는 너무나 익숙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교회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없었으며 의식과 전통 그리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기도에 너무나 익숙해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이 교회를 계속 다녀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파가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파인가요? 어떤 교파가 성서적인 복음과 예언을 갖고 있나요? 부디 저를 도와주세요!”

두 가지 이유

오늘날 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신앙을 찾기 위해서 이 교파, 저 교파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파와 신앙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기독교회에 교파가 많아지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교파가 생기게 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람의 교리와 사람의 계명으로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 7:7~8).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교리로 경배하기 때문에 교파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했다면,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교파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12제자들이 세운 초대 교회가 지금까지 내려왔을 것이고 다른 교파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적인 가르침을 찾기 원하는 성도들은 제자들이 처음 전해 주었던 원래의 복음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초대 교회가 갖고 있던 원래의 복음과 원래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한 심령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집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서야 합니다. 주 앞에 나가 성경을 펴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보여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고치라고 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받아들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순결한 신앙으로 돌아가는 방법입니다.

교파가 생기는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타락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순수한 복음과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개혁 운동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파는 개혁 운동의 결과로 생길 수 있습니다.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 때문에도 새로운 교회가 생기지만, 교회가 타락했을 때 그것을 개혁하고 더 밝은 빛으로 나가기 위해서도 새로운 교파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파를 살펴볼 때 타락의 결과로 생긴 교파인지, 개혁의 결과로 생긴 교파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회 모습을 이렇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심령으로 이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4~17). 이것이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해서 본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교회가 세속화되고 영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 교회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들이 세운 하나님의 교회가 맞는가? 성경 말씀에 충성해야 할 교회, 성령이 충만해야 할 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영적으로 죽을 수 있을까? 이 교회가 정말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교회가 맞는가?” 마지막 시대는 진실한 성도들이 깊은 고뇌에 빠지는 시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보면서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은 라오디게아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하나의 교회였던 기독교회가 세월이 지나면서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분열된 교회들이 하나같이 라오디게아의 영적 죽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은 열두 제자들이 세운 교회가 타락하는 과정과 교파들이 생기는 이유를 정확하게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명>은 이번 호에서 기독교회에 교파들이 많이 생기게 된 과정과 이유를 보여 드릴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를 인도하시는지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은 이번 호에서 특별한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16호를 시작하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기독교회에 왜 이렇게 교파가 많습니까? 처음에는 열두 제자가 세운 초대 교회 하나밖에 없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교파가 많이 생겼습니까? 어떤 교회가 성서적인 교회이고, 어떤 교회가 비성서적인 교회인지 가르쳐 주세요.” 불교에도 분파가 있고 이슬람에도 분파가 있지만, 기독교회처럼 교파와 분파가 많은 종교는 찾기 힘듭니다.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다닌 사람들도 기독교회에 교파가 많은 이유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을 때 어떤 교회를 다녀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참 힘듭니다. 더욱이 수백 개의 교파가 저마다 자신들이 믿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파 교회, 순복음교회, 유니테리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 교회, 루터교회, 성공회, 천주교회,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교회, 사도교회, 기독과학교회, 동방 정교회, 세계 복음교회, 구세군 교회 등등 이 세상에 기독교 교파들이 약 200여 개나 되는데, 각 교파마다 여러 분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 있는 침례교단에는 약 20여 개의 분파들이 있습니다. 침례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20개 분파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장로교회를 다니려고 결정하면 더욱 복잡해집니다. 왜냐하면 장로교단에는 쉽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분파가 많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교파들이 생겨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서적인 교회를 찾아내는 것은 가능할까요? 주님의 음성을 아는 양들은 이번 호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모두를 광명한 빛으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