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Talk, 주의 종들이 길을 잃어버리는 이유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 25:16~18)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았지만 주인에게 이익을 돌려 드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주인이 준 달란트로 자신을 위해서 장사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준 이유는 주인을 위해서 이익을 내라는 것인데, 악한 종은 자신을 위해서 달란트를 사용했습니다.

 

주의 종들이 듣는 두 음성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매해 신학교를 졸업한 주의 종들이 복음 사업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그들은 두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말씀과 의의 표준을 낮추더라도 교인들을 붙잡아야 하고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두 음성 사이에서 어떤 음성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주의 종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에 주의 종들은 “진리를 지킬 것인가? 사람을 붙잡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두려운 사실은, 수많은 종이 “잠시 진리를 덮어 두고, 잠시 의의 표준을 낮추고 교인을 붙잡고 교회를 안정시키라”는 음성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이 그런 결정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주인이 준 달란트를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이 왔을 때 이익을 남겨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교인 숫자에 초점을 맞춘 종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룩함에 대해서 정확한 말씀을 전하지 않게 됩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설교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신자들이 붙잡혀 있는 죄와 이기심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됩니다. 문제없고 평화스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성령의 음성은 사라지게 되고 말씀의 기근이 생기게 됩니다. 미련한 처녀들로 교회가 채워지게 됩니다. 결국 이런 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으로 가야할 영혼을 자신에게로 이끌게 됩니다. 교회는 성장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지라도, 주인에게 돌려줄 이익(영혼)은 없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16).

물론, 교회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통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버리고 참된 중생의 경험을 함으로 숫자가 늘어나야 합니다.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우고 하나님께 생애를 바치도록 인도하는 것이 최고의 교회 성장법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길을 잃어버리면, 양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볼 기회도 잃어버린 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목자가 교회의 안정과 양들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면, 교회 안에 세속이 넘실거리고, 장로님과 집사님이 세상에서 얻은 돈과 명예로 교회를 지배하려고 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에서 술 냄새가 스며 나와도, 하나님의 사랑만 말하게 됩니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라는 설교는 죄를 붙잡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신학적 핑계거리를 마련해 주고 죄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해줍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가득차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되어 있는 영혼을 만나기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갑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고, 인자의 때는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돌려받을 이익(영혼)이 너무나 적다는 뜻이 아닐까요?

 

양 떼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양 떼들을 하나님께로만 이끌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준 달란트를 사용해서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도 함께 나누어 가지고자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목회자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설교가 나옵니다. 어리석은 양 떼들은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 양 떼들로 채워진 교회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목회자가 길을 잃어버리면, 성경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살피는 양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한 양들로 교회가 채워지게 됩니다. 말씀을 분별할 줄 모르는 양이 교회에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인간 목사를 의지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회가 말씀 중심이 아니라 예배 중심, 은사 중심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목자는 다루기 쉽고 성장하기 쉬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함을 덮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목자와 양 떼 사이에 이상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양들은 자신의 죄를 덮어 주는 설교를 기대하고, 목자는 양들이 원하는 것을 나눠 주는 공생 관계가 교회를 악마의 입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커지고 신자들은 넘쳐 나지만, 주께서 원하시는 이익(말씀에 굴복한 영혼)은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 25:24~25).

무지한 양 떼들은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보다 “우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라는 말을 훨씬 많이 하도록 길들여지게 됩니다.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눈앞에 대고 읽어 주어도, “그래도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는데요” 라고 말하는 고집스런 양들로 변하게 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야 할 양 떼들이 목사와 교파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회가 말씀을 떠나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목자가 좀 더 큰 교회를 가져야겠다는 욕망을 품는 순간, 양 떼들에게 침례와 직분을 주는 표준은 급격히 떨어지게 됩니다. 더 많은 양 떼를 가져야겠다는 욕망이 복음 전파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삼켜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큰 길과 골목을 점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점점 더 듣기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늘어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교회가 거룩한 목적과 사명을 저버리자, 교회는 세속과 유행의 물결에 대하여 문을 열게 되었고, 교회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뚜렸한 경계선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문과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목자와 양 떼들의 부패상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사탄은 양 떼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교회를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거짓 양 떼들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숫자에 의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말씀 위에 정확히 서서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준비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바벨론 전체에 복음을 전했던 것은 유대 교회가 아니라 다니엘과 세 친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종들에게 드리는 호소

성직자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원하는 것은 백성들을 말씀 위에 정확히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역사할 수 있도록 정확한 복음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양 떼들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주인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이익을 내라고 요구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들에게 온 마음과 생애를 주님과 진리에 바쳐야만 참된 행복과 평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주의 백성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들이 어디를 찾아가야 합니까? 멸망해 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교회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올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드러운 설교를 할 때가 아닙니다. 세속이 하나님의 교회 안을 넘실거리고 있는 이때,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분명한 말씀으로 주의 백성을 잠에서 깨울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평판와 인기와 재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파수꾼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 58:1). 파수꾼이 나팔을 크고 분명하게 불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시 파수꾼 자신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세상은 교회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속된 것이 거룩한 것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이 “착하고 충성스런 종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늘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종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패역한 이스라엘 교회와 백성들에게 인기 없는 기별을 전했던 용기와 믿음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마지막 시대의 예레미야로 부르심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대신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눈을 두려워하고, 동료 목회자의 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면 두려움을 물리치게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회개하지 않는 양 떼들, 자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양 떼들은 언제나 부드럽고 죄를 인정해 주는 설교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목자는 그들의 요구에 맞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게 깎아내리거나 다듬지 않습니다. 하늘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는 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혼들에게 영생으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는 종들을 찾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누가 하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유행과 세속, 사치, 쾌락, 죄에 대한 무감각, 세상적인 사고방식 등등. 이런 문제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겉으로 나타내고 있는 증세입니다. 마땅히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왜 이러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질병의 증세만을 쫓아다니면, 병의 진정한 원인을 놓치게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된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요? 원인은 거짓 복음과 가짜 성령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말하면서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도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순수한 생명수인데, 생명수에 다른 것을 섞으면 취하게 만드는 거짓 복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섞인 교리, 섞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 모습이 음행(영적 간음)하는 교회,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교회로 나오는 것입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 17:2).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계 18:3).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면 어떤 상태가 될까요? 어려운 질문 같지만 대답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술 취한 사람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까? 술에 취하면 상황 판단을 못하게 됩니다. 자꾸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마지막 시대의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이것이 취한 모습입니다.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헐벗고 가난한데 자기는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미혹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자신은 본다고 말합니다. 흰옷, 의의 옷을 입지 못해서 벌거벗고 있는데 자신은 입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잃어버린 상태인데 “나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 상태입니다.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증세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세 친구의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오늘날 기독교회에 존재하는 모든 신앙이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여러분이 믿는 교리와 복음을 어떻게 하면 검증할 수 있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히브리 세 청년처럼 풀무 불에도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기 위해서라면 다니엘처럼 사자굴에도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성경 말씀 위에 올바로 서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5천만 명 이상의 성도가 진리를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피와 죽음 앞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율법주의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말세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것을 재림의 징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1~12).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말세에 교회 안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불법을 조장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 재림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볍게 여기는 설교자들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의를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 기독교회에 그런 포도주를 나눠 주는 종들이 있기 때문에 “불법이 성행하”게 되었고 신자들의 삶은 부도덕으로 채웠으며 진짜 사랑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피해야 합니다. 그런 설교에 젖어 들면 여러분은 취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만 하면 된다.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다.”는 말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 설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폐지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폐지될 수 없는 것처럼 십계명도 폐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

 

3편,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1~34)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번째 비유에서도 두 무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실 때, 누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이들이 양이고 마지막 시대의 의인들입니다. 가난한 자와 목마른 자와 나그네 된 자들을 보살피는 사람들,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도와준 사람들, 그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 양 무리에 속해서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마지막 시대가 소돔성과 같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소돔성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성연애가 난무했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소돔성을 지배하고 있던 또 하나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겔 16:49).  

소돔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먹을 것과 물질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나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소돔의 죄였습니다. 소돔성의 시민들은 염소였습니다. 염소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돈을 지배하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탐욕이 들어오고 구두쇠 정신이 들어오게 됩니다. 궁핍하고 어려운 자를 보아도 외면하게 만듭니다. 돈은 무서운 힘입니다. 돈을 지배하지 못하면 돈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싶어도 돈이 “주지 말라”고 명하면 그 말에 복종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돈이 사람들의 마음에 신이 되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나란히 놓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데, 한 주인은 하나님이고 다른 주인은 돈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염소는 하나님은 섬기지 않고 돈만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 염소입니다.

많은 사람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선을 많이 베풀면 나도 양이 되어서 천국 가겠구나.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선을 베풀고 어려운 자를 구제하는 것도 열심히 해야 천국 가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도 쌓아야 받을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양이 선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은 양들에게 이런 칭찬을 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주님의 칭찬에 의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 25:37~39).

의인들이 이상한 대답을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선행을 했습니까? 내가 언제 주님을 대접했고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 의인들은 그렇게 반응할까요? 의인은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성령의 은혜로 그 마음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선한 행위는 성령의 충동대로 움직여서 맺은 열매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인은 선이 좋아서 선을 행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억지로 선을 짜냈던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마음속으로부터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가 나와서 선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남을 먹이고 도와주고 방문하고 베푸는 것이 양에게는 자연스런 생활이었습니다. 마음에 기름이 채워진 사람은 양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가 선을 베풀었다”고 하시는데, “제가 그렇게 했었나요?”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는 의인에게 있어서 특별하게 기억이 날 만큼 독특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양과 염소의 비유 역시 성령의 역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양과 염소는 선한 행위가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졌는가를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염소가 선한 행위를 기억하는 이유

이제 예수께서 염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 25:42~43). 예수께서는 염소들에게 “너희는 선을 베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악인들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 25:44). 이것이 어떤 상황입니까? 주께서는 선을 베풀지 않았다고 하는데 염소들은, 악인들은 “내가 선을 베풀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어려운 자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는데, 주님 그것을 모르십니까? 내가 교회에 얼마나 많이 헌금했고 교인들을 도와주었는데요.”라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양은 기억하지 못하는 선을 염소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악인들은 자기 속에 없는 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구를 도와주라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책을 갖고 있으니까 선을 베푼 것입니다. 자비가 특별한 행위였기 때문에 모두 기억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 살다가 상황에 밀려서 선을 베풀었으니까 자신이 행했던 선이 하나하나 기억나는 것입니다. 또한 기회만 되면 자신이 행한 선을 자랑하고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더 잘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너는 선을 베풀지 않았다”라고 책망할 때, “내가 많이 했습니다”라고 항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양과 염소의 차이는 선을 행한 양의 차이가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를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의 차이입니다. 마음이 온갖 세속과 욕심으로 채워진 사람도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마음에 기름이 전혀 없는 사람도 선을 베풉니다. 정치인도 선거 때가 되면 양로원을 찾아가고, 연예인도 인기가 필요하면 고아원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베푼 선은 성령의 인도와 감동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모두 성령에 의한 변화 이야기입니다. 지금 성도들이 양과 염소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양으로 살아간 자들은 예수께서 오실 때 양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염소로 산 자들은 그때 염소로 구별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파헤치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면 결국에는 기름 문제입니다. 기름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십니까? 그런 분들은 주 앞에 나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하거나 거절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아는데 신앙이 메마르고 형식적입니까? 그릇에 기름이 떨어진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에 사는 사람들은 생명을 얻게 되고 그런 사람은 진리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으며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이번 호에 실린 기사를 읽는 독자들 중에 “아 나는 미련한 처녀구나”라고 자책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처럼 쓸모없이 보이는 돌 속에서도 아름다운 금을 만들어 내십니다. 여러 가지 환경과 상황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찌꺼기를 태우고 없애 주실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 주시고 빛을 주실 때 따라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재림의 징조들이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토록 그리워하던 신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 땅에서 당한 모든 고생과 억울함과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살아온 자들의 이름이 하늘로부터 불려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세우시고 온 우주 앞에서 “이들이 의인이다. 이 사람들은 성령으로 변화함을 받아 열매를 맺은 자들이니 내가 준비한 이 우주를 영원한 기업으로 주겠노라”라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아, 그 음성이 우리의 귀에 얼마나 아름답게 들릴까요?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하늘 진주성문으로 들어갈 때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우리는 지금 마지막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청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하늘의 잔치에 참석해야합니다. 성도 여러분,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기름은 성령이고 등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등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양심 속에서 말씀하실 때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멍에를 풀어 주면 주께서 우리를 아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앉아서 듣지만 말고, 말씀을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한 걸음씩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1부, 영혼을 태우는 종, 영혼을 태우지 못하는 종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장사를 해서 이익을 전혀 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그가 갖고 있는 복음과 경험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갖고 있는 것으로는 영혼을 천국문으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선교란 무엇일까요? 길에서 전도지를 나눠 주는 것일까요?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와 바울이 생각하는 전도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전도는 영혼을 제단에 바쳐서 태우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바울은 전도자는 복음의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양을 제단 위에 놓고 태우는 일을 합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성소의 제단에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영혼을 성소(교회)까지 인도하면 전도가 끝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영혼을 제단 위에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지점까지 인도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단순히 교회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동안 전도의 삶을 살았던 사도입니다.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초대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 안에 들어온 신자들이 세속에 시험받고 넓은 길을 따라가다가 흔들려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거짓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떠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돈을 사랑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라고 했고(고전 15:58),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골 1:23).

바울은 영혼을 제물로 바쳐서 태워야만 그 영혼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영혼을 제단의 제물로 바쳐서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 예수님을 영접한 새 신자가 자신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칠 때까지 말씀을 가르치고 책망하며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전도란, 불신자를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새 신자들에게 몇가지 교리나 몇가지 예언 해석만 나눠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영혼을 인도하고 전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잃어버린 양들을 맡기실 것입니다. 바울에게 영혼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영혼을 주실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과 생애가 하나님의 제단 위에서 태워져서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될 때까지 전도가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워진 영혼들을 받으십니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하나님께 달란트를 받았지만,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의의 표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은 심판 날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복음을 “내 수준”에 맞추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목회자 자신이 복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면, 복음을 “내 수준”에 맞춘 얄팍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복음을 “내 수준”으로 낮추어야만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내 수준”에 맞춘 설교와 복음을 좋아합니다. 구원은 거저 주는 선물이니까 받지만,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기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영혼을 태우지 않는 설교와 복음은 영혼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그런 종은 영혼을 주인에게 인도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인도하게 됩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주면서 이익을 내 달라고 요구했지만, 주인에게는 어떤 이익(영혼)도 돌려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전도는 말씀과 “내 경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경험”이 흔들려 있으면 정확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됩니다. 정말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자신이 먼저 제단 위에 올라가서 온 마음과 생애를 태우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내가 제단 위에서 태워진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말씀의 제단에 올려놓고 태울 수 있겠습니까? 결국 주님께 많은 달란트를 받았을지라도, 복음에 대한 나의 이해와 경험이 올바로 세워져 있지 않으면,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주의 종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지는데, 한 무리는 영혼을 태우는 종들이고, 다른 무리는 영혼을 태우지 못하는 종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종의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 ■

 

2편, 주의 종들이 두 무리로 나눠지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4~15)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두 번째 비유는 주의 종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재림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사탄의 미혹이 온 교회를 흔들 때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들도 두 무리로 나뉘어집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각 사람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기십니다. 주인은 달란트를 주면서 열심히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익을 많이 낼 수도 있고 적게 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익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들은 이익을 남기는 자와 이익을 남기지 않은 자로 나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눠 주면서 장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의 종들은 달란트를 활용하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준 달란트로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베들레헴의 냄새나는 마구간에 오셨습니까? 왜 하늘의 왕께서 더럽고 추한 지구에 오셨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하늘을 버리고 지구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주의 종들에게 복음을 맡기면서 각자의 재능과 달란트대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9). 영혼을 구하라는 주인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이익을 내는 종들과 이익을 내지 못하는 종들로 나눠지게 됩니다.

 

이익을 내는 종, 이익을 내지 못하는 종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 25:16~18)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를 잘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또 두 달란트를 받는 종도 장사를 잘해서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겨서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주인은 이익을 남긴 종들을 크게 칭찬하면서 그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한 달란트를 준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은 전혀 이익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부르면서 크게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왜 이익을 남기지 못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이익을 남기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 25:24~25)

이 종은 받은 달란트를 땅속에 파뭍고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자신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지 않은 이유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악한 종은 “주인은 마음이 굳은 사람(hard man)이라”고 생각했고, 씨를 심지 않았는데 추수를 기대하고, 뿌리지 않았는데 거둘 것을 기대하는 이상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섭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예 장사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복음과 경험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준 달란트로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긴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를 통해서 양자의 영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의 마음과 생애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따라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전도자의 사명을 완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문제에 붙잡혀서 영혼을 구할 수 없게 됩니다. 주인이 무서워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은 종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종의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주인을 무서워하는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주는 벌이 두려워서 일하는 사람이 종의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인 집에서 살지만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종의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종의 영을 가진 사람은 주인이 주는 삯을 노리고 일합니다. 그래서 평생 주인 밑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주인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지만, 신실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종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늘 아버지와 참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현대 기독교회 안에 종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곁에 있고,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종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형벌이 두려워서 교회 다니게 됩니다. 종의 영, 노예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과 행복이 없으며,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외롭게 살아갑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으면, 아무리 많은 달란트를 받아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영혼에게 살아 있는 신앙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영혼에게 어둡고 우울한 신앙이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교리와 예언이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에 신자들의 얼굴과 삶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됩니다. 그런 복음은 무기력하고 생명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한다는 것은 교회 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는 것은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달란트로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는 것을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오늘날 작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주의 종들은 심판을 받고 주인에게 형벌을 받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것은 슬기로운 처녀와 같은 경험을 가진 주의 종들만 할 수 있는 봉사입니다. 성령과 진리의 말씀으로 등불을 밝히 들고 서 있는 슬기로운 종들은 주인이 준 달란트를 이용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게 됩니다. ■

 

3부, 기름 파는 사람들, 기름 사는 사람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미련한 처녀들) 쓸 것을 사라 하니”(마 25:9)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오자, 잠에서 깨어난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나눠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기름을 나눠 줄 수 없을까요? 왜냐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우는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씀을 읽고 받은 성령의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해야 하고, 인생의 쓴 경험을 통해서 그릇에 기름을 채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배울 수 있으며, 긴 시간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때 배우는 경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처녀의 비유는 마지막 때 교회 안에 기름을 파는 자들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예수께서 경고하신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11,24).

물론, 그들이 파는 기름은 가짜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팔 수 있습니다. 가짜 기름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의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교회에서 기름을 팔고 있는데, 그 기름을 산 사람들은 이런 간증을 합니다.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등줄기가 뜨거워졌습니다.” “천장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내려오더니 가슴을 쳤고, 그때 내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수십명을 세워놓고 손을 뻗었는데, 그때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서 사람들이 바닥에 쓰려졌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니까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나왔는데 교회 전체가 한참 동안 웃었습니다.”

가짜 기름을 받기 위해서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는 분들에게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입니다. 매 주일 열심히 설교를 듣는 분들입니다.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름이 없기 때문에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 어떤 기도원에 가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진리를 모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게 됩니다. 허전함과 공허함을 이적과 은사로 채우려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입니다. 하나님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으로 기적을 구하다가 사탄의 덫에 걸려들게 됩니다. 감정과 느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결국 기적과 은사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다가 미련한 처녀가 되는 과정입니다.

 

최고의 교회성장법, 기름 팔기

오래전부터 한국 목회자들 사이에서 “은사가 최고의 마케팅이다.”라는 말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팔면, 교회가 가장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방언을 할 수 있다. 어떤 교회에 가면 병 고치고 치유 은사 받을 수 있다.”는 소문만 나면 설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팔 수 있는 교회는 건물이 세련되지 않아도 되고, 교인들이 친절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름(성령)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팔 수 있으면, 교회를 알리기 위해서 광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름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왜 그런 교회를 선호할까요? 죄와 세상을 버리지 않아도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교회를 좋아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도 성령의 기름을 나눠 주는 교회, 좁은 길을 걷지 않아도 구원을 개런티 해 주는 교회, 축복과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교회, 지켜야 할 계명과 원칙은 가능한 적게 말하고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교회, 이런 교회들이야말로 마지막 시대 미련한 처녀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교회입니다.

몇 년 전 신유 은사 집회에 참석했던 분이 절던 다리를 고치게 되었습니다. 지방 신문에 그분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 소개되었습니다. 다리를 절던 분이 안수를 받고 똑바로 걷게 되었으니 세상 언론사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다리를 절면서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그분에게 “집사님, 하나님께 고침 받으셨는데, 왜 다리를 절고 있습니까?”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 모두 집사님의 다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침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고 불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탄의 역사가 아무런 저항 없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신유 은사 집회가 서울의 변두리나 가난한 동네에서 주로 열렸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은사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유 은사 집회가 강남 부자 동네에서도 성황리에 열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짜 기름을 나눠 주는 집회나 교회가 의사, 변호사, 연예인, 교수와 같은 계층에도 깊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지위와 학식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개인적으로 알아주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자신이 하늘과 직접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사탄은 성령 파는 사람들을 대한민국의 상류층에게 보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 서점마다 교수나 영화감독과 같은 사람들이 쓴 신유 은사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지식인, 연예인, 예술인이 책을 썼기 때문에 독자들은 저자가 경험한 기름을 신뢰하게 됩니다. 신유 은사가 지식인과 상류층에 접목되면서, 과거에는 신유 은사집회를 “크리스천 무당들의 놀이”라고 비웃던 사람들까지 부정적 이미지를 버리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교회 안에서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당하게 될까요? 왜냐하면 사탄이 행하는 “큰 표적과 기사”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교회에서 기름 파는 자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우리가 그릇에 받아야 할 기름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입니다. 진짜 기름은 우리 속에서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는 성령입니다. 진짜 기름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가 우리 마음과 삶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줍니다. 그것이 진짜 기름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이 장터에 나가서 사는 기름은 겉에만 바를 수 있습니다. 가짜 기름은 속은 변화시키지 못하고 겉만 변화시킵니다. 속마음은 세상을 사랑하고 욕심을 붙잡고 있는데, 겉으로는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게 해 줍니다. 그것이 가짜 기름의 특징입니다. 물론, 가짜 기름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병자들을 고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가짜 기름을 그릇에 담으면, 속은 돈을 사랑하고 정욕적인데 겉은 경건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가짜 기름에는 진리가 없고 순종이 없으며 변화와 열매가 없습니다. 가짜 기름은 순간적으로 환희와 뜨거움을 주기 때문에 한번 그것에 취하면 그 맛을 포기하기 어렵게 됩니다. 가짜 기름을 받으면 진리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거짓과 허무함과 감정만 남게 됩니다. 지금 기름 파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가짜 기름을 나눠 주고 있는데, 그것을 사는 사람마다 미련한 처녀가 되어 참된 변화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사탄은 마지막 시대에 가짜 기름, 가짜 성령을 통해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의 마지막 장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0~13)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는데, 미련한 처녀들은 문이 닫혀서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이 없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혼인 잔칫집 주인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 미련한 처녀들은 오랫동안 신랑을 기다려 왔던 교인들입니다. 그래서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리자 곧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절당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미련한 처녀들의 슬픈 운명을 맞이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9~23).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방언을 했으며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더욱더 큰 충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너희를 안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어떻게 평생 동안 예배드리고 성경을 가르치고 은사와 권능을 행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단 한 번도 너를 안 적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그들을 거절하시는 이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19,23). 예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름다운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에게 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마음과 삶이 불법으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충성하는 실제적인 경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죄는 기름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성령이 결핍되었을 때 온갖 이상한 증세가 우리 마음과 생애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기름이 없으면, 유혹과 시험이 올 때마다 죄에 끌려다니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습관적인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만 순종할 수 없습니까? 그릇에 기름이 떨어진 것입니다. 지금 주 앞에 나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주여, 제 문제가 무엇인가요? 왜 저는 죄를 버릴 수 없나요? 붙잡고 있는 죄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

 

2부, 기름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

등잔에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기름을 채우는 경험은 나와 하나님만 아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통해서 경험을 주십니다. 가난을 갖고 있으면 가난을 통해서 경험을 주시고, 병을 갖고 있으면 병을 통해서 경험을 주십니다. 내가 갖고 있는 말씀, 내가 알고 있는 빛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알고 있는 빛과 알고 있는 말씀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진리와 기름의 관계

기름은 진리를 통해서만 내 속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면서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께서 성령을 “진리의 성령”으로 부르신 이유는,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비성서적인 복음과 거짓 교리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과 은사가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거짓 복음과 비성서적인 교리를 믿고 있으며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성령께서 기적과 은사를 주신다면, 사도 바울이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경고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그러므로 성령을 달라고 매달리기 전에 진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성령을 구하면, 사탄은 그런 사람을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으로 멸망의 늪으로 끌고 갑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실제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간절한 심령으로 진리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갈급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만나게 되고, 진리가 담겨져 있는 책자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 갈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련한 처녀가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짐승의 표 환난이 올 때 자신이 미련한 처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모든 자”가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 13:16).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예수께서 가장 강조하신 재림의 징조는 지진과 전쟁과 홍수가 아니라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더러운 영들이 들어와서 거짓 가르침, 거짓 복음, 거짓 성령을 퍼트린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마지막 시대의 미혹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작업을 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사도 바울은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마비된다고 했습니다. 왜 양심이 마비될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무시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해도 두려움도 없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예수를 영접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가르침.” 이런 가르침들이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하게 퍼지고 있는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양심이 화인 맞게 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도 양심의 가책이 없게 됩니다. 사탄은 죄를 붙잡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복음을 교회 안에 깊숙이 퍼트렸습니다.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번째 미혹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거짓 성령(가짜 기름)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거짓 복음과 거짓 성령의 역사로 미혹당한 기독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예수께서도 사도 요한과 같은 시선으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보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므로 말세에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르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탄의 미혹을 따라가고 있으면서,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미혹의 시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리로 미혹당하고, 감정적 신앙과 거짓 성령으로 미혹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 교회의 문제는 기름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미혹이 나타날 때 수많은 미련한 처녀들이 짐승의 우상에게 달려가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3~15).

 

그릇이 비어야 기름이 채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릇이 비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이미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릇이 다른 것들로 채워지면 미련한 처녀로 남게 됩니다. 그릇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더럽고 추한 것들로 채워지면, 기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한 근심과 염려로 채워지면, 그릇에 기름이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고 결국 미련한 처녀가 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가난한 사람만 생활의 염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염려 때문에 그릇을 비우지 못하게 됩니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봐 염려하고, 그릇에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근심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름을 채울 수 있는 빈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위로를 갈급하고 구하는 심령입니다. 땅에 속한 것들에 시달리고 지쳐서 하늘에 속한 것을 사모하는 심령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은 허무를 느끼고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향하여 손을 뻗는 심령입니다. 죄와 세속에 끌려다니는 삶이 너무나 싫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절규하는 심령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에 기름이 채워지게 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아이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지금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엄마 품 안에서 잠이 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어린아이는 엄마만 있으면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커가면서 장난감이 있어야 행복하고, 예쁜 옷이 있어야 만족합니다. 더 나이가 들면 돈이 있어야 행복하고, 좋은 집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더 나이가 들면, 말 잘 듣고 신앙 좋은 자녀가 있어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은퇴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행복합니다. 처음에는 엄마만 있으면 만족했는데, 커 가면서 돈과 환경 속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물질과 원하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행복과 감사가 사라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그릇이 어린아이 마음같지 않으면 기름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올 때까지 세상을 쫓아다니다가 자신이 미련한 처녀라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세상과 물질을 쫓아다니다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념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입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인정과 성공에 목을 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하나님 한 분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내게는 당신 한 분뿐입니다. 저는 당신 한 분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변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질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간증합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5~6).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그릇을 비울 수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께서 나와 내 가족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은 죽어 가는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서 기름을 채우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3).

우리의 그릇이 비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름을 채워 주십니다. 그릇에 기름이 가득 채워질 때까지 채우실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기름을 채워 줄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릇을 비우시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온갖 염려와 허망한 것들을 버리고 진리와 복음으로 그릇을 채우겠습니까? 오래전에 사르밧 과부의 그릇에 기름을 채워주신 하나님께서 비어 있는 우리의 그릇에도 성령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오해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없다

오늘날 어떤 분들은 성령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기운이나 힘이나 파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대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없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성령님과의 관계도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성령을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그분께 도움을 구하고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성령의 판단과 생각과 지혜를 구하지 않게 되고 내 곁에서 도와주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하늘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이름”을 가진 인격체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 바울도 성령을 생각하고 근심하는 인격체로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자녀가 부모의 권면을 거절하면 부모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면 성령의 마음에도 근심이 생깁니다. 성령의 마음에 근심을 주는 상황이 지속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을 쳐 주실 수 없고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격체가 아니면 근심이 생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속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성령께서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나오는 어떤 기운이나 파워라면 어떻게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사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완전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성령을 진리로 인도하는 분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말하고 듣고 장래 일을 알려주는 인격체입니다. 기운이나 파워는 진리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13, 26).

또한 예수께서는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보다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더 심각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성령께서 독립된 인격체로서 중요한 사역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거절하면 처음에는 마음이 아프고 상처가 나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면 마음의 고통과 통증을 잃어버리고 마비가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단단하게 굳어 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을 거스리는 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호소하시고 우리 마음을 찌르실 때 성령의 생각과 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내 속에 있는 그릇에 기름을 계속해서 채우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그런 경험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죄가 떨어져 나가며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기름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 와야 이기적인 생각과 음흉함과 간계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세속적인 생각과 욕심으로부터 풀려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릇에 기름이 채워져야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옮겨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은 그릇에 기름이 채워진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일어나는 하늘의 기적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6~18). ■

 

1부, 모두가 깰 때는 늦은 때이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마 25:6~8)

모두 깨어서 일어날 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에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노아 홍수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비가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알았을 때에는 이미 방주 문이 닫혔을 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곧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재림의 징조와 예언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 온 세상을 미혹하는 사탄의 역사가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짐승의 표가 온 세상에 강요될 때 수많은 미련한 처녀들이 미혹당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3~15). 최후의 미혹은 “큰 기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이 내려오는 이적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지자 엘리야의 기적이 나타났다!”고 소리칠 것입니다. 교파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큰 이적”을 중심으로 하나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 중에는 짐승의 표 환난에 대한 말씀과 예언을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이 생겨도 그것이 “미혹”이라는 사실을 분별할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올 때 미련한 처녀들은 잠에서 깰 것입니다. 그때는 엄청난 징조가 나타나고 예언이 분명하게 성취되기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제 때가 되었다. 예수께서 곧 오신다. 이제는 세상 끝이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가 현실로 나타나고 온 세상이 뒤집힐 텐데 누가 잠들어 있겠습니까? 아마 예수 재림에 대해서 한 번도 설교하지 않았던 목회자도 그때가 되면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을 어떻게 주님께 바쳐야 됩니까?”라고 물어볼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까요?”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서로 기도하자고 말하면서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문제를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온다!”는 큰 외침이 들려올 때 미련한 처녀들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름이 없는 것입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가야 하는데, 등잔이 꺼져 가는 것입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마 25:7~8)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신랑이 온다’는 확실한 징조가 나타나고 짐승의 표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을 볼 때에는 기름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는 지금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에게 정말 중요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올 때 등불이 꺼진 미련한 처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예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기름을 채우려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따라가는 경험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진리를 바라보면서 걷는 경험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실 때 말씀을 붙잡고 일어서는 경험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훈련입니다. 그런 경험은 마지막 징조가 나타나고 짐승의 표 환난이 일어날 때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번개와 천둥같은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을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따라 사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

 

1편, 기름 때문에 두 무리로 나눠지고 있습니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마 25:1~2)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첫 번째 비유는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 안에서 정확하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열 처녀는 예수께서 재강림하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입니다. 열 처녀는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비추기 위해서 등불을 들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열 처녀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열 처녀 중 어떤 사람들의 등불은 환하게 타오르는데, 어떤 사람들의 등불은 꺼지게 됩니다. “미련한 자들이…우리 등불이 꺼져가니”(마 25:8).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왜 꺼지게 되었을까요? 신랑이 더디 오시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되서 예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께서 늦게 오시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시대 성도들은 지금 시간으로 테스트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강림이 지체되면서 기다리던 성도들의 신앙과 마음이 달라지고 변질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랑이 올 것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나뉘어지는 이유를 “기름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련한 처녀, 등은 있지만 기름이 없는 사람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 25:3~4)

미련한 처녀는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미련한 처녀에게 기름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결핍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니”(눅 4:18).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성경에서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라”(시 119:115).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있는데 기름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성경 교리와 지식은 있는데 성령이 결핍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교리와 지식이 내 속으로 들어가지만 죽은 “나”를 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경험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도 교리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 것이 있고, 설교를 통해서 받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받은 말씀과 교리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등잔에서 나오는 빛은 금세 꺼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미련한 처녀에게는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붙잡은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말씀을 앉아서 듣기만 하는 것입니다. 왜 미련한 처녀들은 말씀을 앉아서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을까요?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겔 33:31). 왜 말씀을 앉아서 듣기만 한다고 했습니까?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이기심과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처녀들도 열심이 있습니다.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고 깨달아도 마음을 바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욕심과 정욕을 못 박지 않습니다. 진리를 따라서 좁은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련한 처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르기 위해서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전적인 헌신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등잔은 갖고 있지만 기름이 없는 모습입니다.

등잔은 있지만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등잔에서 빛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성령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리도 알고 말씀도 알지만 등잔에서 빛이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기 때문에 열매가 없고, 열매가 없으면 말씀이 빛이 되어 나갈 수 없습니다. 열매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없으면 이웃에게 빛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미련한 처녀에게 기름이 부족한 이유는 성령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기 때문에 말씀을 무시하게 되고, 성령의 호소를 외면하기 때문에 참된 회개를 못하게 되며, 성령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지 못하게 되고, 성령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읽지만 열매 맺지 못하고 빛을 비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는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참된 중생의 경험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결국에는 “기름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있는가? 없는가?”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 등과 기름을 가진 사람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미련한 처녀와 무엇이 다른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등도 가져갔지만, 여분의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왜 마지막 시대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준비할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령이 없으면 말씀이 죽은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말씀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나를 그리스도께 바치는 지점까지 끌어가지 못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령이 없으면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닌 말씀은 이웃과 사람들에게 빛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기름이 없으면 사탄의 미혹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영적 눈이 열리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교회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탄의 미혹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조는 사람들, 자는 사람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모두) 졸며 잘새”(마 25:5)

신랑의 오심이 지체되면서 열 처녀가 모두 졸고 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일까요? 그리스도의 재강림이 늦어지면서 성도들이 조는 사람들과 자는 사람들로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조는데, 미련한 처녀는 잡니다. 졸고 있다는 것이 어떤 상태입니까? 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피곤하니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뜻합니다. 잠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재림의 징조가 보이면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지만 징조가 지나가면 다시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상태가 “졸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시대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경험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졸고 있을 때, 미련한 처녀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들은 깊이 잠들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졸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깊이 잠들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깊이 자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읽고 예언을 살피면서 깨어 있으려고 애를 쓰십니까?

 

열 처녀 모두 깨어 일어난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 25:6)

예수께서 오시는 때는 깊은 밤이 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졸고 있고, 미련한 처녀들이 잠들어 있을 때 갑자기 “신랑이 온다!”는 큰 외침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강림은 미련한 처녀들에게는 갑작스럽게 도적처럼 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깊이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슬기로운 처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형제들아(슬기로운 처녀들)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4~6)

지금 교회 안에 조는 사람들과 자는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열 처녀 모두 교회가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헌금을 드리기 때문에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열 처녀 모두 등을 가지고 있고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슬기로운 처녀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라 신랑이 온다!”라는 큰 외침이 들릴 때에는 그들이 어떤 처녀였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열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마 25:6~7)

예수께서는 열 처녀가 모두 깨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깊이 잠들어 있는 미련한 처녀들까지 일어나게 될까요?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릴 때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징조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 모두에게 “이것은 틀림없이 예수께서 오시는 마지막 증거다.”라는 확신을 주는 징조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는 자와 자는 자가 모두 깨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징조를 보고 깨어 일어난 열 처녀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요? ■

 

서론,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3가지 예언

마태복음 24장에는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전에 나타나는 징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재림의 징조들이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나타날 때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성도들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며, 교회 안에 어떤 미혹이 일어나게 될까요?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있는 분들은 마태복음 25장을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께서 주신 세 비유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비유로 나오지만, 말세에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세 비유를 통해서 세상 끝에 성도들과 주의 종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과 주의 종들이 어떻게 구원받고 어떻게 멸망당하게 되는가를 예언하셨습니다.

 

세 비유, 세 예언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하나로 연결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라고 질문했는데(마 24:3),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재림의 징조(마 24장)와 세 가지 비유(마 25장)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가장 강조하신 재림의 징조는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징조입니다.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것은 말세에 교회 안에 들어오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게 될 복음과 교리를 조심하고, 그들이 나눠 주게 될 거짓 성령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4)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 24:5) 거짓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을 미혹게 하리라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 24:23) “그때에…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 24:25~26)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후, 마태복음 25장에서 세 가지 비유/예언을 알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 24장은 마지막 시대 징조들이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일어나는 동안 교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하는 일들이 생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시대 교회 안에서 전 세계적인 미혹이 일어날 때 의인들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며, 악인들은 어떻게 잃어버림을 당하게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말세에 성도들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갈라질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마지막 시대에 주의 종들이 “착하고 충성된 종들”과 “악하고 게으른 종들”로 나눠질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께서 오실 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양과 염소로 나누어져서 구원과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세 가지 예언이 지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 모습을 보고 계십니까? 성도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우리가 지금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종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이 시대에 누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고 그들은 어떤 설교를 하고 무엇을 강조하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회 안에 수많은 종파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믿는 것도 다양하고 교단도 여러 종류이며 같은 교파 안에도 수백 개의 분파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파에 속해 있든지 간에 두 무리로 나눠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은 왜 둘로 나눠지게 될까요? 무엇 때문에 주의 종들이 둘로 갈라지게 될까요? 독자들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번 호에서 찾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세 비유를 살펴보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상이 바뀌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이번 호를 통해서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지금 이 시대를 위한 말씀으로 살아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친절을 베풀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의 사상과 생각하는 방법과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를 주신 목적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15호를 시작하며…

예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 유대 교회는 가장 깊은 암흑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 교회의 역사가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교회는 점점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교회도 있고 성경도 있지만, 마지막 시대를 위한 말씀을 전하는 종들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 12). 성도 여러분, 선지자 아모스가 말세에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말씀의 기근이 오래 전에 기독교회를 덮쳤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이 들려서 인터넷을 통해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지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말씀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주 인터넷에 수많은 설교가 올라오지만, 죽은지 오래 되어서 마른 뼈가 되어버린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은 정말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교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으며 설교를 계속해서 듣고 있는데 신앙에 생명이 없고 삶에 변화가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말씀의 기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오는 이유는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기름은 구하기가 힘든데, 가짜 기름은 아무데서나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를 살펴볼 것입니다. 지금 기름 때문에 기독교회가 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 뿐 아니라 주의 종들도 두 무리로 나눠지고 있습니다. 이번 호를 통해서 우리가 어느 편에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마지막 사명> 편집장