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정말 어떤 것인지 알면,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이런 이끌림 때문에 그리스도인 생애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순종과 선한 행위가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을 모르면 사도 바울이 정죄한 의미 없는 “행위”만 무성하게 만들어 내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죄를 어떻게 몸으로 질 수 있는가?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이상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나의 몸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중심까지 이해하게 됩니다. 죄를 범하면 몸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거짓말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됩니까?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 땀이 몸을 적시기도 합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안과 행복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죄를 범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셨을 때 죄인이 느끼고 감당해야 하는 신체적인 반응과 정신적인 고통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가 갚아야 할 부채를 당신 자신의 계좌로 넘겨받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죄로 인해서 받게 되는 심판을 대신 경험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죄의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실제적인 맞바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40장은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40:12).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 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 구세주께서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의 모든 죄가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짓누르는 고통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장면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다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라는 사실을 아셨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이 기도는 이마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기도였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예수께서 이런 기도를 드린 이유는 로마의 십자가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로마군인이 세우는 십자가와 채찍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설교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아무 생각 없이 먼지 속에 던져 버리는 신성모독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중세기를 지나가면서 적어도 5천만 명 이상의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제1세기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머리를 땅에 처박고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고문당하고 죽어서 온몸이 역청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로마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의 기름으로 사용된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쇠사슬에 묶여서 사형을 당하러 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벅찬 감동과 기쁨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장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가시관이 두려워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요? 우리의 구세주께서 그렇게 약한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했을 때 “잔”에는 어떤 것이 담겨져 있었을까요? 그 “잔”에 무엇이 있었길래 그리스도께서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그 “잔”에는 악인들에게 부어지는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잔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와 심판과 공의가 십자가에서 독생자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하나도 남김없이 부어졌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아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고뇌가 어떠했을까요? 진노의 잔을 모두 마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요 19:30).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마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십자가 복음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는 남은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은혜를 조금이라고 갚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솟구치게 되는데, 그 소원이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이끌어 가는 강력한 에너지가 됩니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9, 22). 십자가를 알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지옥의 캄캄함을 통과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실 때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기 때문에 죄를 범한 사람이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같은 신체적인 반응이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과 몸을 실제적으로 압박했습니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과 죄책감의 뼈아픔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마음과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마 26:39).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죽어 가면서 그런 외침을 한 적이 있었던가요? 순교자들은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미하면서 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죄인의 절규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나온 고뇌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그리스도를 깜깜한 지옥 같은 절망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는 죄가 힘을 쓰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 몸서리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영혼을 버리는 사망”을 당했습니다. 죄로 죽어 가는 인류를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히 죽어 없어져 버리더라도 죽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 엄청난 사랑 때문에 인류에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목도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선언은 법적 조치이지만 그 속에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압도된 죄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의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심령 속에 생기는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이 무엇인지 아는 그리스도인은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과 욕심에 끌려다니는 대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끌려다님으로써 순종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창에 찔림인가? 심장의 파열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고통으로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죽게 하기 위하여 다리를 꺽었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 27:50). 이것은 갑작스런 죽음의 장면입니다. 왜 갑자기 운명하셨을까요? 인류의 죄를 짊어진 고통과 가책과 정죄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로마군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을 연구한 트루만 데이비스 의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현상을 심장 부근의 물 같은 액체가 터져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낭에 있는 액체가 심장을 압박함으로 심장이 파열되어 숨지셨다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인류의 죄를 온몸으로 짊어지셨기 때문에 영혼의 괴로움과 죄의 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의 심장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가시관과 못과 창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가 찌르는 고뇌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퍼부어진 저주와 진노의 잔을 마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 죄가 그리스도를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0편 12절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류가 범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실제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으로 인도한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구원과 영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의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놀라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면 그때부터 구원의 경험이 시작됩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주께서 내 죄를 실제로 져 주셨기 때문에 내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정죄에서 벗어나 영혼의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람은 길이 좁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왜 내가 순종해야 합니까?”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고 심판받는 죄인의 절망으로 압도되셨습니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죄를 대신 져 주심으로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우리를 포기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지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곁에서 끝까지 그분을 괴롭혔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감사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영원히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무덤 속에서 부활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마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부활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약속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구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거룩한 선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속에 있던 사랑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리스도께서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누가 이 놀라운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을까요?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결코 그 사랑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서 새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흘러 다니는 이상한 복음에 미혹당하지 않습니다. 값싼 은혜와 싸구려 복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취되는 예언
기독교 전체가 계명에 대한 오해로 깊은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다.”라는 설교들이 거침없이 설교단상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시대에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도 여러분, 지금 기독교회는 십자가로 계명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대로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아는 성도들은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고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란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가슴 속에 새겨진 성도에게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사랑”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 14:2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십자가가 흔들리면 신앙 전체가 흔들린다!
기독교회 안에 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은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무릎 꿇고 감사와 감격으로 경배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온 마음을 다해서 충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를 몸서리치면서 버리게 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십자가는 사탄이 교회 안에 세워 놓은 것인데, 그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편리한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고통이 얄팍하게 처리되는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려고 하지 않으면서 영광의 면류관만 쓰려고 합니다.
요즘 기독교회의 설교자들은 성경의 십자가는 매장 뒤편에 숨겨 두고 쇼윈도 앞에는 내놓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세상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기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칠 것을 알기 때문에 교인 마케팅에 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십자가가 아닌 아름답고 감정적으로 포장된 가짜 십자가가 교회를 뒤덮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말씀의 기근이 왔고 재앙이 내리고 있습니다. 영적 기근과 재앙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교회 안에 내린 재앙
말씀의 기근과 재앙이 교회 안에 내리자, 사람들이 예배와 찬양 시간에 십자가를 말하면서 웃고 농담하고 드럼을 치고 탬버린을 두드리면서 한쪽 다리를 떨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죄를 그대로 붙잡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돈을 붙잡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으면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있어도 항상 웃을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매직 같은 십자가가 온 교회를 휩쓸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늘 죄를 붙잡고 있고 세속에 끌려다니지만 구원에 대한 거짓 안전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거의 완전한 자기기만과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호소를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바울은 우리가 온 마음과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고,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더욱더 순수한 애정과 믿음을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우리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지점까지 이끌어 갑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서 사신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판단, 계획, 말이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와서 “당신은 왜 이렇게 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제 영혼을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모든 사람이 거룩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 한마디가 우리의 가슴을 찢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경배하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호의 실린 말씀이 성도 여러분의 신앙과 생애 속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