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감추어진 십자가 복음의 비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정말 어떤 것인지 알면,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이런 이끌림 때문에 그리스도인 생애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순종과 선한 행위가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을 모르면 사도 바울이 정죄한 의미 없는 “행위”만 무성하게 만들어 내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죄를 어떻게 몸으로 있는가?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이상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나의 몸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중심까지 이해하게 됩니다. 죄를 범하면 몸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거짓말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됩니까?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 땀이 몸을 적시기도 합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안과 행복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죄를 범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셨을 때 죄인이 느끼고 감당해야 하는 신체적인 반응과 정신적인 고통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가 갚아야 할 부채를 당신 자신의 계좌로 넘겨받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죄로 인해서 받게 되는 심판을 대신 경험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죄의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실제적인 맞바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40장은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40:12).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 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 구세주께서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의 모든 죄가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짓누르는 고통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장면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다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라는 사실을 아셨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이 기도는 이마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기도였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예수께서 이런 기도를 드린 이유는 로마의 십자가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로마군인이 세우는 십자가와 채찍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설교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아무 생각 없이 먼지 속에 던져 버리는 신성모독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중세기를 지나가면서 적어도 5천만 명 이상의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제1세기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머리를 땅에 처박고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고문당하고 죽어서 온몸이 역청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로마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의 기름으로 사용된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쇠사슬에 묶여서 사형을 당하러 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벅찬 감동과 기쁨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장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가시관이 두려워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요? 우리의 구세주께서 그렇게 약한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했을 때 “잔”에는 어떤 것이 담겨져 있었을까요? 그 “잔”에 무엇이 있었길래 그리스도께서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그 “잔”에는 악인들에게 부어지는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잔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와 심판과 공의가 십자가에서 독생자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하나도 남김없이 부어졌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아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고뇌가 어떠했을까요? 진노의 잔을 모두 마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요 19:30).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마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십자가 복음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는 남은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은혜를 조금이라고 갚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솟구치게 되는데, 그 소원이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이끌어 가는 강력한 에너지가 됩니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9, 22). 십자가를 알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지옥의 캄캄함을 통과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실 때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기 때문에 죄를 범한 사람이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심 같은 신체적인 반응이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과 몸을 실제적으로 압박했습니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과 죄책감의 뼈아픔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마음과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마 26:39).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죽어 가면서 그런 외침을 한 적이 있었던가요? 순교자들은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미하면서 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죄인의 절규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나온 고뇌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그리스도를 깜깜한 지옥 같은 절망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는 죄가 힘을 쓰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 몸서리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영혼을 버리는 사망”을 당했습니다. 죄로 죽어 가는 인류를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히 죽어 없어져 버리더라도 죽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 엄청난 사랑 때문에 인류에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목도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선언은 법적 조치이지만 그 속에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압도된 죄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의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심령 속에 생기는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이 무엇인지 아는 그리스도인은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과 욕심에 끌려다니는 대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끌려다님으로써 순종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창에 찔림인가? 심장의 파열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고통으로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죽게 하기 위하여 다리를 꺽었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 27:50). 이것은 갑작스런 죽음의 장면입니다. 왜 갑자기 운명하셨을까요? 인류의 죄를 짊어진 고통과 가책과 정죄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로마군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을 연구한 트루만 데이비스 의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현상을 심장 부근의 물 같은 액체가 터져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낭에 있는 액체가 심장을 압박함으로 심장이 파열되어 숨지셨다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인류의 죄를 온몸으로 짊어지셨기 때문에 영혼의 괴로움과 죄의 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의 심장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가시관과 못과 창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가 찌르는 고뇌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퍼부어진 저주와 진노의 잔을 마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 죄가 그리스도를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0편 12절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류가 범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실제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으로 인도한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구원과 영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의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놀라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면 그때부터 구원의 경험이 시작됩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주께서 내 죄를 실제로 져 주셨기 때문에 내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정죄에서 벗어나 영혼의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람은 길이 좁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왜 내가 순종해야 합니까?”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고 심판받는 죄인의 절망으로 압도되셨습니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죄를 대신 져 주심으로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우리를 포기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지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곁에서 끝까지 그분을 괴롭혔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감사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영원히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속삭임을 들으면서 무덤 속에서 부활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마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부활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약속조차 보이지 않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구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거룩한 선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속에 있던 사랑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리스도께서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누가 이 놀라운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을까요?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결코 그 사랑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서 새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흘러 다니는 이상한 복음에 미혹당하지 않습니다. 값싼 은혜와 싸구려 복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성취되는 예언

기독교 전체가 계명에 대한 오해로 깊은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다.”라는 설교들이 거침없이 설교단상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 시대에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도 여러분, 지금 기독교회는 십자가로 계명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대로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아는 성도들은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고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란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가슴 속에 새겨진 성도에게는 “계명을 지키는 신앙”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을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사랑”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 14:2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십자가가 흔들리면 신앙 전체가 흔들린다!

기독교회 안에 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은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무릎 꿇고 감사와 감격으로 경배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온 마음을 다해서 충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를 몸서리치면서 버리게 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십자가는 사탄이 교회 안에 세워 놓은 것인데, 그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편리한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고통이 얄팍하게 처리되는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려고 하지 않으면서 영광의 면류관만 쓰려고 합니다.

요즘 기독교회의 설교자들은 성경의 십자가는 매장 뒤편에 숨겨 두고 쇼윈도 앞에는 내놓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세상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기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런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칠 것을 알기 때문에 교인 마케팅에 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십자가가 아닌 아름답고 감정적으로 포장된 가짜 십자가가 교회를 뒤덮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말씀의 기근이 왔고 재앙이 내리고 있습니다. 영적 기근과 재앙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교회 안에 내린 재앙

말씀의 기근과 재앙이 교회 안에 내리자, 사람들이 예배와 찬양 시간에 십자가를 말하면서 웃고 농담하고 드럼을 치고 탬버린을 두드리면서 한쪽 다리를 떨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죄를 그대로 붙잡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돈을 붙잡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한 번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으면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있어도 항상 웃을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매직 같은 십자가가 온 교회를 휩쓸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늘 죄를 붙잡고 있고 세속에 끌려다니지만 구원에 대한 거짓 안전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거의 완전한 자기기만과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호소를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바울은 우리가 온 마음과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고,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 더욱더 순수한 애정과 믿음을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우리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지점까지 이끌어 갑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서 사신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판단, 계획, 말이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와서 “당신은 왜 이렇게 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제 영혼을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모든 사람이 거룩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 한마디가 우리의 가슴을 찢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경배하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호의 실린 말씀이 성도 여러분의 신앙과 생애 속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5부, 육체적 고통으로 죄의 대가가 지불되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3)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어떤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The cross of Chirst>(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나님께서 로마군인과 군중들에 의해서 가해진 고통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다.” 오늘날 이런 가르침이 거의 모든 교회를 뒤덮고 있는데, 이런 가르침은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몇 년 전에 멜깁슨이라는 영화감독이 ‘The Passion of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미국에 있는 유명한 목회자들의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멜깁슨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장면 전체를 육체적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그려 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멜깁슨의 ‘The Passion of Christ’를 극찬했습니다. 한 유명한 목사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저는 멜깁슨이 만든 이 영화 덕분에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다음부터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시간마다 로마군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가한 고통을 묘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로마군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군인이 그리스도께 가한 잔혹한 고통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는 인터뷰 시간 내내 예수께서 몽둥이질당하고 침 뱉음을 받으며 아홉 가닥의 갈고리가 붙어 있는 채찍에 의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기는 것을 적나라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상태에서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지는 고통을 말했습니다. 대못과 가시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에 대해서 말했고 십자가 형의 처참함을 묘사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그리스도의 육체에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육체적 고통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십자가 복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로마군인들이 그리스도를 나무에 못 박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 군중이 그리스도를 때리고 비웃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이 그리스도를 부서뜨렸고 산산조각 냈습니다. 가시관과 대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와 저주의 형벌을 당신의 아들에게 퍼부었기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3)

 

하나님과 분리되셨던 그리스도

인류의 죄를 지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고 완전히 분리되셨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입혀진 모든 상처와 고통을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뒤돌아서신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인간적인 감정으로 바라본 십자가에 불과합니다. 시편 기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뇌를 영감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이 말씀에 이어서 시편 기자는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탄원을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환란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당신의 독생자인 나를 구원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늘을 향해서 외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시 22:4~7). 이것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린 바 된 죄인의 모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분리되었을까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짊어지시고 죄 자체가 되신 그리스도와 분리된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이 되셨고 죄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이 죄 자체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한번도 분리된 적이 없었던 하나님과 분리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made him to be sin for us,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할 수 없는 고뇌를 하게 만든 것은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과 치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 자신이 범죄자가 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불순종과 더러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과 진노가 그리스도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서는 짊어진 죄의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로부터 얼굴을 돌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짊어진 죄의 무게, 하나님과 분리된 고뇌의 무게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죄한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죽어 가는 장면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성도 여러분, 저주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성경은 진심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악하고 역겨우며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셨다는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진리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를 거절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희생을 설명해 주어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들어도 감격의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런 분들은 주님께 나아가 “주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제 마음이 주님의 죽음과 희생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8년 된 앉은뱅이가 주님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셨고 가련한 죄인이 되었으며 악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받아야 할 형벌의 정죄를 온몸과 마음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고통과 고뇌가 얼마가 극심했을까요?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의 정죄를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본 사람의 심령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죄만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용서는 우리의 심령 속에 감사와 충성을 깊이 심어 줍니다.

 

4부,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회는 예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은 제자들과 사도들의 교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와 신앙의 기준은 처음 교회가 시작된 초대 교회이어야 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성경은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자는 “여호와께 미워하심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abomination, 혐오스럽게 역겨운 것)을 입느니라”(잠 17:15). 이 말씀에 나오는 “미워하심, abominati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큰 혐오와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이 말씀은 마치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자를 미워하신다는 잠언서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서와 잠언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또한 바울은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그런데 잠언서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결코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과 잠언서 저자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상, 이 문제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며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셔야만 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면 우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를 범한 악인일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므로 예를 들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어 있었습니다. 옆방에서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살인자가 피 묻은 손으로 막내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들어서 살인자를 땅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얼마 후, 경찰이 와서 살인범을 체포했지만, 사랑하는 가족은 이미 죽었고 아버지의 인생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재판이 열리고 살인범의 죄를 증명하는 증거가 분명하게 제시되었습니다. 판사는 법정심리를 마친 후에 가족을 죽인 범죄자에게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나는 사랑의 재판관입니다. 나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온유하며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범죄자를 용서하고 석방하겠습니다. 나는 저 범죄자를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재판관을 공정하고 의로운 판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법정에서 재판을 지켜보았던 방청객들이 재판관의 사랑을 칭송하면서 손뼉치고 흥겹게 노래한다면, 여러분은 그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정의를 실현하라!”고 외칠 것입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고 신문사와 방송사를 찾아가서 “재판관이 가족을 죽인 살인범보다 더 사악한 자이다.”라고 탄원할 것입니다. 재판관은 철저하게 공의를 짓밟았으며 의로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무엇이 문제인가를 아시겠습니까? 재판관은 결코 죄를 범한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과 검사와 배심원 그리고 재판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재판관에게 공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공의를 행하는 분이시다”라고 말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할까요? 교회에서 잘못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상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공의로우신 분이라면 그분께서는 결코 죄를 범한 악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의 저자가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대부분의 독자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50년 전에는 복음을 잠언서의 저자처럼 설명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회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며 거룩하고 죄를 미워하는 분입니다. 악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루스벨과 범죄 한 악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내셨으며,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를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에게 무죄를 선언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살인범에게 무죄를 선언한 사악한 재판관과 같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복음의 딜레마는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범죄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설교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면서, 여전히 의로운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 어떤 설교자들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의로 대하실 수 있었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 주고 간과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한번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죄가 여러분의 구원과 영생을 무산시킬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설교가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죄를 덮어 버리고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불의한 것으로 만드는 수많은 설교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미혹당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11). 가장 멋있게 들리는 미혹은 이런 설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분의 의로우심과 공의를 뒤로 물리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게 했습니다.” 얼마나 멋있게 들립니까? 그러나 이런 설교를 들을 때 마음속에 빨간색 경고등이 켜지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의 딜레마를 풀어 주는 진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공의로운 결정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의롭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 : 1, 2).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명분하에 불의를 행하실 수 없으며 공의를 덮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악인을 의롭게 하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오직 하나의 답이 있는데, 그것은 “화목제물”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화목제물”은 죄를 범한 죄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절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고 “화목제물”의 정의를 써 보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확한 설명을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인을 위한 변호사가 되는가를 밝혀 주는 말씀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세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오래전부터 복음과 진리에서 벗어난 상태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온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로 들어올렸습니다. “화목제물”은 죄인을 대신하여 희생되는 제물입니다. 죄로 인해서 타락한 인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죄를 범한 악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공의도 충족케 됩니다. “화목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감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죄를 간과하시고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누가 화목제물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희생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범죄 한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범한 엄청난 죄를 짊어진 채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죽어야 하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소와 염소의 피로는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대속제물로 바쳐져야 할 존재는 하나님과 같은 신이어야 합니다. 왜 나무에 달려 죽는 희생제물이 육신을 입은 신이어야 할까요?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께로만 오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 구원은 피조물로부터는 올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없는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 피조물을 이 땅에 내려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죄를 해결했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사실이라면 일개 피조물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구원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 가르침은 구원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무너뜨려서 “먼지” 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도 요한은 그런 논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우리의 구원자이며 메시아인 분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런 성경절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이 말씀에서 “내가 있느니라”는 헬라어로 ego eimi인데 이것은 영어로 “I am”, 즉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다음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특징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됩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십니다!

 

여호와의 특징

구약성경

신약성경

 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욜 2:32

 행 4:12; 10:43; 롬 10:13

 2. 여호와는 자기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시지 않음

 사 42:8; 48:11

 마 16:27

 3. 여호와는 창조주

 사 45:18

 골 1:16, 17

 4. 여호와는 구세주

 사 43:11; 44:6; 45:21, 22; 63:16

 행 4:12; 5:31

 5. 여호와 우리의 의

 렘 23:6

 롬 3:21~22; 10:9~10; 고후 5:21

 6. 여호와는 처음과 나중

 사 44:6

 계 1:8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또 하나의 이유

우리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내려오신 창조주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고 동등하신 분이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자기를 낮추”셔서 이 땅에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신성의 영광과 특권을 하늘에 내려놓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할 뿐 아니라 천사보다도 못한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히 2:7).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못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였도다”(히 2:16,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과 동등하고 거룩한 분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오신 이유는 어떤 삶이 말씀과 계명이 순종하는 삶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팔복을 통해서 어떤 경험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또한 인간이 받는 시험을 직접 받으심으로써 날마다 시험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을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모본이 되셔서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단지 죄를 대속하기 위한 목적만 있었다면, 잠시 갈보리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면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33년 반 동안의 삶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사탄의 시험에 대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18)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가?

십자가 나무에 달리신 분이 왜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3~24).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부탁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고 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존재는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일은 사람이나 천사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를 정죄하는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피조물인 인류를 대속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분은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어야 하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대속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다리처럼, 사다리는 반드시 위쪽에도 닿아 있어야 하고 땅에도 닿아 있어야 합니다. 한쪽만 닿아 있는 사다리로는 위를 향해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붙잡고 계셨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구세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견디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늘이 태워지고 산들이 녹아내리며 강들이 말라 버린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날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뿌린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계 20:14).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몇 시간 동안 나무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해서 인류 전체가 범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람들을 지옥불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분은 몇 시간 동안 받은 고통으로 많은 사람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류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고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이 충분하고 완전한 이유는 예수께서 죄 없는 어린양일 뿐 아니라 그분의 생명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창조주로서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주의 생명을 측정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울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저울의 한쪽에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올려놓는다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요? 저울 한쪽에 천천만만의 천사,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 온갖 종류의 동물과 식물 그리고 나방과 귀뚜라미 같은 벌레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행성과 별들, 산과 바다과 강과 흙을 올려놓는다고 할지라도 저울은 그리스도 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는 우주 안에 감히 비교할 만한 대상도 없으며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조금 느껴지십니까? 그런 분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

 

3부,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의롭게 된다는 것은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라보고 붙잡았을 때 죄인은 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됩니다. 그런데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는 선언을 들을 때는 법률로만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심령 속에서도 그 경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게 될까요? 지금부터 이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롬 3:24).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는 선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의롭다 하심, 값없이 주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구원을 아무런 이유 없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값없이”라는 말은 “이유 없이”란 말과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요 15:25). 예수께서 누군가에게 미워할 만한 이유를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치료하시고 도와주시며 먹여 주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이유 없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값없이”라는 단어와 같은 원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실 만한 어떤 “이유”(공로)도 드린 적이 없는데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어떤 행위나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기독교회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구원

거의 모든 종교는 오직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신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가? 어떤 인간이 신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아프리카 토속신앙, 남미 원주민들의 신앙, 미국 인디언들이 행하는 피의 정결 의식과 인도의 힌두교 그리고 아시아의 불교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을 의롭게 할 만한 증거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로와 선한 행위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세 가지 종교가 있는데, 그것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입니다. 만일 유대교인에게 “당신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며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만약 이슬람교도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할까요? 이슬람교도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코란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성지순례를 빠뜨리지 않고 행해야 하며 하루에 3번 기도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중생의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나는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가운데 자라났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범했습니다. 나는 철저하게 불의하고 구원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심판받고 멸망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구원받을 만한 증거가 있다”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른 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천국에 갈 만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것을 기대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치를 증명했고 천국에 갈 만한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천국으로 보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결코 천국에 갈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 자신의 자격과 행함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분의 선함과 희생 때문에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인과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 중에서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며, 누가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 참된 종교가 어떤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원은 우리 자신의 도덕과 선행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가 필요한 이유

교인들이 “목사님, 왜 자꾸 죄에 대한 설교를 하십니까?”라고 항의한다면, 목사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적게 사함 받은 자는 하나님을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받았는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인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정확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그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죄를 지적해서 알려 주는 목회자야말로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과 설교를 하면 인기와 평판을 잃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부자, 빌 게이츠에게 아침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면 전혀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침밥을 무료로 먹고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손에 입맞추거나 무릎 꿇고 감사를 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굶주린 아프리카의 아이에게 밥 한 그릇을 주면 그 아이는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손에 키스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 아이는 배고품의 고통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한 그릇의 밥이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구원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형식적인 믿음 그리고 자기 사랑과 자기 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영광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바울이 기록한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성도 여러분, 지금 기독교회는 바울의 말씀을 싸구려 복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영혼들이 멸망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

어떤 아버지가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겨 있는데, 사람들이 그 아버지 앞에서 “예~ 당신의 외아들이 죽었군요!” 라고 하면서 흥에 겨워 손뼉을 치고 무릎을 친다면 그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마땅히 머리를 숙히고 떨리는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어떻게 유행가에 복음 가사를 얹혀서 드럼 치고 조명을 흔들어 대면서 탬버린과 헤드 뱅잉으로 피로 물든 십자가를 찬양할 수 있습니까? 어떤 마음,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정말 알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참혹하게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주신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우리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말하고 찬양할 때 우리의 목은 메어져야 하고 눈물이 고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말할 때 잠시 멈춰서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번은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전쟁 영상을 재미있게 시청했지만, 그 전쟁에 실제로 참전했던 군인들은 침묵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습니다. 왜냐하면 총알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전우와 친구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죽음 때문에 자신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너무나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피로 물든 은혜를 무료로 나눠 주는 홍보용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몸을 흔들고 드럼을 치고 탬버린을 두드리면서 “예~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네!’를 외칩니다. 무릎을 치고 흥에 겨워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찬양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나오는 정상적인 반응일까요?

몇 해 전에 미국 남침례교회 목회자가 현대 기독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생애를 묵상하고 찬양할 때 어떻게 아무런 생각 없이 세상 가수와 연주자의 흉내를 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몸을 흔들고 베이스 기타를 치면서 한쪽 다리를 떨 수 있습니까? 입으로는 ‘나는 십자가를 찬양합니다.’라고 외치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이시여,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자식을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가 독생자 예수를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세속적이고 진부하며 틀에 박힌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생각 없이 세상을 흉내 내면서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설교하거나 찬양할 때 세상을 흉내 내고 판에 박힌 태도와 일상적인 표정으로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감동과 메세지를 전달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감격하지 않는 십자가를 누구에게 전할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왜 돌아가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오물 같은 죄를 씻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시커멓고 더럽고 냄새나는 죄를 씻어 내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오직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나무에 매달려 피를 흘리면서 죽도록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죽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굴복한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십자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범한 죄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울까요?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가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목회자가 복음과 구원에 대해서 설교했는데, 한 청년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예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 청년의 말에 목회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청년이여, 예수께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과 구원의 전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셨고 먼지나는 유대 땅을 걸어다녔으며 인간 제사장에게 무시당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제단 위에 태우셨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렸습니까?” 그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거나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거나 밖에 있는 것입니다. 사망에 속해 있거나 생명에 속해 있습니다. 육체에 속해 있거나 성령에 속해 있으며, 정죄를 받고 있거나 자유 속에 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절규하면서 그리스도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은 순종, 그리스도와 분리된 선한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열정적으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독생자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99.99%가 그리스도이고 0.01%가 “나”라면 그 사람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온 마음과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은혜 아래 거하는 성도들의 마음과 생애 속에는 거룩한 열매들이 맺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의 경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의 경험을 설명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4~22)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6장까지 믿음과 행함의 관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문제를 설명한 후에 결론으로 남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과 “용서”와 “믿음”을 어떻게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의 결론과 상충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해도 정죄받지 않으며, 세속과 돈을 사랑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거듭난 경험을 하면 그 이후에 범하는 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대신 받고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죄를 몸서리치면서 버리게 될 것이며, 마음과 생애 속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6~19). ■

 

2부, 성경의 하나님을 만나야 복음이 된다

가장 위대한 축복이 될 수 있고 가장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롭다는 사실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고 참된 중생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공의로 심판을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때 그 결과는 두려운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이런 멘트와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에 대한 설교는 오래전에 유행하던 설교인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습니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는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성경 말씀과 부딪히고 말씀의 본질을 뒤집어 놓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하나님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포장하는 설교자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만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실 뿐 아니라 미워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이런 문구가 잘 팔리는 크리스천 티셔츠 뒷면에 써 있지만, 이런 표현을 잘못 이해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고 고집하며, 죄를 붙잡고 있는 죄인을 미워하실 뿐 아니라 멸하십니다.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시 5:5).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사람을 불쌍히 보십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으시며 죄가 없는 것처럼 감추거나 심판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한쪽 면만 보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펼치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을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의 말씀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롭지만 진노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쪽 면만 보도록 인도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번은 어떤 목사님이 주말 부흥회에서 죄를 경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을 설교했더니 교인 몇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강조했는데 왜 어제는 사랑만 설교하냐고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보여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사랑만 보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죄를 덮은 채 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순종과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아는 유능한(?) 설교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나눠 주어서 교회를 키워 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설교자들의 마케팅을 따라가면 복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뜨거운 반응을 나타낼까요?

칠흙같이 캄캄한 밤하늘에서는 별이 빛나지만, 대낮에는 태양의 빛 때문에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밝은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하면 복음을 볼 수 없습니다. 칠흙같이 캄캄한 죄인의 형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것인지 볼 수 있고 참된 가치를 알게 됩니다. 죄인을 칠흙같이 캄캄한 구덩이에 빠뜨려야만, 교만하고 목이 곧은 죄인이 하나님께 굴복하고 죄를 자복하며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드리도록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파서 죄인을 무덤 속에 깊이 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인의 상황이 얼마나 캄캄하고 절망적이며 처절한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를 말해 주어야만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며 온 마음을 다해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길에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나눠 주면 귀찮게 여기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게 열쇠를 보여 주면서 탈출하는 길을 가르쳐 주면, 온 마음을 다해서 열쇠를 받고 엄청난 기쁨과 에너지로 감옥의 문을 열고 뛰쳐나갑니다.

죄인에게 죄를 말해 주지 않는 것은 죽어 가는 암 환자에게 암 덩어리를 말해 주지 않는 의사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수치와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알아야만 십자가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과 헌신은 정통 교파에 속해야 나오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표준에 도달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비참하고 참담한 구덩이에 빠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의 참담함을 치워 버리면 복음의 영광스러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왜 마약 중독자, 창녀 또는 살인자와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향한 열성적인 사랑과 충성을 불태울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시궁창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창녀 굴을 빠져나왔고 죽음보다 무서운 마약을 끊었으며 살인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들은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을 때 심장이 터져 버렸고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공로를 쌓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올라온 감격스런 사랑과 충성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삭개오처럼 경건치 않은 사람에게 특별한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막달라 마리아처럼 경건치 않은 여인에게 특별한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38).

 

하나님께서 분노하는 이유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진리를 싫어합니다. 인간의 설교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달라지지만 진리는 사람들의 선호도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도착증 환자가 6명의 어린아이들을 성폭행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농담하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그 사람을 “사람취급”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당신 정말 역겨운 사람이군. 어떻게 그런 기사를 읽으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날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와 악을 보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한 것을 사랑하게 되면 거룩하지 않는 것들을 보면서 분노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죄에 대한 분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죄를 죄라고 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것들 중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분노하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분노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은혜를 거두시고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죄를 사랑하는 사람,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 거룩한 것에 관심이 없던 사람은 어린양의 진노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 산과 바위에 숨어서 두려움으로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사랑스럽게 보셨을까요? 날마다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의 타협과 교만과 비웃음과 무시와 거룩하지 않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무관심하게 내려다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말마다 목사들이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진리를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깎아내리는 설교를 들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 안에 들어 온 죄와 배도에 대해서 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점잖은 장로와 집사들을 하나님께서 어떤 눈으로 보실까요?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오늘날 “나는 분노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가르치지 않고 설교하지 않는 목회자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분노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모두 미워하시며”(시 5:5, 킹제임스성경). 얼마 전에 한 여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분노하실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추론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거룩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기로 골라 놓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이어지는 3부에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

 

1부, 죄를 알아야 복음을 만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죄가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말씀을 읽는 즉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사이에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생깁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스스로 죄에 대한 모든 책임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하나님 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상황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죄 속에 완전히 젖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물을 들이키듯이 죄를 들이키며 살아가면서도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다닌 교인들까지도 하나님을 공짜 선물을 나눠 주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향해 이루어진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다윗은 백성에게 죄를 범했고 밧세바라는 여인과 간음했으며 그녀의 남편을 죽였지만, 하나님께만 죄를 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 왜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호소를 거절하지 않는 한 범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이유는 죄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죄를 범하는 즉시 지옥의 정죄를 받게 되는데 왜 사람들은 죄를 범했으면서도 무서워 떨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이고 한없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별과 행성이 정해진 궤도에 돌도록 명하시자 별과 행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순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에게 정해진 위치에서 빛을 내고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들 또한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들을 만드시고 계곡의 물을 흘러가게 하자 그들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순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친 물결에게 명하여 “여기까지만 와서 멈추라”고 명하시자 호수와 바다도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에게 오라”고 호소하시는데 사람은 “싫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하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의 불순종도 끔직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호소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죄란 단순히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원수, 사탄에게 가서 그와 함께 하나님을 향해 싸우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담한 상태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세대에는 사람들이 노아의 때처럼 타락하고 악할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노아의 때 사람은 이런 상태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현대인들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이 정말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일어나서부터 저녁까지 마음에 품었던 모든 생각을 끄집어내어서 그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보여 준다면 어떨까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내 마음속의 생각과 계획을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버리고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숨기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살아갑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말할 때 “아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요. 성경은 “모든 인간은 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암으로 죽어 가는 환자가 암에 걸린 사실을 부인하고 치료를 거부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치명적인 죄의 병에 걸렸음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깊은 죄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는 다 부정하고…더럽다”라고 말한 것은 문둥병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심한 문둥병은 지독한 냄새가 납니다. 살은 썩어 들어가고 진물이 나며 냄새가 나고 부패한 고름과 피가 섞여서 흐르게 됩니다. 이사야는 그런 모습을 죄인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리 멋지고 고급스런 천으로 싸매고 동여매도 금새 진물과 고름과 피에 흥건히 젖게 됩니다. 결국에는 문둥병을 싸맨 천마저 썩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들어 낸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고 썩은 상처를 가린 천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거듭나기 전에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의 중심을 들춰 보면 이기심과 더러움과 위선으로 물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교회 안에 나타난 다른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I Love God, 하나님, 사랑합니다!”를 말하지만, 실상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신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결코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믿음의 조상들이 믿었던 성경의 하나님을 소개하면 “그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1960년대와 70년대만 해도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교회 안에서 성경의 하나님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싫어하고 진리를 향해서 돌과 같이 단단하고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사라지고 다른 하나님이 소개되자 사람들은 자신이 꽤 선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하나님은 죄를 버리지 않고 붙잡고 있는 사람도 사랑하기 때문에 천국에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상태에 어느 정도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께 올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악하고 지독한 죄의 문둥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절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오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준을 만족시켜야 하는데 표준은 하나님의 성품과 계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한 계명의 표준에 아무도 도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태어난 그 상태로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아무도 원하지 않고 찾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만일 누군가 하나님을 찾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 사람을 찾아와서 슬픔과 고난이라는 은혜를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렇게 악하지는 않기 때문에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기대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에 갈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3:10,23). 아담과 하와는 단 한 번의 죄를 범해서 온 우주를 혼돈과 악에 빠뜨렸는데,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죄를 범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단 한 번의 죄로 인해 정죄와 심판을 피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우리가 범한 수많은 죄가 머리 위에 쌓여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저 사람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심판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유지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호흡과 심장 박동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모든 호흡은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이루어져야 하며 모든 심장 박동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삶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고 섬기는 일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의 꿈, 나의 목표, 나의 뜻,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호흡하고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자들도 매일의 삶 속에서는 무신론자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업하는 장소에서, 공장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생각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바울의 말씀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하지만, 바울은 바로 그런 모습을 지적하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3:23).

기독교 서점에 가면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가 그대로 보입니다. “방언에 목숨을 걸어라”, “구원을 확인하는 10가지 방법”, “복 받는 신앙의 비결”, “우리의 삶 그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죽이지 않는다” 등. 기독교인들이 왜 이런 책들을 찾고 있을까요? 십자가와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시여,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2, 34).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양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공, 인정, 명예, 취미, 젊음, 아름다움 그리고 자아를 만족시키는 양식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양식을 찾으면 찾을수록 더 궁핍해지고 가련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양식을 구할수록 길을 잃어버리게 되고 삶은 혼돈스러워지며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나를 구하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서론, 죄가 분명해져야 은혜가 나타난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별같이 빛나는 수많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있었고 경건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성경 전체에서 복음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씀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말씀을 선택할까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선택하는 분들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3~28)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에서 인간의 구원을 설명해 주는 가장 위대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속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복음이 너무 어렵다고 하지만, 복음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와 동기와 목적을 찾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며 그들의 삶이 진리 위에 정확하게 서 있지 않습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복음을 몇 줄의 문장으로 간단하게 압축해 버렸습니다. 이제 복음은 10분 공부하고 기도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10분 만에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십자가가도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사명> 17호에서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한 줄씩 묵상하면서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꽃인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1장부터 3장까지 온 인류를 참담할 정도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는 왜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밝히면서 가혹하게 정죄하였을까요? 왜냐하면 죄를 죄 되게 하지 않으면, 은혜도 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분명하게 나타나야만 은혜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그리고 어떻게 놀라운 복음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서는 죄를 죄 되게 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독자 여러분을 죄와 정죄와 멸망의 깊은 늪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십자가 복음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번 호에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독자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이번 호를 끝까지 읽는 분들 중 어떤 분들은 자신의 삶에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며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17호를 시작하며…

오늘날 교회가 왜 능력을 잃어버렸을까요? 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감사와 충성이 나오지 않을까요? 십자가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장식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마다 십자가가 있고 교인들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지만, 십자가에서 죄와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은혜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가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어떤 목사님께서 한국기독교회의 문제를 한마디로 “바퀴달린 십자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피로 물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데 십자가에 바퀴를 달아서 쉽게 끌고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지금 기독교회 안에 두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이고 다른 십자가는 사람이 만들어낸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감격해서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께 바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낸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와 세속을 붙들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십자가를 붙잡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바퀴를 달아서 끌고 다니게 됩니다. 이번 호에서 독자 여러분은 기독교회 안에 있는 두 십자가를 분명하게 보실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관심 없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다녀도 복음의 중심으로 도무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십자가 복음을 소개할 것인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춰서 복음을 소개하지 않고 지금부터 50년 쯤 전에 복음을 소개하던 방식으로 십자가를 보여 드릴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불편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으면 “나도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독자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새겨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