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어떤 교파를 찾아야 할까요?

이제 중요한 질문을 드립니다. “기독교회에 10,000개 이상의 교파가 있는데, 그중에서 어떤 교파를 찾아야 합니까?”
12제자가 세운 초대 교회는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똑같은 복음과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하나였던 교회가 지금은 만 개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초대 교회는 하나였는데, 왜 지금은 만 개 이상의 교파가 되었습니까? 성경은 하나인데 왜 교파는 이렇게 많습니까?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기독교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사도 시대의 교회, 첫 300년 동안 사탄은 교회를 극심하게 핍박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그러나 복음과 진리는 순수하게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올라오면서 기독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첫 번째 기독교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위키백과사전)
300년 동안 로마 황제의 핍박을 받던 기독교회가 갑자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로마 황제가 개종하자 황제를 따라서 수많은 태양신도들이 기독교회 속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서기 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태양신 교도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그들이 기독교인들과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태양신교의 지도자, 율리우스 피르마쿠스와 기독교회의 감독 유세비우스를 불러서 협상을 했는데, 그 협상을 통해서 태양신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제3의 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종교가 천주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천주교회의 시작과 함께 엄청난 배도가 일어났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세기 천주교회가 시작되면서 진리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가는 중세기에 일어난 배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교회의 감독들은 이전에 희랍과 로마의 태양신을 믿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종교의식과 제도를 조금씩 고쳐서 기독교 교회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 새로 개종한 태양신교도들은 조상 때부터 전래되어온 의식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고, 예수님과 성자들도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신과 같은 방법으로 숭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이교도들이 좀 더 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자, 곳곳에 태양신전과 유사한 거대한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교회마다 여러 가지 그림들과 조각된 우상들로 단장함으로써, 외관상으로나 내면적으로 이교도들의 신전과 흡사한 것이 되었다.”(J. L. Von Mosheim, Ecclesiastical History, I, 369)
태양신 예배와 제도와 의식이 천주교회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은 유럽에 있는 천주교회들이 관광상품이 되었지만, 그것은 중세기 배도의 증거입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지고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우상들과 화려한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이 무너지고 천주십계가 세워졌습니다. 원죄설이 세워졌고, 예정론이 세워졌고, 침례 대신에 세례가 세워졌고, 로사리 묵주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의 성만찬예식이 화체설로 바뀌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해골을 교회 안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무염시태설이 세워지면서 마리아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중보자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한 진리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중보자는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리아가 아닙니다. 엄청난 배도가 생긴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중세기 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거짓과 오류가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개신교회가 나타나기 수백 년 전에 성경의 진리는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엄청난 배도가 생기자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천주교회의 배도에 저항하는 성도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황과 바티칸은 저항하는 성도들을 잔혹하게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중세기 천년 동안 8천만 명 이상이 순교당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무력과 고문으로 핍박하자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진리를 지키려는 성도들이 산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각처에서 말씀대로 신앙하기 원하는 성도들이 알프스 산속에 모여들면서, 광야 교회가 생겼습니다. 중세기 천주교회와 광야 교회

초대 교회는 첫 300년 동안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중세기 배도가 일어나면서 교회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천주교회와 광야 교회로 나눠졌습니다. 하나는 진리를 버린 배도한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보존한 교회입니다.
독자 여러분, 요한계시록은 중세기 배도와 핍박으로 광야 교회가 생기는 장면을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이 기록되고 300년이 지난 후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예언에서 여자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여자는 진리를 보존한 교회를 뜻합니다. 진리를 붙잡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중세기에 광야로 피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서 광야를 예비하셨습니다. 성도들이 1,260일 동안 피신했는데, 그것이 광야 교회입니다. 1,260일은 얼마나 긴 기간일까요?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민 14:34).
하루는 일 년을 뜻하므로 40일을 40년으로 환산했습니다. 그러므로 1,260일은 몇 년으로 환산해야 합니까? 1,260년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기간을 중세기 종교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인터넷에서 중세기에 기독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일이 생겼습니다. 중세기 배도에 대한 자세한 공부는 바이블칼리지(lastm.net/bible-college)에 오셔서 하시기 바랍니다. 중세기 배도를 모르면, 지금 개신교회에 어떤 미혹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운동

천주교회가 세워지고, 1,260년이라는 예언의 시간이 끝나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입니다.
1517년, 천주교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진리의 음성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중세기 천년 동안 유럽의 교회를 이끌어온 교황을 향해서 폭탄 같은 선언을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기록하였던 그 존재가 여기에 있다. 적그리스도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법을 변경하였으며, 하나님의 계명 위에 자신이 만든 계명을 높였다. 우리는 여기서 교황권이 진짜 적그리스도의 권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바이다.”(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vol. 2, P. 291, 256)
루터는 천년 동안 진리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을 핍박한 적그리스도가 교황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적그리스도가 중세기에 하나님의 십계명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연구를 통해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누구인지 밝혀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운동의 시작이 되었고, 개신교회가 생기게 된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바톤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러나 마틴 루터와 개혁자들이 죽고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서 개신교회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저마다 교단을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서 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밝은 빛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세는 크게 확장되었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5백 년이 지나면서, 만 개 이상의 개신교 교파가 생겼습니다. 만 개 이상의 교파와 교단이 세워지면서 초대 교회의 진리와 말씀이 수많은 교회들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초대 교회의 진리가 하나의 교회 안에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진리 교회를 찾을 수 있을까요?
독자 여러분, 지금은 교단, 교파에 매달릴 때가 아닙니다. 각 교파 안에 진리와 거짓이 섞여 있습니다. 각 교단에 빛이 있지만, 어둠이 섞여 있습니다.
교회 안에 빛과 어둠이 섞여 있기 때문에 교회가 부패하고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이런 고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가 세운 그 교회가 맞는가? 성경 말씀에 충성해야 할 교회, 성령이 충만해야 할 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영적으로 죽을 수 있을까? 이 교회가 정말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교회가 맞는가?”
독자 여러분, 어떻게 하면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교단을 찾으려고 하면 실패할 것입니다. 교단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단은 없습니다.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전했던 원래의 복음과 계명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춘 성도들은 진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각 교파에 흩어져 있는 진리의 퍼즐들을 하나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마지막사명에서 바이블칼리지를 세운 것입니다. 중세기에 무너진 진리를 회복하고, 초대 교회가 전한 복음과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바이블칼리지에서 독자들은 사도들이 전한 원래의 복음과 진리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결론 – 마지막 시대 어떤 교회를 찾아야 할까요?

우리는 동물처럼 살다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돈 잘 벌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까? 아니면 우주를 시작하신 하나님을 만나서 영원한 생명을 받으시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은하계에만 1~2천억 개의 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에 그런 은하계가 1~2천억 개가 있습니다. 그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진리의 길로 인도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고 죽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보호 하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어떤 교회를 인도하는지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보물과 같은 성경절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마지막 시대에 어떤 교회가 참교회인지 가장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가슴에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이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중세기에 진리가 천년 동안 무너졌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내가 반드시 여자의 남은 무리를 모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교회입니다. 용과 싸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그들이 여자의 남은 무리입니다.
왜 용은 여자의 남은 무리와 싸우려고 달려들까요? 중세기에 무너뜨린 진리를 회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원래의 진리를 회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분노해서 달려드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사탄이 미워하는 교회가 세상에서 인기가 있을까요? 대다수의 교회들로부터 지지를 받을까요? 아닙니다.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리가 만 개 교파로 흩어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전한 진리를 회복하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많은 교회들이 용의 정신으로 대적하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에 어떤 교회를 찾아야 할까요?” 지난 2천 년 역사를 잘 생각해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횃불이 중세기 광야 교회로 전달되었고, 그 횃불이 다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횃불이 마지막 시대에 누구에게 전달되었습니까? 용과 싸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여자의 남은 무리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중세기에 무너진 진리를 회복하고 사도 시대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독자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그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1 세기 사도들이 전한 원래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길을 진리로, 하늘로, 평강으로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3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신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신, 어떤 종교를 찾아가야 할까요? 성경의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신들은 높은 곳에 앉아서 경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독자 여러분, 어떤 신을 찾아야 합니까?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신은 우주 전체에 한 분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죄의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죄를 무책임하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세상 어떤 신이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주나요?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목숨까지 던지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재물과 희생과 봉사를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어떤 신은 절을 수백 번하지 않으면 복을 주지 않고 대학과 직장도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 신들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할 능력도 없으면서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을 섬겼습니다.
“인자(사람의 아들)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놀라운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이런 신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자기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고, 그리스도는 “나는 신랑이고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맏형과 친구”로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을 섬기고 싶지 않으십니까?
독자 여러분, 아버지처럼 보호해주시고, 신랑처럼 아껴주는 신을 원하십니까? 맏형과 친구 같은 신을 원하십니까? 그런 신을 원하는 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죄와 구원에 대한 기독교회의 답변

이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놀라운 구원의 길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빚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큰 은혜의 빚을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빚을 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충성으로 주님을 따릅니다.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따릅니다.
기독교회는 선한 행위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재물을 바쳐도 소용없습니다. 마음과 심령이 하나님의 피에 대한 감사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 가지 않으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 받으려고 헌금 드리고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 큰 빚을 졌기 때문에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이 악한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을 거듭났다고 말하고 새 마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다면, 신문에 나오는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무엇입니까? 목사들의 위선과 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독교회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가라지라고 부르고 거짓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가라지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독자 여러분, 우주 최고의 신, 하나님을 만나면 생애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보면, 겸손해지고 교만과 욕심을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보면,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은혜를 알면 죄와 욕심과 질투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마음에서 미움이 올라올 때 그것을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그런 것들을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죄로부터 구원받는 경험입니다.

기독교회의 구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기독교는 행위와 고행을 쌓아서 구원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놀라운 말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하고 희생해서 그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죗값이 치러졌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하나님께서 말로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화목제물이 돼서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이런 신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께 나와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랑과 희생이 있기 때문에 온 우주의 천사들과 피조물이 하나님께 굴복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희생과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누가 그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착한 일하고 선한 행위를 쌓아서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심을 보십니다.
용서받기 위해서 300번 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봉투에 돈을 넣어서 바칠 필요도 없습니다. 기왓장 사고, 등불 살 필요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피의 은혜로 거저 주어집니다.
그 엄청난 은혜 때문에 우리 심령 속에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변화 때문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최고의 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기독교 신앙은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받을 때 성경은 ‘거듭났다.’고 합니다. 새 마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구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2부. 구원에 대한 여러 종교의 답변

흥미 있는 설문조사가 있습니다. 세계 4대 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만약 여러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와 모하메드와 힌두교의 크리쉬나와 석가모니가 앉아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이 가장 많이 나왔을까요? “다음 달에 당첨될 복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고 답변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모하메드와 석가모니, 힌두교의 신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서로 모두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세계 4대 종교 중에서 어떤 종교와 어떤 신이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인격적인지 살펴볼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슬람의 답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습니까?”라는 질문에 이슬람의 모하메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알라신이 코란경에 주신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알라를 믿는 신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알라신이 주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선하게 살라.’고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하면 모든 종교의 답이 달라집니다.

질문: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유혹과 시험이 올 때 생기는 내 속에서 올라오는 욕심과 정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과 힌두교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놀라운 답을 줍니다. 이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죄는 행위에서 결정됩니다. 만약 당신의 행위에 죄가 생겼다면, 알라신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이슬람에게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질문: “알라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하기 위한 대가는 누가 지불합니까? 누가 속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합니까?”

“속죄를 위한 제물은 필요 없습니다. 누구도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 없습니다. 알라신의 결정으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독자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수많은 죄가 범해지고 있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용서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죽여도 알라가 용서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격적일까요? 이슬람 극단주의에서 테러가 일어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결혼을 하는데, 가족들이 와서 총을 난사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해외로 탈출하거나 죽지 않으면 개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매우 친절하고 상냥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부딪치면 매우 배타적입니다. 다른 종교와 함께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격적일까요? 동의하는 분들은 이슬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와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죄와 구원에 대한 힌두교의 답변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인생과 죄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까요? 한번은 어떤 힌두교도가 사제를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형과 관계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형에게 돌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미워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힌두교 사제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인생은 장엄한 드라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습니다. 당신이 맡은 역할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신이 정해진 카테고리대로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신이 주신 카스트제도, 신분제도에 따라서 당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이 형을 미워해서 돌을 던진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당신에게 맡겨진 역할입니다.”
이 이야기는 힌두교를 믿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종교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인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힌두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와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힌두교 사제의 말과 비슷한 가르침이 기독교 교파에도 있습니다. 어떤 교파일까요? 기독교회에서 가장 큰 교파,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운명적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전에 이미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예정해 놓았습니다. 각 사람은 정해진 카테고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영접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정해놓으신 예정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예정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대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가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런 교리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격적입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장로교회에 다닐 수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결과와 책임은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인생의 고통에 대한 힌두교의 답변

힌두교에서는 인생에서 맞이하는 고뇌와 고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과거에 자신이 쌓아놓은 업보를 받는 것입니다. 과거에 쌓아놓은 문제는 언젠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당신이 고민과 고통에 빠지는 것은, 과거에 빚진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나타날 때마다 당신은 빚을 갚아야 합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찾아서 덕을 쌓아야 합니다. 공로를 쌓으면 당신도 우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힌두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악하게 산 사람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착하게 산 사람이 암에 걸리는데, 악인들이 잘 살고 부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성과 논리로 잘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불교의 답변

인생의 고통에 대해서 불교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눈에 보이는 악은 환상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괴로워하고 고통당하는 것은 마음의 욕망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욕망을 제거해야 합니다. 악한 욕망을 버리면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통과 악은 환상일 뿐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마음에서 욕망을 제거한 사람이 있을까요? 더 이상 악한 욕망이 올라오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불교에서 해탈을 말하고 속세를 떠날 것을 말하지만, 더 이상 육신에서 충동이 올라오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까요? 독자 여러분, 인체 과학은 인간이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왜 도달할 수 없을까요? 인간의 두뇌에는 변연계가 있는데, 그곳에서 끊임없이 감정과 충돌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두뇌입니다. 불교는 불가능한 목표를 정해놓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불교의 답변

그렇다면, 불교에게 신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은 당신이 정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자신도 한 번도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 덕을 쌓으면 극락에 갑니다. 불교는 윤회를 믿습니다. 사람이 이생에서 선과 덕을 쌓고 죽으면 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악을 쌓으면 짐승과 미물로 태어납니다. 불교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서 짐승과 사람 사이를 넘나드는 윤회를 믿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불교신자는 벌레를 죽이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물과 짐승 중에 죽은 가족과 친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구원론에 분명한 증거가 있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인격적이라고 생각합니까?
불교의 가르침이 증거가 있고 이성과 논리로 납득이 되며, 인격적인 구원론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불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결과와 책임은 온전히 본인이 져야 합니다.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의 문제

성경을 제외한 모든 종교는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종교에서 착하게 살라고 교훈합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은 죄는 마음이 아니라 행위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이기심과 증오심이 있어도 이슬람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가 있으면 마음의 죄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행위의 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제 이성과 양심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도덕적인 율법과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이슬람에서 왜 테러주의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날까요? 알라신의 뜻대로 순교하면 천국에서 많은 여인들과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왜 이슬람에서 나올까요? 행위가 알라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마음과 성품보다 행위를 중요시 여깁니다.
독자 여러분, 죄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죄는 마음이 아니라 행위라고 규정하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진정한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 천주교회 사제들 속에서 동성애와 소아성애가 이루어질까요? 이 문제는 중세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결혼과 성을 교리로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비정상적인 성욕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죄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행위를 교리나 율법으로 막으면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기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힌두교의 구원론은 무엇입니까? 힌두교도 선한 행위를 쌓아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선한 행위로 복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힌두교는 카스트제도로 정해진 운명대로 살라고 하면서 과거에 진 빚을 현재의 고통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를 범했어도 선한 행위와 덕을 쌓으면 형벌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회개는 강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심령의 변화 없이 선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힌두교도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책임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입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불교도 선한 행위를 쌓아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 종교는 선한 행위로 복과 구원을 약속합니다.
욕심 없이 고결하게 사는 스님의 삶을 보면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란 신을 섬기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선택할 때 꼭 기억해야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불교의 석가모니는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한 번도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와 후예들이 그를 신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이 아닌 존재에게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겠습니까? 저라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주 최고의 신, 창조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들처럼 불교에도 창조가 없습니다. 불교의 윤회설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말해주는 사상이 아닙니다. 윤회설은 이미 존재하는 생물들이 끝없이 순환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라는 이름의 의미는 ‘깨달은 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는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현인이지 이 세상의 기초를 놓은 신이 아닙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불교는 “왜 우리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고통을 피할 수 없는가? 지혜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인생의 고통에 대한 통찰과 고통의 이유를 깨닫기 위해서 삶을 바친 석가모니의 인내와 노력을 우리는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신이 아닙니다. 불교는 마음을 비우는 해탈을 목표로 수행합니다. 미래 언젠가 이루어질 해탈의 경지를 행해서 나갑니다. 그러나 현재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죄와 욕망에 대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불교신자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욕심과 죄에 끌려다니다가 답답하면 절에 가서 기왓장을 사고, 백배 절을 하고, 공양을 바쳐서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죽어서 극락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왜 기독교회에도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사람이 있을까요? 여기까지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에 죄가 해결되고 선한 생애를 살아갑니까? 기독교인 중에도 세속적이고 부패한 사람들이 많던데요!”
그렇습니다. 기독교인 중에도 사기꾼이 있고 부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신앙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진리를 모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는 경험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죄와 양심의 가책에 대한 해결책이 없으면, 종교가 위선자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부패와 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사제와 승녀와 주교의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회의를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하는 성직자를 보면, 고결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결혼을 금하고 엄격한 금욕을 요구하는 종교일수록 불륜과 동성연애, 소아성애가 침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의 죄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종교인들의 죄는 예배와 선한 행위로 덮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 선한 행위를 요구하고, 행위로 구원하는 종교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악한 욕망과 밖에서부터 오는 악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독재자와 비양심적인 정치인들을 모두 제거한다고 할지라도, 더러운 영상을 모두 없앤다고 할지라도, 극장과 텔레비전을 없앤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산다고 할지라도, 죄와 악한 욕망은 마음속에서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신, 어떤 종교를 찾아가야 할까요?

증거와 이성과 논리와 인격으로 신을 찾으라!

독자 여러분, 증거와 이성과 논리로 신을 찾으십시오. 최고의 신을 만나려면 공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종교, 내 교단을 주장하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신을 찾으십시오. 종교와 교회를 선택하기 전에 심령에서 떠오르는 여러 질문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질문에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고,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고,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는 종교와 교회를 선택하십시오.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설명할 수 있는 종교를 선택하십시오.
세상 역사와 지구 종말을 예언으로 분명하게 보여주는 교파를 찾으십시오. 선하게 사는 자들이 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신이 있다면 왜 죽음과 슬픔과 고통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지 설명하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왜 선한 사람보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죄가 이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고, 선과 악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설명해주는 종교를 찾으십시오.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신들과 종교는 이기적이고 독단적입니다. 복 받으려면, 헌금 드리고 공로와 희생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기복신앙을 가르치는 종교는 가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한 신을 찾으십시오. 선한 신을 찾으면, 여러분은 참된 영혼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확신과 감사로 살게 될 것입니다. 다음 3부에서 그 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부. 어떤 신을 선택해야 할까요?

어떤 분이 병원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큰 부자였는데, 믿는 종교가 없었습니다. 은퇴하기 전에 큰 회사의 회장이었고, 장학재단을 운영했고 여러 종교단체에 기부를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바쁘게 사업을 하느라 신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없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구원해줄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종교단체에서 그분을 찾아왔습니다. 불교에서 찾아왔고, 이슬람과 기독교회에서도 왔습니다.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까? 석가모니와 모하메드와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한 신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구원할 신으로 누구를 선택했을까요? 죽는 순간까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우주 최고의 신을 찾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인생 최고의 비극입니다. 내가 의지하고 확신하는 신이 없이 무덤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 기독교, 뉴에이지 등,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 중에 어떻게 참신과 참종교를 찾을 수 있을까요?

기적이 일어나는 종교가 진짜인가?

어떤 분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참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힌두교에도 기적이 있고, 이슬람에도 기적이 있고, 불교에도 기적이 있습니다.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서 수많은 순례자가 생겼습니다.
기독교회에서는 이상한 힘에 이끌려서 날마다 몇 시간씩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방언하는 동안 깊은 황홀함으로 들어가고, 환상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에서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아리 점집에도 아기 귀신과 조상신이 나타나서 고객의 운명을 알려줍니다. 신내림을 받는 무당들에게도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종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전파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마트폰에서 음성과 영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민주당 의원이며, 미래문제연구위원회의 의장인 찰리 로즈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낸시 레이건 여사(레이건 대통령 부인)에게는 영매 친구들이 많이 있다. … 워싱턴 정가는 영매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미국 하원의원의 약 25%는 영매와 강신술(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찰리 로즈 의원이 운영하는 미래문제연구위원회를 통하여 영매들이 국회에 진입하여 의원들과 접촉하고 있다.’ … 소식통에 따르면, 많은 국회의원들이 정기적으로 점성술사나 영매들을 만나서 상담하고 있다고 한다.”(1988년 12월 5일자, U.S. News & World Report)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미국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¼이 죽은 자의 영들과 교통하면서 자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과학을 모르는 바보이고 미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영계를 찾아가고 신들의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을 초월한 세계, 신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참종교와 최고의 신을 찾는 2가지 원칙

종교와 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바닥에 있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모든 인간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첫째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을 믿기로 선택할 수 있고, 신을 부인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지 원하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이고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진리는 숫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원칙이 있는데, 진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의 숫자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의 숫자가 많다고 그 종교가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숫자로 결정한다면, 인도에 가면 힌두교가 진리입니다. 일본에 가면 조상신이 진리입니다. 숫자로 결정하면, 그렇게 됩니다.
기독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으면 장로교 교리가 진리가 됩니까? 아닙니다. 미국 남부에 가면 장로교보다 남침례교가 훨씬 많습니다. 개신교보다 천주교회가 압도적입니다. 지역마다 압도적인 숫자를 가진 종교가 있습니다.
숫자가 압도적이라고 해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어떤 종교가 참종교인지 살필 때, 사람의 숫자를 보면 안 됩니다.

최고의 신을 찾는 4가지 조건

신들의 신, 최고의 신을 찾으려면 4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안개처럼 애매하면 안 됩니다.
둘째, 이성적 판단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과 이해할 수 없는 종교에는 지적 동의와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셋째,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맹목적이거나 미신적이면 안 됩니다.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선택을 존중하는 신과 종교를 찾아야 합니다.
이 4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신, 증거가 있어야 하고, 이성으로 납득해야 하며, 논리적 설명이 가능하며,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신을 찾으면 최고의 신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종교는 신에게 100번 절하면 복을 준다고 말합니다. 300 번 절하면 대학과 직장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종교에선 허리가 약한 사람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종교에 증거가 있나요? 이성과 논리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합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회 안에도, 그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천국에 가고, 이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으로 예정해준다.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등질 수도 없다. 인간은 구원과 멸망을 선택할 수 없다. 구원과 멸망은 하나님의 권위로 정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가르침은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6가지 질문에 답하는 종교를 찾아라!

우주 최고의 신을 믿는 종교가 있다면, 6가지 질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이 세상과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둘째, 선과 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셋째,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넷째, 착하게 사는 사람들도 왜 사고가 나고 암이 생기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우주 최고의 신이 있다면, 세상 역사가 왜 이렇게 흘러왔고, 지구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여섯째, 사람이 죽으면 1분 후에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6가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신과 종교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제 참신과 참종교를 찾아가는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 보겠습니다.

참신과 참종교를 찾는 4가지 계단

참신과 참 종교를 찾기 위해서는 4가지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 계단은 ‘질문’입니다. 질문이 없으면 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기적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우주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신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것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분들은 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도 죽음 앞에 서면, “혹시, 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신과 종교에 대하여 질문을 가진 사람은 두 번째 계단으로 가야 합니다.
두 번째 계단은 진지함입니다. 진지하지 않으면 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진리가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진지한 마음이 있어야 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애 속에 외로움이 찾아왔습니다. 제 인생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때 어떤 분이 저에게 신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진지한 마음으로 신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생각했고, 하늘과 땅과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진지함이 저를 세 번째 단계로 인도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겸손함입니다. 겸손함은 정말 중요합니다. 겸손함이 없으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신을 찾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육이 부족해도 겸손하면 반드시 신을 찾게 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왜 신을 발견할 수 없을까요? 왜냐하면 신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함과 능력이 있습니다. 신은 우주를 지배하는 장엄한 존재입니다. 개미가 사람을 인식할 수 없고 거미가 산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신을 볼 수 없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인데,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추지 없으면 결코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정직입니다. 신을 찾는 데 정직은 정말 중요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종교인일수록 신을 찾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종교를 감싸고 보호하려고 합니다. 내 교단, 내 교파, 내 종교는 무조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교단, 내 종파를 지키기 위해서 쉽게 진리를 부인합니다. 그것은 정직이 아닙니다.
수많은 목사, 주교, 주지승, 신부, 당회장, 승녀, 수도사, 랍비, 이런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종교지도자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도 덮어버립니다. 어떤 목사는 자기만 진리를 알고 교인들에게는 감춥니다. 어떤 성직자는 진리가 나타나서 교인과 신도들을 빼앗아갈까 봐 두려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가 정확하게 드러나면 교단과 기득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진리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릅니다. 누군가 진리를 말하려고 하면 그 사람을 매장시키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 교파와 내 종파에 진리가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교회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면서도 모른 척합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교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질문 없이, 생각 없이 성직자를 따라다니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신은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정직이 무엇입니까? 정직이란, 내가 속한 교단, 내가 믿는 종교에 진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정직입니다. 그런 정직이 있어야만 우주 최고의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직이란, 나와 다른 사상일지라도 그것이 증거와 이성과 논리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정직입니다.
“그것은 정말 좋은 포인트군요. 저도 그 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입니다. 그 사람의 가르침이 내 믿음을 무너뜨리고 내 교회의 교리와 다를지라도, 그것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증거가 분명하면 인정하고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입니다. 논리와 이성과 증거를 외면하는 것은 정직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참종교를 찾을 수 없습니다. 겸손과 정직이 없으면 우주 최고의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4가지 계단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우주 최고의 신이 그 사람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보통 2가지 주장을 내놓습니다.

1)첫 번째 주장은, “누구도 신을 보지 못했다.”는 주장입니다. 몇 년 전에 어떤 우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달을 가보았고, 화성을 돌아보고 왔는데,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달에 가보았고 화성에 가보았는데, 태양에도 가보았습니까?” “신은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하려면, 수백억 개의 별과 행성을 다 뒤져서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다 찾아본 다음에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 주장보다는 오히려, “우주 저편에 수백억 개의 은하계가 있고, 각 은하계마다 수조 개의 별이 있는데, 그 어딘가 신이 있지 않을까요? 그 엄청난 우주를 만든 창조주를 인정해야만 우주의 신비가 풀리지 않을까요?”라는 말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려면 우주 전체를 찾아보아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2)신을 부인하는 두 번째 주장은, 우주와 생명체는 우연히 생겼다는 주장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진화론과 빅뱅 이론을 이용해서, 우주의 생성과 기원을 ‘우연’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우주에 생명체가 나타날 확률을 계산해냈다고 자랑하면서, 소수점 이하로 0을 수십 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릅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마트폰은 기가 막히게 정밀한 기계입니다. 이 스마트폰이 우연히 만들어졌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스마트폰이 만들어지려면, 먼저 복잡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하고, 수만 개의 부품들이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정확한 타이밍과 순서에 맞추어서 조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이 수십억 년이 지나면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말하면, 그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입니까? 증거가 충분합니까?
우주와 생물체는 로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묘막측하고 정교하고 복잡합니다.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하나의 생명체에서 모든 식물과 동물과 사람이 나왔다는 이론입니다. 아메바 같은 단세포로부터 지구의 모든 식물과 동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비와 개미와 악어와 사람이 모두 한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유명했던 무신론자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안토니 플루입니다. 안토니 플루는 무신론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논쟁 포럼인 ‘소크라테스 클럽’의 주요 멤버였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안토니 플루는 악명 높은 무신론 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온 세상이 깜작 놀랐습니다. 하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앞장 서서 싸웠던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정했을까요?
안토니 플루는 2004년에 <신(神)은 존재한다(There is a God)> 책에서 자신이 신조를 바꾼 이유를 고백했습니다. “내가 전향한 것은 순전히 DNA유전자 연구 덕분이다. DNA가 생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게 배치되어야 하고, 엄청나게 다양한 부품들이 협력하여 일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지성적 존재가 필요하다. DNA가 생명을 가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수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야 하고, 둘째는, 그 많은 요소들이 정확하게 협력해서 일하는 정밀함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우연히 딱 들어맞는 시점에 모두 나타나서 우연히 작동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내게는 DNA유전자의 활동과 생명이 지적존재(知的存在)의 작품으로 보인다.” (안토니 플루, 신은 존재한다, 75)
무슨 뜻입니까? 지적존재, 최고의 수학과 물리와 생물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하나님이 없다면 DNA의 생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안토니 플루는 “원숭이가 타자를 치다 보면, 언젠가는 세익스피어의 14행 시를 쓰게 될 것이라는 식의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세익스피어의 14행 시 하나가 우연히 만들어질 확률은 10의 160승 분의 1입니다. 하나의 시가 우연히 만들어질 확률도 그 정도인데, 우주의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계산해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안토니 플루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물학과 천문학과 우주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진화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안토니 플루가 하나님을 인정하기로 전향한 이유입니다. 우주와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야 할 최고의 신은 반드시 창조의 신이어야 합니다.

창조주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종교

이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남겨놓았습니다. “우주는 진화나 빅뱅이 아니라 창조되었다면, 이 세상 모든 종교 중에서 창조주를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종교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 모든 종교들 중에서 이 질문에 가장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하나입니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고 만들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의 공격이 기독교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무신론 학자들은 다른 종교는 별로 공격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를 창조했다고 분명하게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무신론과 공산주의가 설 자리를 완전히 없애버립니다. 창조를 부인하는 무신론주의와 공산주의는 창조를 설명하는 성경과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현대 무신론의 대표격인 리처드 도킨스와 하나님을 믿는 존 레녹스 박사 사이에 공개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고, 존 레녹스는 “신은 실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존 레녹스 박사는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앙은 맹목적이고 과학은 증거에 기반을 두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인은 맹목적으로 신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창조 이외에 우주의 기원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논리와 이성이 있다면, 창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과 에너지에 의해서 우주가 시작되었다면, 그 처음 물질과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 중에 맹목적인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을 깊이 살피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은 맹목적이고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미혹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상 어떤 책보다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책입니다.
계속해서 존 레녹스 박사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성경은 맹목적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과학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과학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일까요? 과학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가 움직이는 규칙과 법칙을 발견할 뿐입니다. 기독교는 우주의 기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밝혀주며, 과학은 우주가 운영되고 움직이는 법칙을 설명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수학이고 물리입니다. 기독교는 창조를 말하고, 과학은 창조된 물질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과학은 분리될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후 ‘지구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으니 이제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뉴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주의 심오한 법칙과 수학적 증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한 논증입니까?
만일 지구와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모든 신들은 일시에 무너지게 됩니다. 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지 않은 신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신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후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신들이 나타났고 종교들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그런 신과 그런 종교를 믿어야 할까요?
우주를 만드신 신, 지구를 만드신 신, 역사를 시작하신 신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신은 성경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에 있어서 성경은 어떤 종교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성경의 첫 장을 열면 바로 천지창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고 선포합니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제도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일주일을 7일로 규정한 것은 누구입니까? 1주일은 왜 5일이나 10일이 아닌 7일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벨론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7일제도는 성경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모든 생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주일제도를 만드셨을까요? 일곱째 날이 돌아올 때마다 인간이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원하신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때 나폴레옹은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성경을 불태우고 일주일제도를 10일로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은 10일에 하루 쉬도록 법을 변경했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아프고 피곤에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할 수 없이 프랑스혁명군은 일주일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7일로 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은 신을 부인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체와 건강을 위해서 7일제도를 주셨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성경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성경은 선과 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성경은 왜 착하게 사는 사람들도 사고가 생기고 암이 생기는지 설명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1분 후에 어떻게 되는지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성경은 지구 역사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성경책의 1/3은 예언인데, 성경 예언은 지구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2,600년 전에 이미 성경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 것이고, 어떤 나라와 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며, 이 세상이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 예언했습니다.
1세기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은 중세기 이후에 나타날 신대륙 미국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미국의 종말에 대한 놀라운 예언이 성경에 있습니다. 지금 그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천년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언제,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 예언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신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예언으로 증거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천년 전부터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 태어날 것이고, 그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에 있는 남자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침례를 받을 것이고,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3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이 수백 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3백 개 이상의 예언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었는데, 그 모든 예언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의 탁월함은 예언에 있습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보다 3배가 많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우주와 죄와 역사와 죽음 등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어떤 무신론자의 질문

한번은 어떤 무신론자가 저에게 날카로운 도전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너무나 많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귀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정말 심각한 도전입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선하게 살게 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깊은 의미와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믿는 것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선생님, 신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 말을 듣고 그분의 얼굴은 심각해졌습니다.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는 확률적으로 50대 50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을 거절하는 순간 매우 위험한 도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도 지옥불을 앞에 놓고 도박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32호를 시작하며…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 느끼는 것, 만지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과학으로 보면, 인간은 탄소공유물이고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늙어서 죽으면 흙이 돼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나 허무하고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없습니다.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악착같이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아등바등하면서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인생 너머 저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마음에서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지구를 시작하시고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누구나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잠시 시간을 내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우주를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밤하늘의 별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들에 핀 한 송이 꽃에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호를 통해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고 보살피고 평안과 확신을 주는 참된 종교, 참하나님을 만나고 확인하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