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 있는 설문조사가 있습니다. 세계 4대 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만약 여러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와 모하메드와 힌두교의 크리쉬나와 석가모니가 앉아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이 가장 많이 나왔을까요? “다음 달에 당첨될 복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고 답변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모하메드와 석가모니, 힌두교의 신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서로 모두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세계 4대 종교 중에서 어떤 종교와 어떤 신이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인격적인지 살펴볼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슬람의 답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습니까?”라는 질문에 이슬람의 모하메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알라신이 코란경에 주신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알라를 믿는 신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알라신이 주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선하게 살라.’고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하면 모든 종교의 답이 달라집니다.

질문: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유혹과 시험이 올 때 생기는 내 속에서 올라오는 욕심과 정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과 힌두교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놀라운 답을 줍니다. 이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죄는 행위에서 결정됩니다. 만약 당신의 행위에 죄가 생겼다면, 알라신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이슬람에게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질문: “알라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하기 위한 대가는 누가 지불합니까? 누가 속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합니까?”

“속죄를 위한 제물은 필요 없습니다. 누구도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 없습니다. 알라신의 결정으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독자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수많은 죄가 범해지고 있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용서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죽여도 알라가 용서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격적일까요? 이슬람 극단주의에서 테러가 일어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결혼을 하는데, 가족들이 와서 총을 난사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해외로 탈출하거나 죽지 않으면 개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매우 친절하고 상냥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부딪치면 매우 배타적입니다. 다른 종교와 함께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격적일까요? 동의하는 분들은 이슬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와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죄와 구원에 대한 힌두교의 답변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인생과 죄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까요? 한번은 어떤 힌두교도가 사제를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형과 관계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형에게 돌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미워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힌두교 사제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인생은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습니다. 당신이 맡은 역할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신이 정해진 카테고리대로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신이 주신 카스트제도, 신분제도에 따라서 당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이 형을 미워해서 돌을 던진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당신에게 맡겨진 역할입니다.”
이 이야기는 힌두교를 믿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종교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인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힌두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와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힌두교 사제의 말과 비슷한 가르침이 기독교 교파에도 있습니다. 어떤 교파일까요? 기독교회에서 가장 큰 교파,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운명적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전에 이미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예정해 놓았습니다. 각 사람은 정해진 카테고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영접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정해놓으신 예정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예정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대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가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런 교리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격적입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장로교회에 다닐 수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결과와 책임은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인생의 고통에 대한 힌두교의 답변

힌두교에서는 인생에서 맞이하는 고뇌와 고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과거에 자신이 쌓아놓은 업보를 받는 것입니다. 과거에 쌓아놓은 문제는 언젠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당신이 고민과 고통에 빠지는 것은, 과거에 빚진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나타날 때마다 당신은 빚을 갚아야 합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찾아서 덕을 쌓아야 합니다. 공로를 쌓으면 당신도 우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힌두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악하게 산 사람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착하게 산 사람이 암에 걸리는데, 악인들이 잘 살고 부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성과 논리로 잘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불교의 답변

인생의 고통에 대해서 불교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눈에 보이는 악은 환상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괴로워하고 고통당하는 것은 마음의 욕망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욕망을 제거해야 합니다. 악한 욕망을 버리면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통과 악은 환상일 뿐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마음에서 욕망을 제거한 사람이 있을까요? 더 이상 악한 욕망이 올라오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불교에서 해탈을 말하고 속세를 떠날 것을 말하지만, 더 이상 육신에서 충동이 올라오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까요? 독자 여러분, 인체 과학은 인간이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왜 도달할 수 없을까요? 인간의 두뇌에는 변연계가 있는데, 그곳에서 끊임없이 감정과 충돌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두뇌입니다. 불교는 불가능한 목표를 정해놓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불교의 답변

그렇다면, 불교에게 신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은 당신이 정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자신도 한 번도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 덕을 쌓으면 극락에 갑니다. 불교는 윤회를 믿습니다. 사람이 이생에서 선과 덕을 쌓고 죽으면 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악을 쌓으면 짐승과 미물로 태어납니다. 불교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서 짐승과 사람 사이를 넘나드는 윤회를 믿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불교신자는 벌레를 죽이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물과 짐승 중에 죽은 가족과 친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구원론에 분명한 증거가 있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인격적이라고 생각합니까?
불교의 가르침이 증거가 있고 이성과 논리로 납득이 되며, 인격적인 구원론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불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결과와 책임은 온전히 본인이 져야 합니다.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의 문제

성경을 제외한 모든 종교는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종교에서 착하게 살라고 교훈합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은 죄는 마음이 아니라 행위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이기심과 증오심이 있어도 이슬람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가 있으면 마음의 죄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행위의 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제 이성과 양심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도덕적인 율법과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이슬람에서 왜 테러주의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날까요? 알라신의 뜻대로 순교하면 천국에서 많은 여인들과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왜 이슬람에서 나올까요? 행위가 알라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마음과 성품보다 행위를 중요시 여깁니다.
독자 여러분, 죄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죄는 마음이 아니라 행위라고 규정하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진정한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 천주교회 사제들 속에서 동성애와 소아성애가 이루어질까요? 이 문제는 중세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결혼과 성을 교리로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비정상적인 성욕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죄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행위를 교리나 율법으로 막으면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기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힌두교의 구원론은 무엇입니까? 힌두교도 선한 행위를 쌓아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선한 행위로 복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힌두교는 카스트제도로 정해진 운명대로 살라고 하면서 과거에 진 빚을 현재의 고통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를 범했어도 선한 행위와 덕을 쌓으면 형벌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회개는 강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심령의 변화 없이 선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힌두교도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책임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입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불교도 선한 행위를 쌓아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 종교는 선한 행위로 복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욕심 없이 고결하게 사는 스님의 삶을 보면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란 신을 섬기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선택할 때 꼭 기억해야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불교의 석가모니는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한 번도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와 후예들이 그를 신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이 아닌 존재에게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겠습니까? 저라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주 최고의 신, 창조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들처럼 불교에도 창조가 없습니다. 불교의 윤회설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말해주는 사상이 아닙니다. 윤회설은 이미 존재하는 생물들이 끝없이 순환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라는 이름의 의미는 ‘깨달은 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는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현인이지 이 세상의 기초를 놓은 신이 아닙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불교는 “왜 우리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고통을 피할 수 없는가? 지혜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인생의 고통에 대한 통찰과 고통의 이유를 깨닫기 위해서 삶을 바친 석가모니의 인내와 노력을 우리는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신이 아닙니다. 불교는 마음을 비우는 해탈을 목표로 수행합니다. 미래 언젠가 이루어질 해탈의 경지를 행해서 나갑니다. 그러나 현재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죄와 욕망에 대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불교신자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욕심과 죄에 끌려다니다가 답답하면 절에 가서 기왓장을 사고, 백배 절을 하고, 공양을 바쳐서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죽어서 극락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왜 기독교회에도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사람이 있을까요? 여기까지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에 죄가 해결되고 선한 생애를 살아갑니까? 기독교인 중에도 세속적이고 부패한 사람들이 많던데요!”
그렇습니다. 기독교인 중에도 사기꾼이 있고 부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신앙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진리를 모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는 경험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죄와 양심의 가책에 대한 해결책이 없으면, 종교가 위선자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부패와 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사제와 승녀와 주교의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회의를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하는 성직자를 보면, 고결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결혼을 금하고 엄격한 금욕을 요구하는 종교일수록 불륜과 동성연애, 소아성애가 침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의 죄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종교인들의 죄는 예배와 선한 행위로 덮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 선한 행위를 요구하고, 행위로 구원하는 종교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악한 욕망과 밖에서부터 오는 악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독재자와 비양심적인 정치인들을 모두 제거한다고 할지라도, 더러운 영상을 모두 없앤다고 할지라도, 극장과 텔레비전을 없앤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산다고 할지라도, 죄와 악한 욕망은 마음속에서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신, 어떤 종교를 찾아가야 할까요?

증거와 이성과 논리와 인격으로 신을 찾으라!

독자 여러분, 증거와 이성과 논리로 신을 찾으십시오. 최고의 신을 만나려면 공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종교, 내 교단을 주장하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신을 찾으십시오. 종교와 교회를 선택하기 전에 심령에서 떠오르는 여러 질문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질문에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고,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고,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는 종교와 교회를 선택하십시오.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설명할 수 있는 종교를 선택하십시오.
세상 역사와 지구 종말을 예언으로 분명하게 보여주는 교파를 찾으십시오. 선하게 사는 자들이 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신이 있다면 왜 죽음과 슬픔과 고통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지 설명하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왜 선한 사람보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죄가 이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고, 선과 악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설명해주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신들과 종교는 이기적이고 독단적입니다. 복 받으려면, 헌금 드리고 공로와 희생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기복신앙을 가르치는 종교는 가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한 신을 찾으십시오. 선한 신을 찾으면, 여러분은 참된 영혼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확신과 감사로 살게 될 것입니다. 다음 3부에서 그 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